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의 『스토너』Stoner? 생소한 작가인 데다, 소설 제목치고는 어색했다. 『스토너』라니, 약물 중독자의 인격해리 체험보고서인가? 아니면 돌처럼 무감각해진 사람이라는 뜻일까? 『스토너』RHK, 2015를 읽어보자고 했을 때, 책을 선정하는 월독클럽 회원들의 탁월한 안목은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스토너가 등장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윌리엄 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 주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니까. 과연 어떤 인물을 묘사하려고 자극적인 서사와 현란한 반전으로 차고 넘치는 소설시장에서 이렇게 고전적인 연대기적 서술로 시작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인간의 죽음이 선언된 지 오래된 신자유주의적 시장사회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인간의 품위 같은 것은 개도 물어가지 않을 개뼈다귀 같은 시대에, 품위 있는 인간을 그리고 싶어 하는 소설적 욕망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소설은 1965년 미국에서 출판되었지만 반세기 동안 잊혀졌다가 2013년 무렵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미국으로 역수입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이 어떻게 문화적 알츠하이머를 거슬러 부활하게 되었을까? 오래전 오규원이 통탄하듯,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이 된 상품화 시대에, 소설에서나마 ‘품위 있는’ 인간과 만나고 싶은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스토너』의 부활은 조지 오웰의 말처럼 문학의 유일한 평가 기준이 세월임을 입증한 것처럼 보인다.
스토너의 아버지는 상투적인 남부 백인 남성 이미지KKK단과 같은와는 달리 식물처럼 땅에 순응하는 가난한 농부였다. 척박한 땅과 씨름하느라 그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구부정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스토너의 부모는 ‘노동으로 인해 굽어진 몸,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삶을 오로지 견뎌냈다. 스토너 또한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는 노동으로 열일곱 살 때 이미 아버지처럼 어깨가 구부정해지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그나마 땅의 횡포로부터 멀어졌지만, 평생 땅의 인질로 붙잡혀 살았던 그의 부모는 죽음으로 마침내 가혹한 땅에서 해방된다.
스토너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농대에 입학했다.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라고 한다면 해마다 소출이 줄어드는 땅을 경작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그는 농대생이었지만 교양필수인 영문학 입문을 수강해야만 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뭔지도 몰랐던 그에게 시니컬한 아처 슬론 교수의 수업은 일종의 계시였다.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셰익스피어가 자네에게 건네는 말이 들리는가?”라는 교수의 질문에 메두사의 눈길과 마주친 사람처럼 스토너는 돌처럼 굳어졌다. 슬론 교수의 질문은 죽은 삶을 살았던 스토너에게는 되살아나라는 잔인한 명령처럼 들렸다. 그 잔인한 명령은 마비된 삶에서 그를 마법처럼 깨어나게 만들고 문학의 세계로 입문시킨다. 셰익스피어와의 만남으로 인해 스토너는 땅이 아니라 시를 선택하게 된다.
