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가 방패이고 소독제가 경찰인 방역 위생 시대,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위안과 안심을 얻을까? 『보건교사 안은영』의 작가적 상상력과 서사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듯하다. ‘본격 학원 명랑 미스터리 소설’ 장르로 스스로 분류하고 있는 이 작품은 사스 대유행 시기인 2000년대 초에 구상되어 메르스 대유행 시기인 2015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코로나19 시기인 2020년까지 무려 24쇄를 찍어내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경미 감독의 시리즈물 드라마로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표지 디자인을 바꾼 25쇄가 나오기까지 ‘보건’ ‘교사’ ‘안은영-아는 형’은 바이러스와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끌며 소비되었다. (마치 티브이 오락물 「아는 형님」의 이수근과 서장훈이 또 다른 오락 프로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흥미와 위안과 비난을 함께 사듯이 대중적으로 말이다.)
이 작품은 학원물이며 명랑소설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위험한 에너지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오래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험요소로부터 안전하게 막아내는 역할을 수행해나가는 (여성 영웅까지는 아니고) 여성 안전 지킴이 서사다.
이 작품은 여성 영웅담이 아니다. 작가는 이 세상에 영웅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안은영의 처지는 남을 도와주지 않으면 생존 불가능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 그녀는 전근대의 치유사 무당과 같은 운명을 등에 짊어진 사람이다. 그것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선한 에너지, 혹은 원래부터 타고난 에너지는 있지만 스스로는 발휘할 수 없는 한문선생의 에너지로부터 충전 받아야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반쪽짜리 해결사에 불과하다.
작가는 왜 안은영의 능력에 한계를 두고 타인의 에너지에 기대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었을까? 작가의 다른 작품에 기대어 읽어내자면,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며 과거에 기대지 않은 현재가 있을 수 없듯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누군가의 과거를 이어가는 현재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한, 근대적 의미의 ‘개인’은 존재할 수 없으며 타자에 기대지 않은 주체는 불가능하다. 50명의 개인들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피프티 피플』창비, 2016이나 자기 존재의 기원을 할머니로부터 찾아내는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 2020의 가족 다양체 또한 이러한 작가적 세계관의 소산인 듯하다.
우리나라 방역의 역사는 소설 속 M고등학교 기원처럼 1894년 ‘위생국’에서 시작된다. 근대의 출발과 함께 전염병 예방과 종두·소독·검역·묘지 등의 위생 사무를 관장하게 한 근대적 보건행정기관 위생국, 그리고 근대의 소산 M 고등학교.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소설 내용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고등학교 터의 기원이 18세기의 기록물에 언급되어 있고, 질병과 바이러스가 상존하여 번져나가는 터를 흙으로 막고 엄청난 바위로 압지한 위에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 근대 위생의 불안정한 터 위에 국가가 세워졌다는 함의로 읽을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를 확대한다면 국가가 될 것이고, 보건교사를 확대해석한다면 질병관리청장 정도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티브이를 통해 질병관리청장의 초췌한 얼굴과 친절한 설명을 듣고 따르며 안심한다. 하얀 가운이 이 시대의 안심과 감사의 상징이듯 보건교사 안은영은 여성 영웅의 상징 원더우먼처럼 타이트한 복장이 아니라 슬리퍼에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든 어설픈 모습으로 위험으로부터 학생들을 안심시키고 안정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주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지구가 내 손안에 펼쳐지는 초과학시대에 기껏 마스크와 소독제가 최대의 무기이듯 안은영은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위험하고 더러운 것들을 베어내고 처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다 보면 현실이 한 편의 코미디와 다름없다. 아니면 정교하지 못한 SF 서사와도 같다. 이 지점이 보건교사 안은영의 위치이며 그런 까닭으로 특히 2030 청년 세대가 집중적으로 안심하고 소비하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찌 되었든 정세랑 작가의 작품은 대중에게 엄청나게 많이 소비된다. 카카오톡 ‘선물하기’ 중 도서 코너에 정세랑 작가의 작품이 무려 네 종류나 게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나는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왜 자꾸 ‘소비’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까? 옛날 사람인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개념과 지금의 소설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어서일까?
“타락한 시대,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뤼시엥 골드만Lucien Goldmann은 정의 내렸지만 골드만도 옛날 사람이다. 근대와 소설을 연관 지었을 때 이런 정의가 나오는 것이고 지금은 골드만 시대에서 한 세기나 지난 소비시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대소설의 종말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사람임을 인정하고 내 정서에 이 작품이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하고픈 심정과 정세랑 작가 현상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사이에서 나는 방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