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자가 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책이 서평자를 고르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다른 걸 쓰려고 해도 어떤 책은 끈질기게 말을 건다. 이걸 쓰라고. 그러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압력을 느낀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관종과 관음사이』문학동네, 2015는 신간은 아니다. 2007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뒤 한국에서 2015년에 번역되었을 때 읽고 책장에 두었다. 무심코 꺼내든 건 TMI에 갑분싸해지는 시대에 이 일본소설이 무척 짧은 장편이어서 읽기도 평을 쓰기도 쉽다고 생각해서였다.
잊고 지냈던 책을 읽기 시작하자 가네하라 히토미가 만만한 책을 쓸 작가는 아니므로 그의 책은 다시 놀라웠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충격 발언과 영상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SNS, 그리고 그것을 검색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세상사에 참여하는 나와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내부가 무엇인지가 이 소설에서 분석되고 있었다. 한 블로거는 가네하라의 소설이 우울할 때 더 우울해지는 책이라면서 ‘쓰레기 책’으로 분류해놓았다.
‘관종’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반드시 관심을 받기 위해 눈길을 끌 만한 언행을 생산해야 한다. 반면, ‘얼굴 천재’이거나 젊고 재능이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면 쉽게 주목받는다. 이상화된 형태로서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런 빼어난 자들은 보는 자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누구나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굳이 뭘 안 해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눈길을 끌기 위해 자기만의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새로운 충격을 줘야 한다. 게다가 요새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새롭고 은밀한 모습까지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잊히지 않는다. 이 경우 찍히는 자와 보는 자 사이에는 복잡 미묘한 관계가 맺어진다. 더 보고 싶어지게 할수록 대상이 권력을 갖게 되지만, 대상이 더 보여주지 못하면 관음자가 더 큰 권력을 쥐게 된다. 양측 모두 이 관계 속에서만 권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 관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이런 팽팽한 관계에 대한 욕망에 불을 지핀다. 서로 주체가 되기를 원하며 권력에 민감한 현대에는 이런 관계가 원사이드 러브보다 훨씬 재밌다.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 있기는 요즘엔 무척 어려운 일 같다.
이 소설은 머리 좋은 설정을 통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든다.
이 책의 주인공 사키는 사진집의 모델이다. 건강하거나 아름다운 천부적인 모델이 아니다. 사키의 사진집 ‘데릴라’는 구토 나고 기형적인 사키의 사진을 실은 사진집인데, 사키는 이 작업으로 유명해졌다.
스물네 살 사키는 자신을 찍는 유명한 사진작가 신자키의 노예나 다름없다. 사키는 신자키에게 3년 전 발탁되면서 틴에이저 잡지의 독자모델에서 빠져나와 예술품이 되어가는 중이다. 신자키의 사진집 『데릴라』를 통해 사키는 병적인 특별한 피사체로서 유명해졌다. 남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통해 캐릭터를 얻었고 강점을 가지게 되었다. 사키는 자신을 찍는 신자키와 2년째 연인으로서 동거중 이며 일적인 관리를 받고 있고, 신자키의 커다란 복층 아파트에 얹혀살게 되었고, 2층에 머무는 신자키의 눈길이 내려다보는 1층 거실에서 거주한다.
