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평은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목소리입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글쓰기 강의시간(지도강사 : 차익종)에 쓴 시평을 <나비>에 게재합니다. 최근 청년들의 책읽기나 비판적 사고가 종말을 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데, 이 시평들을 통해 아직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살피는 청년들의 참신한 시선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책은 마음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쌓고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독서를 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종종 나오는 대답들이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우리는 어떻게 책을 읽게 될까? 책을 처음 접하게 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항상 뭐든지 궁금하다. 그런데 책 속에서는 내가 만나지 못한 세상이 숨 쉬고 있다.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의 답이 숨어 있고,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해주기도 한다.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나의 책을 찾아서, 스스로 선택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 즐겁다. 우리는 그렇게 책을 읽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독서 방법이 아이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학교에서 아이들은 선생님이 정해준 권장도서를 읽는다. 자기 관심사가 공룡이든 별이든 상관없다. 집중력이 높은 아이든, 낮은 아이든, 글을 빨리 읽는 아이든, 느리게 읽는 아이든 같은 책을 읽는다. 표지만 봐도 읽기가 싫다. 자율성이 배제되니, 독서는 강제가 되고, 독서 시간은 고통이 된다. 그러니 집중도 안 되고, 옆 친구와 떠들거나 잠을 자는 게 속 편하다. 게다가 그 책을 읽고 A4 한 장을 꽉 채운 독후감을 쓰란다. 그리고 그걸 평가를 하겠다고 한다. 한숨만 나온다. 즐겁지 않다.
왜 학교 독서 교육 시간에 ‘해리 포터’, ‘셜록 홈즈’를 읽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모두가 같은 책을 읽어야 하는가? 게다가 왜 꼭 독후감을 써야 하는가? 또 그걸 평가한다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지금 학교 독서 교육은 입시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학업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쌓기 위해서, 생각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필요한 책만 읽으라고 한다. 대중 소설은 저급하니 읽힐 수 없다. 평가를 해야 하니 모두 같은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러니 참여율도 떨어지고, 아이들을 책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 이런 독서교육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독서교육을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방법론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학창시절 막 공부를 시작하려는 찰나,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 부모님이 ‘얘, 공부 좀 해라!’라는 한마디에 공부하기 싫어진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권위에 의해 강제하면 반발심이 생긴다. 그것은 자율성이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서교육의 목적인 지적 호기심 또한 자율성에서 생긴다. 우리는 재미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서 호기심이 생기고, 그것을 더 알아보고 싶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다 보면 자연히 다른 책에도 관심이 간다. 얇은 책에서 두꺼운 책으로, 대중 소설에서 고전 소설로. 인간의 호기심은 한계가 없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가장 싼 값으로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책이다.’라고 했다. 지금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그것이 즐겁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체육시간이었다. 우리 맘대로 축구, 농구,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고, 선생님이 점수를 매기지도 않았다. 학교 독서 교육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즐거운 교육.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우리 아이들의, 인간의 즐거운 호기심을 믿어보는 것이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