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은 그것을 쓴 작가의 생애와 너무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를 혼동에 빠뜨리기도 한다. 문학이라는 장르가 타인의 삶과 다른 세계에 대한 매혹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신술과 영매술은 뛰어난 작가의 자질에 속하고 최소한 진짜 같은 거짓말이라도 능숙해야 한다. 그것이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텔레마코스라고 소개하는 호메로스의 미덕이자, 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있을 법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는 너무나 명백하게 자신에 대한 것 외에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실패한 작가들이 존재한다. 자아의 그림자가 모든 작품들에 드리워져 있고, 그 그림자들로 인해서 모든 이야기가 서로를 닮은듯하면서도 서로에게 낯선, 그런 작품들의 작가들 말이다.
이 후자의 계열에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가 속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망 직전까지 맹렬하게 글쓰기에 집착했지만 그렇다고 자아의 그림자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니다.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뒤라스는 자아의 동굴에 갇혀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작가들과 달랐다. 알지 못하는 자는 주저앉기 마련이고 만족하기 마련이다. 반면 아는 자는 괴로워하고 몸부림친다. 뒤라스는 자신의 문학이 어떤 행동과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 맴돌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라스를 오늘날 문학장에서 찬탄의 대상으로 올려놓은 것은 자신의 삶을 장악해버린 짙은 어둠과 작품에 드리운 그림자를 향해서 그녀가 주저 없이 질주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개인적 체험이 너무나 강렬해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작가였던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고, 20세기 중·후반의 많은 작가들처럼 뒤라스 역시 그러한 얼굴들을 보았다. 하지만 상당수 작가들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전쟁의 폭력을 작품 속에서 내파하고자 애쓸 때, 그녀는 그것을 이해 불가능한 히드라의 얼굴이자 도피 불가능한 메두사의 얼굴로 맞이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에서 태어났지만 백인 제국주의자의 삶과는 멀었던 하층민의 유년 시절,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식민지 땅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 집착,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이어진 나치의 프랑스 점령과 레지스탕스 활동, 남편의 체포와 독일 수용소 수감, 해방과 귀환, 이혼과 출산, 68혁명과 알제리 전쟁, 이어지는 또 다른 세계의 비참들…. 이처럼 뒤라스의 생애는 지구적인 근현대사를 관통했으며, 매 순간 선택과 판단을 요구받는 역사의 불가항력적 힘들에 휩쓸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이러한 거대사의 흐름에 쉽게 편승하기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판단유보를 선택했고, 말하기의 불가능성 속에서 침묵을 구하고자 했으며, 인간 내면에 잠들어 있는 근원적인 광기를, 사회와의 불화로 분열과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죽음에 이르는 욕망’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소설 『고통』La Douleur, 1985과 『고독한 글쓰기』Écrire, 1993는 이러한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소설에 대한 해설적 소설, 혹은 작품에 대한 주석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들은 뒤라스를 대표하는 작품들도 아니고 비평가나 관객으로부터 주목받는 작품들도 아니다. 미학적 완결성을 고려해보더라도 두 작품은 뒤라스의 주요 작품들이 품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언어의 압축과 절제, 시적인 대화 혹은 침묵, 와해된 시간, 섬세한 감각적 묘사 같은 것들을 아직 갖추지 못했거나 갖추기를 포기한 듯한 인상을 준다. 아마도 이러한 형식적 미완결은 『고통』이 소설가로 데뷔한 젊은 시절에 개인적인 기록을 위해 작성된 것이고, 『고독한 글쓰기』는 80세를 바라보는 노작가의 어떤 자유로움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작품을 함께 놓고 읽으면 뒤라스라는 작가의 문학세계가 반복강박처럼 되돌아오는 어떤 지점을, 노출되고 싶지 않지만 몽유병 환자처럼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그런 글쓰기의 기원적 사건들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시대를 살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었는지 설명할 방법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132쪽)─ 「이 글에서 피에르 라비에라는 가명으로 불리는 X씨」, 『고통』유효숙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단편모음집 형태의 『고통』La Douleur은 일기 형식을 차용한 자전적 소설들이다. 작품의 출간일은 1985년이지만, 뒤라스의 설명에 따르면 194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쓰인 것들로, 독일 나치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뒤라스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들을 담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뒤라스의 첫 번째 남편 로베르 앙텔므는 그녀와 함께 출판사를 운영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중 게슈타포에서 잡혔으며, 부헨발트 수용소를 거쳐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그녀에게 애국과 저항이라는 전쟁에 대한 자명한 대의가 아니라 기다림과 절망이라는 전쟁의 또 다른 얼굴들을 마주하게 만들었으며「고통」, 한 개인의 삶이 전쟁 속에서 어떤 형태로 자기기만에 빠지고「이 글에서 피에르 라비에라는 가명으로 불리는 X씨」, 도취되고「친독 민병대원 테르」, 서로를 몰락시키게 되는지「카피탈 카페의 알베르」를 깨닫게 해주었다.