사키는 냉담하고 이기적인 사진작가 신자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건 일 때문이기도 하고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신자키의 사랑이 식었다며 불안해하는 사키는 신자키와 연인관계가 끝나면 자신의 일도 끝나게 된다는 이상한 망상에 시달린다. 신자키가 그럴 거라고 말을 한 적도 없는데도 끊임없이 걱정한다. 신자키가 찍어주지 않으면 사키가 사키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자키가 찍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반쪽짜리 존재이고, 신자키가 시켜서 거식증을 통해 34kg으로 마르게 되었으며, 특별한 사진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명밴드 보컬인 마쓰키를 알게 되고 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연애를 하게 되면서, 사키는 신자키와 맺는 관계에 대해 더욱더 맹렬히 고찰하게 된다. 신자키와 마쓰키는 모든 면에서 반대다. 신자키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늘 자기 자신에게 도망친다면 마쓰키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얼굴로 대한다. 신자키는 사키에게 웃지 말고 마르라고 담배를 피지 말 것을 요구하는데 마쓰키는 웃으라고 먹으라고 행복해지라고 요구한다. 사키는 신자키의 아파트에서 마쓰키에 대해 생각하고 마쓰키의 룸에서는 신자키에 대해 그리워한다. 자신이 어떤 남자와 살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가 사키의 맹렬한 고민인데, 이 고민은 자신의 모델 일과 연관되면서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사키는 왜 이렇게 신자키에게 집착하면서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쓰키에게 가지 못하는 걸까. 누구에게 꼭 사키는 가야 하는 걸까. 왜 사키는 신자키의 애인자리를 포기하면 일까지 잃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키의 친구는 사키에게 너 정도면 다른 에이전시에서도 충분히 일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도. 그 비밀은 사키가 신자키와 살고 있는 현실까지 다 삼켜버리는 사진집 『데릴라』에 있다.
『데릴라』에서 사키는 인형 같긴 하지만 인형은 아니다. 그 사진집은 사실 감정이 없는 인형 같은 사키를 찍었다기보다 인간됨을 잃어가는 사키의 모습을 찍은 작품집이다.
“신자키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형에는 취미가 없다고 부정했다. 자기가 찍는 것들은 감정이 아예 없으면 표현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문득 그가 찍고 싶은 것은 인간이 인간의 요소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족이나 거세 같은. 그런 행위의 매력을 찾는 거라고. 그가 내게서 그런 모습을 찾는 게 기뻤다. 나는 기꺼이 내 의지로 거식을 했다. 나의 거식은 신자키 씨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달랐다. 내가 거식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신자키 씨 덕분이다. 이게 맞다. 그렇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가치 같은 것을 손으로 만져 확인하듯이, 말라갔다. 마르면 마를수록 기뻤다. 그가 찍고 싶어 하는 건 뼈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인간이 감정과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 그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다.”(99쪽)
사키는 이 사진집을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었고 유명해졌고 파티에서나 모임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새 애인 마쓰키는 예전 잡지의 사키 때부터 사키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역시 사진을 통해 사키를 먼저 접했다.
사키는 사진집을 통해 그저 대상으로서의 ‘모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된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사진집은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여성의 모습을 다루기 때문에, 카메라에 포박된 인간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즉, 사진집 자체가 사진 장르의 관음에 대한 고발이므로, 반역적이고 메시지적이고 그래서 예술적일 수 있다. 이 사진집에 대해 사람들은 신자키의 사진집이라든가 사키의 사진집이라고 하지, 신자키와 사키의 공동의 사진집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키가 있어야 이 사진집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사진작가 신자키가 만들어낸 유일한 사진집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진집은 공동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예술작품 같아서 그렇다.
『데릴라』를 통해 사키는 예술품으로서 예술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 외에도, 자신을 가두는 카메라에 대한 고발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진 속에 있어야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숨통이 트이는 건 아닐까 한다. 좀 풀어주면 억압이 견딜 만해지는 것처럼. 사키는 피사체로서 그저 ‘연기’함에 그치지 않고 삶과 사진을 완전히 일치시키려 함으로써 사진예술의 관음에 반항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예술작업의 일부로서의 정체성을 얻는다. 사키는 현실 속에서 먹고 뱉는 거식행위를 통해 인간다움을 잃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동거하는 신자키가 필요하다. 신자키가 감시하지 않으면 거식을 할 동력도 사라진다. 이렇게 삶과 사진을 일치시키려하는 건 자기만의 특별한 모델로서의 정체성을 얻기 위한 죽음을 건 투쟁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또 다른 더 숨은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사진’이 자신의 삶과 일치한다면 사키는 이전의 ‘현실’ 속에서는 인간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체였다는 증거가 된다.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자신을 찍히는 거라면,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 이전엔 인간다움을 가졌던 것이다. 사키는 인간을 잃어가는 사진집을 통해 아이러니하게 인간이었다는 존재증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사키는 모든 현실에서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녔고, 일도 가진 적 없고, 부모가 물려준 유산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런 힘도 재능도 능력도 가진 게 없었다. 무력한 현실적 자아라는 불안에 몹시 시달렸다. 그런 사키가 이렇게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작업함으로써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환상을, 주체를 선택해서 주체임을 버려간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정말 빠져나올 수 없게 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신자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데도 사키는 스스로 굴복하는 자로서 정체성을 얻고 그것과 가까워지려고 늘 애쓰고 그렇게 기꺼이 한다.