스토너가 사치스러운 학문이 아니라 생존기술을 배우고, 취미로 시를 읽었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다가 죽어버린 부모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흙을 경작하는 농부가 아니라 미주리 주의 작은 시골 대학에서 학생을 경작하는 선생으로 출발한다.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으로 은행장의 딸인 이디스의 연약한 손을 잡고 결혼에 이른다. 두 사람 사이에서 그레이스라는 딸이 태어난다. 스토너는 학위논문을 출판하고 정년이 보장된 조교수가 된다. 여기서 끝난다면,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촌 출신 청년의 사소한 성공 사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소설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아내 이디스의 시샘과 도발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는 과묵하고 수동적인 스토너의 삶에는 이렇다 할 사건마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광합성을 하면서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식물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디스로 인해 스토너의 식물과 같은 삶에는 무력한 인간이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과 깊은 슬픔이 스며든다. 그렇다고 스토너에게 아무런 열정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한때의 열정이 그에게는 고통이자 슬픔이 된다. 열정은 자기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다기보다 외적인 자극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그런 수동성은 스토너의 삶에 수난과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를 살았지만, 그는 정의로운 전쟁과 같은 대의명분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국가폭력은 대지를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인다. 냉소적이고 기지가 번뜩였던 친구 매스터스는 자원입대했다가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한다. 하지만 스토너는 구태여 전쟁터를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그의 세계는 대학과 가정이 전부였지만, 이 협소한 세계가 그에게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스토너의 일상을 결전의 장으로 만드는 인물 중 한 명이 이디스다. 이디스는 미국 문학이 보여주었던 부유한 남부출신 여성 히스테리의 전형적인 계보를 잇는다.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에 등장하는 침대에 누워 불평하느라 인생을 소비한 병약한 어머니 캐롤린 콤슨, 유진 오닐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등장하는 우아한 남부 귀족 출신 블랑슈. 블랑슈는 몰락한 남부 귀족의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고 보호받는 데만 익숙한 여자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재능있는 남자의 피를 빨아먹고 되살아나는 뱀파이어 데이지 등. 이들처럼 이디스는 지적인 남자의 재능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갈시키면서 기생하는 히스테리 뱀파이어처럼 보인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고 했던가. 떨어지는 물방울도 돌을 뚫는다.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 것처럼 계속되는 이디스의 히스테리컬한 시간차 공격에 돌 같은 스토너의 삶에도 구멍이 뚫린다. 그의 지력은 마모된다. 이 소설에서 이디스의 역할은 스토너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주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디스는 스토너가 학문적인 자리를 잡아가려고 하면 그에게 빚을 떠안겨서 연구할 시간을 빼앗는다. 스토너가 딸과 서재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면 그에게서 딸을 빼앗는다. 서재가 스토너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면 그 서재를 빼앗고, 책이 그에게 소중한 것이면 책을 빼앗는다. 이디스는 적군처럼 스토너의 공간을 무단 침범하고 점령한다. 이런 시간차 공격이 있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세계로 더욱 완강하게 침잠한다. 스토너가 같은 대학 시간강사인 캐서린과 사랑에 빠졌을 때 독자로서는 바위에 떨어진 풀씨가 자란 것처럼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스토너의 열정에 공감하게 된다. 심지어 스토너의 삶에서 훼방꾼 역할만 했던 이디스마저 캐서린과의 관계를 모른 척해준다.
스토너는 희생자 역할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체념한다. 아버지의 자살 이후 이디스는 스스로 변하고자 노력한다. 그녀는 외모부터 바꾼다. 단발머리, 짧은 치마, 짙은 화장, 피워문 담배에 이르기까지, 이디스는 당대의 신여성으로 가장무도회를 한다. 연극을 한답시고 극단 사람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그녀의 변신에 주목하기보다 자기 세계에 만족하고 심지어 자족적인 행복감으로 빛나 보인다. 그럴수록 이디스는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스토너 앞에서 더더욱 히스테리증자가 된다.
스토너의 추락을 부추긴 것은 이디스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를 보호해준 바로 그 대학사회였다. 대학이 진리추구의 상아탑이기는 개뿔. 스토너의 대학원 친구였던 마스터스의 지적처럼 “대학은 보호시설이자, 요양소, 환자, 노인, 불평분자, 그 밖의 바깥세상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기인들이자 무능력자들을 위한” 피신처다. 대학 바깥 사회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스토너가 그마나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준 곳이 대학사회다. 하지만 그곳에서마저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와 같은 학과장 로맥스, 교활한 대학원생 찰스 워커와 같은 자들과 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면서 버티고 견딘다.
젊은 시간강사들은 스토너를 헌신적인 교육자라고 부르지만 그 말은 헌신이라는 이름 아래 강의실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꼬장부리는 꼰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학과장 로맥스의 위협으로 사랑했던 캐서린이 떠나도 그는 속수무책으로 견딘다. 딸인 그레이스가 이디스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도 깊은 슬픔으로 지켜보기만 한다.
그렇게 하여 스토너는 학자, 선생, 남편, 아버지, 연인의 역할에 실패하고 죽는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독자에게 미묘한 위안을 준다. 인생이란 견디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스토너의 인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남겨준다. 비록 그가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에 영웅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의 부모처럼 무의미하게 땅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독자가 스토너를 인생의 실패자라고 간주한다면, 그럼 너는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니, 라고 이 소설은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