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평은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목소리입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글쓰기 강의시간(지도강사 : 차익종)에 쓴 시평을 <나비>에 게재합니다. 최근 청년들의 책읽기나 비판적 사고가 종말을 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데, 이 시평들을 통해 아직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살피는 청년들의 참신한 시선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주)
11월 29일. 동성애 차별 금지 내용을 포함한 서울시 인권헌장이 기독교계 등 반동성애 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상한 일이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예능에서는 게이 방송인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소재로 농담을 던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성애 인권에 대한 질적 발전이 더딘 것은 오로지 극렬한 반대자들만의 탓일까? 아니다. 그런류의 집단은 동성애자 인권이 잘 보호되고 있는 다른 나라에도 존재한다. 결국 문제를 결정짓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만 동성애를 존중한다고 말할 뿐 여전히 가벼운 이해와 얕은 관용에 머물고 있다. 이들이 점잖게 한발 물러서고 나면 결국 힘 있는 반대자들과 소수의 동성애 지지자들만의 싸움이 된다. 결과는 뻔하다. 동성애 문제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점잔빼며 뒤로 물러난 다수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는 이성애자다. 그리고 동성애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이 동성애자가 되도록 부추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그들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할까? 물론,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가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갖는 데 기여한 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는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에는 우리의 책임이 있다.
현재와는 달리 동성애가 항상 차별받아온 것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고대 ‘아시리아’라는 곳에서는 동성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로 여겨졌으며 아시리아의 종교 경전에는 동성애 관계를 축복하는 내용까지 나와 있다. 이는 동양에서도 나타나는데 고대 중국의 여러 고서를 살펴보면 한韓나라의 모든 황제가 남첩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최근 2001년까지 중국에서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렇듯 동일한 지역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동성애자들은 로맨티스트가 되기도 하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538년 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였다. 동성애는 자위행위나 피임처럼 지나친 탐욕행위로 간주되어 죄악시되었다.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종족 보존’이라는 신이 허락한 성교의 본래 목적을 벗어났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시대에 기독교 문화가 유입되면서 동성애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렇듯 동성애는 자체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 평가된 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차별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동성 혐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성애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과거부터 시작된 종교와 문화적 영향이 현재까지 지속된 결과이다. 더불어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조하거나 묵인해왔기 때문에 동성애 혐오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성애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이라도 동성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한껏 기울어진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과감히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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