“드골은 더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평화 이외에는. 아직 기다리는 건 우리뿐이다. 항상 존재하던 기다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세상 여인들의 기다림이란 전쟁에서 돌아오는 남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시체 안치소에서 죽은 자들이 쌓이는 세상의 한쪽 편에는 우리가 있다.”(72쪽)─ 「고통」, 『고통』
전쟁은 정치인들이나 전선에 투입된 군인들, 저항단체들, 수용소 수감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상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남겨진 사람들 또한 각자의 전쟁을 치른다. 남편이나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여인들의 전쟁이 그 가운데 있다. 여인들의 전쟁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전쟁, 누구도 명령한 바 없이 수행하는 전쟁, 영광 없는 전쟁, 아무도 모르게 혼자 싸워야 하는 전쟁이다. 또한 여인들의 전쟁은 전쟁터의 시간과 다른 운행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중단 없는 전쟁, 고독한 전쟁이다. 이 전쟁의 시간은 사랑하는 이가 떠난 순간 시작되었다가 어떤 때에는 중단되지 못하고 영원히 그 자리를 맴돈다. 해방이 선언되고 평화가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기다리는 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전쟁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기다리는 이가 돌아오더라도 전쟁의 시간이 멈추지 않을 때가 있다. 뒤라스가 치러야 했던 전쟁의 시간이 그랬다.
전쟁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튕겨져 나와 불안과 혼돈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녹아들었을 때, 뒤라스는 기다림이라는 용광로로 떠밀려갔다.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인간 어휘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부당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뒤라스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기다림’이라고 썼다. 그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 희망 없는 기다림, 체념 섞인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 로베르가 돌아왔다. 죽음에 저항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행진하는 삶만이 허용되었던 곳에서1) 끝내 그는 돌아왔지만, 그러나 그녀가 기다리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늪지대에서 생환한 사람, 인간성의 저 밑바닥에서 다른 것을 보고야 말았던 사람, 과거의 어떤 추억도 어떤 애정도 더는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 로베르라 불리지만 그녀가 알던 로베르는 아닌, 다른 사람이 돌아온 것이다. 그녀의 기다림은 그렇게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슬픔으로 끝을 맺었다. 이 전쟁은 그녀의 패배였던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상실감 이후 뒤라스는 전쟁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 두기는, 사후적이긴 하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도피하게 해준 것이 아니라 전쟁의 더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어쨌든 이 거리 두기의 시기 동안 뒤라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현 베트남에서 태어나서 17세까지 살았던 그녀의 유년 시절 경험들을 소환했으며, 그녀를 대표하는 작품들, 즉 『태평양의 방파제』1950, 『부영사』1965, 『인디아 송』1975, 『연인』1984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주의 역시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었고, 서구 대 비서구, 문명 대 야만이라는 서구 유럽인 전체가 연루된 문명화 사명의 전쟁이었다. 뒤라스는 자신이 속했던 곳의 매혹과 현실의 절망 사이에서, 욕망과 윤리 사이에서, 밀림과 정치 사이에서 오랜 시간 방황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감싸고 있는 이 무수한 전쟁들의 한복판에서 그것의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뛰어들었다.
