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_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만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취미 독서와 기획 독서
나는 책벌冊閥이다. 벌閥이란 본래 대문의 왼쪽 기둥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족벌族閥, 파벌派閥, 학벌學閥, 재벌財閥 등의 단어에서 보듯이 주로 출신·이해·인연 따위로 함께 뭉치는 집단이나 세력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에서 ‘벌’은 영 호감이 가지 않는 말로 전락해버렸다. 학파學派는 전혀 어감이 나쁘지 않은데 학벌은 더러운 말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스스로 책벌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책 읽기를 즐기며, 책 쓰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책 모으기에 열심인 사람이 비난받을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아 당당히 고백한다.
책벌이라는 소문이 나자 온갖 신문과 잡지에서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온갖 신문과 잡지에서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퍽 여러 해 동안 주요 일간지의 칼럼 코너인 〈최재천의 책꽂이〉, 〈최재천의 책 베개〉 등에 개인 서평을 정기적으로 기고해왔다. 개인 칼럼에는 내 뜻대로 책을 선정하여 서평을 쓸 수 있는 권한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서평을 쓰면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맘껏 읽고 그에 대한 내 느낌을 말할 수 있어 좋았다. 15년 이상 여러 다양한 일간지에 글을 쓰고 살았지만, 서평을 쓸 때가 가장 행복했다. 문화부 기자들의 급작스러운 요청에 의해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듯 서평을 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런 때에는 대개 절대 시간이 부족하여 책을 충분히 곱씹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독서 편식이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때로는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책을 평하라는 것인지 황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덕분에 정말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어 그 또한 좋았다.
책벌에게는 또한 추천의 글을 써달라는 호사가 따라온다.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글을 가장 먼저 읽는 특권과 쾌감은 쉽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내가 과연 추천해도 좋을 책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 위해 읽는 독서처럼 날이 선 읽기도 별로 없을 것이다. 먼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한 다음 과연 글이 그 의도를 충실히 반영했는가를 검토하고, 때로는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만용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고는 마치 내 자식이라도 태어나는 양 온 세상에 고한다. 서평에서는 종종 남의 자식이라고 헐뜯기도 하지만, 추천의 글은 대개 내 자식 감싸듯 포근해질 수밖에 없다. 그 포근함 때문일까, 나는 추천의 글을 참 많이도 썼다.
서평과 추천의 글을 쓰느라 행복한 책 읽기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일본의 지성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만났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런 책을 한 권 쓰리라 다짐했다. 2011년 드디어 내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나도 이런 책을 읽어왔노라’ 하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평과 추천의 글들을 엮으려 시작한 작업이 어쩌다 보니 살아온 이야기를 훨씬 많이 쏟아내는 주책스러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온 책이 바로 《과학자의 서재》이다. 그 책은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또는 공지영 작가의 《괜찮다, 다 괜찮다》 같은 책처럼 읽힌다. 내 삶의 위기마다 나를 바로잡아준 몇몇 고마운 책들은 내 《과학자의 서재》에 꼽아둘 수 있었지만, 미처 진열하지 못한 다른 책들을 한데 모아 여기 《통섭의 식탁》을 마련했다.