사키가 자신이 주체란 게 있는 사람인지 불안해할 때 신자키의 카메라는 주체의 불안을 거둘 묘약인 정체성을 던져준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예전부터 뭔가 정체성의 씨앗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키는 믿게 된다. 이 과정 전체가 자기 선택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다 알고 있는 카메라야말로, 신자키 씨야말로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무엇이라고 믿는다. 신자키는 신이다. 정체성을 부여해주고 정체성을 발견해주고 스스로 정체성을 가졌다고 믿게 하고 그리고 구역질 나는 모습까지 받아들이는.
사진이 현실이 되는 시뮬라크르는 곧 정체성을 얻는 자기 확장의 환상으로 이어지고 애초부터 자기 자신은 ‘존재’했다고 믿게 되는 시점으로 돌아와 처음을 바꾼다. 원처럼 물려있어서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를 다 바꿔버린다. 하지만 사키는 왜 그럼에도 늘 불안할까. 고통스러울까. 죽고 싶은 걸까.
“어떻게 남에게, 그렇게 과잉된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생판 남이 이마가 찢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중략) 마쓰키씨는 분명 자기보다 남이 상처받는 걸 더 두려워할 것이다. 마쓰키씨는 미담을 낳기 쉬운 그런 사람이다. 남보다 자기가 상처받는 게 더 두려워서 필사적으로 여기저기 포석을 깔고 살아가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이다. 상처받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나는 그 생각만 하며 살아왔다.”
“왜 남을 다치게 하고 자기가 상처받는 걸까.”(128쪽)
사키의 거식은 주체가 있었다는 환상을 역설적으로 증거해주지만, 솔직히 현실의 몸에 대한 거부로 읽힌다. 오직 완전하고 강자이기만을 원하는 나약한 사키는, 현실 속에서 여성 몸으로서의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현실 속의 무력한 젊음과 가난과 정체성과 젠더의 불안 속에서 부유하는 사키는 사진 속에 머물러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런데 관음하는 신자키 역시 이 관계 속에 있어야 비로소 권력자가 된다. 그는 또 다른 더 강력한 여배우들이 있어야 사진 시장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서로에게 물려있는 욕망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들이다.
사키는 이 과정의 격렬한 불안과 흔들림 때문에 소외된 진짜 주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사키의 불안에 찬 투쟁이 이 소설을 소설로 만든다.
그런데도 신자키는 단지 시선으로 존재할 뿐이며, 사키에게 자꾸 자립을 강요한다. 기꺼이 하도록. 네가 선택해서 한 것이도록. 주체가 아니라고 외치는 동안 주체가 되는 이상한 희열이 SNS에서, 사키의 사진 속에서 사키로서 존재한다. 억압하지 않는 지배처럼 강력한 지배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봐줄 뿐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미담 같은 건 지루해한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걱정과 불안과 우리의 모든 것, 은밀한 뼈까지 씹어도 만족을 모른다. 거울에 비친 타인과 같은 눈을 하이드라 물뱀의 눈으로 사키가 노려본다. 삼중으로 분열된 눈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카메라가 비춰주는 순간 우리가 변하고 만들어지니 진정 새로운 신은 카메라일 지도. 보호하고 증명하고 관찰하고 심판하는 CCTV들. 피할 수 없다면 시선을 즐겨야 하는 건가. 기꺼이 뭐든 눈길을 끌 만한 걸 하라고 종용하고, 정체성을 부여하고, 가치와 전능함을 내려주는 시선 속에서 벗어날 묘수도, 힘도, 이유도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