뒤라스의 말년인 1993년에 발표된 『고독한 글쓰기』Écrire는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이러한 고민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서전적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한동안 거리를 두었던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돌아와 그것이 자신의 글쓰기에 남긴 흔적들을 추적한다.
“나는 모든 것에 관계하고, 모든 것에 가담하는 그런 행운 때문에 글을 쓴다. 그것은 전쟁터에 연루된, 전쟁으로 텅 빈 극장에 있는, 폭넓고 깊은 사고가 아주 느리게 싸움터에 이르는, 스무 살의 젊은이가 죽어가면서 꾸는 악몽의 확장 속에 있는, 끝없이 펼쳐진 노르망디 숲의 나무들과 함께 스무 살의 나이로 죽은 젊은 영국인의 시체 속에 있는 그런 행운이다.”(95쪽)─ 「젊은 비행사의 죽음」, 『고독한 글쓰기』이용주 옮김, 창작시대사, 1997
‘세상의 소리 없는 붕괴’는 전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해방과 함께 시작된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자신들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박탈되었으며 무너졌는지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뒤라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 선언되던 날 출격해 프랑스 보빌Vauville 지역에 추락해 사망한 스무 살의 영국인 비행사에 대한 이야기「젊은 비행사의 죽음」를 통해서 자신의 삶 저편에서 일어난 하나의 죽음이 자신에게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죽음을 떠올린다. 다른 시체들과 뒤엉켜 구덩이 속에 던져진 죽음, 헌화도, 애도도, 무덤도 가지지 못한 죽음, 중일전쟁 중에 죽은 작은 오빠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 죽음들의 공통점은 삶에서 누린 행운이 너무나 적다는 점과 이들의 죽음이 대해서 슬퍼하고 기억할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점이다. 또한 오직 혼자만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 후로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내 아이와 작은 오빠가 있었고, 영국인 청년이 있었다. 그들은 닮은 데가 있다.”「젊은 비행사의 죽음」, 73쪽
‘세상의 소리 없는 붕괴’가 시작된 이후, 뒤라스는 희망을 포기했다. 희망이 미래적인 사건이고 자신의 의지 너머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신’ 또한 버림받아 마땅하다. 한때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신에게 매달렸고, 신과 같은 무언가를 붙잡으려고”「고통」, 52쪽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응답은 이뤄지지 않았고 모든 것은 의심스러웠다. “신은 매일 대체되고, 우리는 신 없이 존재한다.”「젊은 비행사의 죽음」, 89쪽 뒤라스는 신과의 결별을 선언했고, 자신에게서 신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신에게 바쳐진 아이’donner à Dieu, 도나디유Donnadieu라는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게 뒤라스Duras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쳐야 할 곳donner à qc., 도착해야 할 그곳aller à qc.에 술과 글쓰기를 채워 넣었다.
“신은 사라졌다. 당신이 청소년기의 어느 날 발견하게 될 이 공허로부터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술은 이 우주의 공허를, 행성들의 규칙적인 운동을, 우주 공간에서의 그것들의 침착한 순환을, 당신의 고통이 자리한 곳에 대한 그것들의 무관심한 침묵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해준다.”2)
그랬다. 뒤라스는 술을 마셨다. 술은 그녀가 집착한 유일한 ‘물질적 삶’la vie matérialle이었다. 73세였던 1987년에는 간경화 말기로 정신을 잃기도 했고, 74세 때는 5개월간 심각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해서 술을 끊으려고, 아니, 술 끊기를 시도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은 그러지 못했다. 또한 뒤라스는 글을 썼다. 소설이거나 일기이거나, 연극대본이나 영화대본일 수도 있었고, 정치적인 글들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술이 타협을 거부한 그녀의 ‘물질적 삶’이었다면, 글쓰기는 존재증명을 위한 그녀의 ‘실존적 삶’이었다. 공산당에서 강제로 제명당하긴 했지만,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확신했던 그녀에게 술과 글쓰기는 물질과 정신의 연금술적 융합, 객관과 주관의 변증법적 상호작용 같은 것이었다.