독서를 취미로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하는 독서도 때론 필요하리라. 하지만 취미로 하는 독서가 진정 우리 삶에 어떤 발전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조금 공허해진다. 우리의 눈은 삼차원 입체를 보도록 진화한 기관이다. 그런데 누군지는 몰라도 최초로 책을 발명한 양반이 이차원 평면으로 디자인하는 바람에 거의 모든 사람의 눈이 다 망가지고 말았다. 눈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취미 독서를 해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독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독서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었는데 술술 읽힐 리는 없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책 한 권을 뗐는데 도대체 뭘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기왕에 읽기 시작한 그 분야의 책을 두 권, 세 권째 읽을 무렵이면 신기하게도 책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차츰 내 지식의 영역이 넓어지는 가슴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미래학자들은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평생 직업을 적어도 대여섯 차례 바꾸며 살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다면 지금 중고등학생들은 직업을 일고여덟 번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은퇴하고 놀고먹는 사람들의 수가 정작 일하는 사람의 수보다 많아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정년 제도가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30세부터 일하기 시작하여 90세까지 적어도 60년을 일하며 살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긴 60년을 한 직장에서 버틸 수는 없기에 자연히 어려 직업을 전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직장을 얻을 때마다 다시 대학에 돌아가 새로운 전공 공부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그다음으로 탁월한 선택은 단연 독서이다. 대학에서 전공 공부를 했다고 해서 그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가 되어 취직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알고 취직한다. 그런 다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학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며 직장 생활을 한다. 새로운 분야에 일단 발을 들여놓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해볼 수 있다. 대학에서 인문사회계통을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 40대 초반에 쫓겨나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다고 하자. 길에서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동창을 만났다.
“반갑다, 친구야. 요즘 어찌 지내냐?”
“어, 난 다니던 회사 관두고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어. 너는 어찌 지내냐?”
“아, 나는 사업을 하나 시작해서 요즘 좀 정신이 없어.”
“사업? 어떤 사업인데?”
“으응, 나노기술을 이용하여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이쯤에서 당신이 만일 기껏해야 취미 독서만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노기술에 대해 아는 게 없을 것이고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헤어질 것이다.
“그래, 잘해라. 다음에 또 만나자.”
그러나 당신이 기획 독서를 통해 나노과학에 관한 책을 두어 권 읽은 사람이라면 그 친구와 대화를 시작할 것이고 어쩌면 그 대화가 길게 이어지며 그 친구와 동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노과학계의 대가라서 새로운 직장을 얻은 것은 물론 아니다. 쥐뿔만큼만 알고 덤빈 것이다. 하지만 일이란 대개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게 들어간 새로운 직장에서 또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또 한 10년 사는 것이다. 따라서 고령시대를 살아가는 데 기획 독서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전략이다.
왜 ‘통섭의 식탁’인가?
통섭의 식탁? 왜 통섭인가? 기획 독서가 당신을 통섭형 인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통섭의 개념을 우리 사회에 소개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통섭형 인재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 스스로 통섭형 인재가 되었노라 자부할 수는 없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통섭형 삶을 살아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인이 되겠다고 맘먹고 일찍이 문학을 가슴에 품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문과와 이과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엉뚱하게 이과로 배정되어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분단의 아픔이 훗날 나로 하여금 과학자로 살면서도 끊임없이 인문학을 기웃거릴 수 있는 자유분방함을 선사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책에는 그런 나의 아름다운 방황의 흔적이 질펀하게 널려 있다.
왜 식탁인가? 통섭은 19세기 영국의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이 만든 용어 ‘consilience’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난 개념이다. 그러나 consilience라는 말은 별로 인기가 없었는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웬만큼 두툼한 영어 사전에도 실리지 않은 고어가 되어버렸다. 휴얼은 학문 간의 넘나듦을 도모하기 위해 ‘함께 솟구침jumping together’이라는 개념의 용어를 만들어 소개했지만 그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소화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애써 만든 단어가 사장된 게 아닐까 의심해본다. 내가 우리 사회에 통섭의 화두를 처음으로 던진 게 2005년이니 이제 햇수로 6년이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통섭의 개념은 실로 놀라울 속도로 우리 사회 곳곳을 파고들었다. 학계는 물론, 기업들도 앞다퉈 통섭을 끌어안으려 한다. 영국인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던 통섭의 개념이 왜 우리에게는 이처럼 쉽게 다가오는 것일까?
