밤에 더 강렬한 꽃이 있다. 벚꽃. 가로등 불빛에 드러나는 하얀 밤 벚꽃 무리는 숨을 멎게 한다.
꽃놀이 중 으뜸이 ‘밤 벚꽃 놀이’일 것이다. 밤 벚꽃 아래서 ‘무장해제’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목석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신체 일부가 된 이후, 우리는 꽃을 보지 않는다. 두 눈으로 꽃을 보지 않고 찍는다. 카메라가 두 눈을 대체한다.
꽃만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갓난아이, 반려동물, 맛난 음식, 저녁노을, 북두칠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우리를 멈추게 한다. 사라진 고향 집, 그 사람과 함께 불렀던 그 노래, 용서받지 못한 그 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때로 발목을 붙잡는다.
이 시를 생태론 관점에서 읽으면 보다 큰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첫 연에서 ‘꽃’은 대상이다. 꽃을 보는 인간이 주인공이다. 꽃은 순간이고 인간은 영원하다는 그릇된 인식. 이런 우월의식을 생태론에서는 인간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
세번째 연에서 꽃과 인간의 관계가 역전된다. 내가 내일 사라질 수도 있으므로 꽃 앞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나의 삶도 이전과 달리 보일 것이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꽃을 비롯한 모든 비인간 존재 앞에서 겸손해질 것이다.
봄의 생명력을 마주하며 삶의 유한성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일 내가 죽는다면?’ 이런 상상을 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나는 얼마 전부터 시제를 과거형으로 바꿨다. ‘어제 내가 죽었다면?’
질문을 바꿔야 답이 바뀐다. 이 봄날, 이렇게 자문해보자. ‘내가 어제 죽었다면?’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