“알코올중독자였으니 저는 술을 마셨어요. 진짜 알코올중독자요. 작가처럼요. 저는 진짜 작가에요. 그리고 진짜 알코올중독자이지요. 잠에 들기 위해 레드 와인을 마셨고, 한밤중에는 코냑을 마셨어요. 한 시간에 한 잔씩 와인을 마셨고, 아침에 커피를 마신 후에는 코냑을 마셨어요.”3)
작가와 알코올중독의 관계는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고 문학계에서는 진부한 스캔들에 속한다. 그러나 뒤라스의 이름을 ‘가볍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알코올중독자의 대열에 세우는 것은 경솔하고 불경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녀에게 술은 유희에 속한 것이 아니라 경배에 속했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습관적으로 술을 마실 때, 그녀는 전투를 하듯이 술을 대했고『모데라토 칸타빌레』, 많은 작가들이 현실 도피로 술을 찾을 때, 그녀는 현실을 위반하고자 술을 소환했다.『지브롤터의 선원』 사교나 친목에 어울리는 ‘적당함’ 따위, 혹은 남성작가들에게서 흔히 목격되는 성욕과 술의 근친 관계 따위는 그녀에게 모욕이었다.
물론 20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술은 ‘여자’라는 단어와 환유적 관계가 아니었고, 나란히 놓일 경우 타락이나 방종, 추락을 의미했다. 그래서 뒤라스는 “여자가 술을 마시면, 마치 동물이나 어린아이가 술을 마시는 것처럼”4) 사람들이 쑥덕거린다고, 자신의 행동들이 자기 주변에서 추문으로 떠돌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추문들은 술에 대한 그녀의 애착에 어떤 손상도 가하지 못했는데, 이는 술이 책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만의 고독한 의식儀式, 후에 그녀가 ‘숙취술’la soûlographie, 熟醉術이라고 칭하게 된 글쓰기 방법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야행성 짐승들의 울음소리, 모든 이들의 울음소리, 당신과 나의 울음소리, 개의 울음소리이다. 그것은 사회의 집단적이고 절망적인 저속성이다.”(27쪽)─ 「고독한 글쓰기」, 『고독한 글쓰기』
뒤라스의 글쓰기는 웅얼거리고, 울부짖고, 뒤틀리고, 휘청거리지만 침묵 주변을 배회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말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도 없는 책, 어떤 이념도 없는 책, 엄청난 공허, 불확실한 책”「고독한 글쓰기」, 21쪽을 향해 가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으니, 그것은 도착지 없는 글쓰기, 길을 잃기 위한 글쓰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 타락에는 광기의 냄새가 배어있고, 뒤라스는 위스키와 더불어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리하여 자신도 알 수 없는 미결정 상태에 글쓰기를 맡김으로써, 글쓰기가 자신을 배반하고 스스로 방황하게 만듦으로써, 그녀는 집단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개인들을, 국적으로, 지위로, 소속으로, 역할로 편입되지 않는 인간들을, 집단 매장된 시체구덩이에서 작은 오빠를 구출하듯이, 구해내고자 했다. 역사의 두께와 사회적 규율로 짓눌려 있는 미개 상태의 욕망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뒤라스의 작품들에는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작가였다. 또한 글쓰기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이중의 구속 속에서 뒤라스는 “절망을 무릅쓰고, 아니, 절망을 느끼면서 썼다.”「고독한 글쓰기」, 33쪽 “지금까지 써온 것처럼 쓰지 않기 위해 썼다.” 「고독한 글쓰기」, 12쪽 광폭한 세계의 이 비참 속에서 뒤라스의 책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남겨졌다.(*)
1) 로베르 앙텔므, 『인류』, 고재정 옮김, 그린비, 2015, 60쪽.2) Marguerite Duras, La vie matérielle, Paris: P.O.L, 1987, p.22.3) 마그르리트 뒤라스의 『The New York Times Magazine』 인터뷰 1991년. https://www.nytimes.com/1991/10/20/magazine/the-life-and-loves-of-marguerite-duras.html4) https://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a-man-and-a-woman-say-what-you-like-theyre-different-on-marguerite-dur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