나는 우리 음식 문화에서 그 까닭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비빔밥이라는 실로 기이한 음식을 개발한 민족이다. 이제는 비행기 기내식으로도 인기가 있지만 우리 음식이니 한번 냉정하게 얘기해보자. 비빔밥은 솔직히 정말 어색한 음식이다. 크고 움푹한 그릇에 밥을 한 그릇 퍼 넣은 다음 왜 어울리지도 않는 온갖 종류의 채소를 그 위에 뿌리는 것일까? 그 한 가운데에다 왜 또 달걀 하나를 부쳐 떡 하니 얹는 것인가? 하지만 참으로 어색한 이 조합에 고기 조금 볶아 얹고, 고추장 풀고, 참기름 한 번 두르고 비비면 돌연 환상적인 맛이 탄생한다. 어쩌면 섞는 것 하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매일 받는 밥상은 또 어떠한가? 서양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먹을 음식을 하나의 접시 위에 받는다. 그래서 그 접시 위에 놓은 음식만 다 먹으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별 고민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한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식탁에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대개 밥 한술 뜬 다음 한입에 반찬 두어 가지를 한데 넣고 먹는다. 첫 술에 두부, 콩자반, 그리고 김치를 한입에 넣고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고 해서 밥을 마칠 때까지 똑같은 조합, 즉 매번 두부, 콩자반, 김치의 조합을 반복하며 식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한국인의 두뇌는 밥 먹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반찬의 조합을 창조해내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생각한다. 섞는 것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제일 잘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내가 읽은 책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비벼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교자상 한가득 온갖 반찬들을 여기저기 널어놓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서빙은 서양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선택은 여전히 여러분의 자유이고, 음식이 나오는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 양푼에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던져 넣고 얼큰하게 비벼 드셔도 좋다.
메뉴 소개
셰프 추천 메뉴 3은 이를테면 ‘오늘의 요리’이다. ‘통섭 식당’이 자신 있게 내놓는 요리인 만큼 맛있게 드시기 바란다.
애피타이저는 다소 부담되는 요리를 드시기 전에 입맛을 돋우는 전채인 만큼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로 엮었다. 여기에는 소설도 있고 전기도 있고 몇몇 희망의 메시지도 담았다.
메인 요리는 아무래도 자연과학에 관한 책들로 메뉴를 구성했다. 동물의 행동과 사회구조에 관한 책들을 모아 ‘Part 1 동물을 알면 인간이 보인다’로 묶었고, 생명의 비밀과 진화, 그리고 유전자에 관한 책들은 ‘Part 2 생명, 진화의 비밀을 찾아서’에 나열했다. ‘Part 3 과학, 좀 더 깊숙이 알기’에는 생명과학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과학 분야를 소개하는 책들이 담겨 있다.
디저트로는 과학자들의 특별한 삶의 향기를 담아냈다. 온갖 풍요로운 과학 지식을 드신 다음 그런 과학 이론을 연구한 과학자들의 생애에 관한 뒷이야기들로 입가심을 하시는 것도 유쾌한 일일 것이다.
일품요리에는 반드시 과학과 연계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요리가 있는 인문사회 분야의 책들을 마련했다.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퓨전 요리는 서양과 동양의 요리가 한데 어우러지듯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연출해낸 통섭의 요리들이다. 음식점에서 퓨전 음식을 드시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듯이 여기 소개된 책들을 읽으려면 조금의 심호흡이 필요할 것이다.
하버드대의 영장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요리 본능》이란 책에 나와 함께 추천의 글을 쓴 인기 셰프 에드워드 권은 이렇게 말한다.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셔도 당신은 자신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이다. 나는 오늘도 셰프복의 단추를 끼우고, 접시라는 거울에 요리라는 내 얼굴을 비춰 사랑하는 나의 고객들에게 보여주려 즐거운 마음으로 뜨거운 불 앞에 선다.” 비록 통섭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자가 마련한 메뉴이지만, 이 재료들을 가지고 여러분만의 지적 요리를 만드시기 바란다. 마크 트웨인은 일찍이 “고전이란 사람들이 칭찬은 하지만 읽지는 않는 책”이라 했다. 여기 《통섭의 식탁》에 올려놓은 책들은 고전이 아니다. 그러니 칭찬은 하지 마시고 그냥 즐겁게 읽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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