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내가 참 좋습니다
/ 김경집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부스스한 몰골이 마치 내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한 듯하여 안쓰럽기도 합니다. 차가운 물에 세수하며 몸을 깨우고 새로운 하루를 준비합니다. 아침 단장을 하는 건 그저 남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새로운 모습으로 준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나는 이미 과거의 시간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꾸역꾸역 반복되는 일상에 살다보니 그제가 어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습니다. 그저 그런 날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현재와 미래 또한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문을 열고 일상으로 나아가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늘 그렇듯 평범한 하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침에 허둥지둥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다 시멘트를 뚫고 노란 민들레가 노란 꽃을 내민 것을 보았습니다. 꽃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거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 오랫동안 거기에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눈길 준 적 없으니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꽃이 피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도 아니고 정원사의 세심한 손길을 받은 장미나 튤립도 아닙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그저 그런 풀포기쯤으로만 여겼을 뿐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전날에도 그 ‘풀’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필 그 바쁜 아침 출근길에 노란 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도 시멘트 바닥을 뚫고 말입니다.
문득 나의 어제도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제와 같은 어제고 여러 날 중의 뻔하디 뻔한 하루라 여겼는데 어쩌면 발뒤꿈치가 조금이라도 오른 하루였을지 모릅니다. 콩나물시루가 생각납니다. 대개의 식물들은 세 가지의 요소가 필요합니다. 빛, 물, 그리고 땅의 양분입니다. 그런데 시루의 콩나물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아예 빛을 받을 수 없고 디디고 뻗을 흙은 아예 없이 그저 뻥 뚫린 밑바닥이니 허공에 떠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아침저녁 한 반가지 부어주는 물이 전부입니다. 그나마도 잠시라도 고여 있지 못하고 바닥의 구멍으로 다 빠져나갑니다. 콩나물의 입장에서는 참 야속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천을 걷어내면 놀랍게도 콩나물 대가리들이 시루의 머리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잠깐 스쳐 지나는 물 잠깐 만나면서도 콩나물들은 묵묵히 조금씩 성장했던 겁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 분명합니다. 어김없이 어제와 같은 방향에서 떠오른 태양도 사실은 같은 자리가 아니라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떠오르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자리가 옮겨졌다 걸 실감합니다. 그렇게 한 달 후 30분쯤 일찍 혹은 늦게 해가 떠오르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라는 지구과학의 메커니즘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춘하추동 해돋이와 해넘이의 시간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걸 닷새 열흘 사이에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제와 같은 오늘처럼 느껴집니다.
식물에서 그걸 배울 때가 많습니다. 지상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땅속에서 씨앗이 껍질을 뚫고 생명을 키워내는 시간도 간단하거나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 자체가 지난하기도 합니다. 사막의 어떤 식물은 수십 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는 씨앗을 뱉어내기도 합니다. 죽은 씨앗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루 사막에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그 씨앗은 마침내 제 생명을 피워냅니다.
남미 칠레 북서부의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0~2.1㎜에 불과하니 미생물조차 살아가기 힘든 곳입니다.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 곳도 허다하다 합니다. ‘죽은 땅’이지요. 그런데 거기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마치 외계 행성 같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 사막에 거센 소나기가 퍼붓는 때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순식간에 일대가 꽃밭으로 변한다지요.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그 곳을 찾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그 ‘죽은 땅’에 무엇이 있었기에 한 차례의 거센 비에 땅 밖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을까요? 땅속에 묻혀 휴면 상태에 있던 씨앗과 구근이 집중 호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잠에서 깨어났던 것입니다. 사막에서 비를 기대하는 건 무모하고 감당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비 오는 날이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어떤 해는 아예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습니다. 죽은 듯이 버틸 뿐입니다. 그 씨앗들과 구근들은 얼마나 지루하고 짜증날까요. 마치 미라처럼 땅속에서 1㎜도 뻗지 못한 채 정지한 상태입니다.
그 사막에서 살아있는 식물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땅속에 웅크리고 있는 씨앗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타카마 사막에 묻힌 씨앗은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버티고 있던 씨앗은 갑자기 쏟아진 비에 모든 힘을 다해 땅 밖으로 몸을 내밀고 순식간에 일대를 거대한 꽃밭으로 만듭니다.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건 그 꽃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 강인한 생명의 신비를 보기 위해서일 겁니다. 보잘것없는 씨앗 하나가 어찌 3년을, 심지어 10년을 그리도 ‘무턱대고’ 기다리고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비가 내리면 자신을 피워낼 수 있을 거라는 강인한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도 살면서 오랫동안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남들이 보면 한심해 보이겠지요. 때론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도 합니다. 남들은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니 패배감과 자괴감을 씻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내면을 강화하는 시간이 되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아타카마 사막의 씨앗과 구근처럼 땅속에서 버텨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높은 곳까지 계단을 오를 때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똑같은 계단만 반복해서 걷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하나 오르는 거지요. 노력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결과는 없고 하는 일마다 성과는커녕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면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스스로를 원망합니다. 삶은 반복적이고 비창조적이며 지겹습니다. 불안과 절망이 힘들어 체념으로 타협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타카마 사막의 모래 밖으로 나온 그 씨앗과 구근은 여러 해 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속으로는 야무지게 버티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싹이라도 틔우고 싶은 본능을 꾹 누른 채 말입니다. 얼핏 모든 성장을 멈춘 듯 보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몇 밀리미터씩 자라나겠다는 힘을 비축하고 버텼을 겁니다. 마치 우리의 하루하루처럼 말입니다. 시멘트를 뚫고 나온 민들레도 그걸 뚫고 나올 때 얼마나 지난했을까요? 어쩌면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땅속에서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그걸 비집고 나오더니 마침내 노란 꽃을 피웠습니다. 장미를 부러워할까요? 세상 어느 화려한 꽃도 부럽지 않을 겁니다. 자신은 민들레고, 제 꽃을 피웠으니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루들도 그런 날들입니다. 먼저 달려나간 사람, 더 높은 곳 오른 사람, 더 두툼한 지갑 챙긴 사람, 엄청난 명예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나의 삶도 아니고 그들과 비교해서 내 삶의 가치를 매길 것도 아닙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하루입니다. 그런 하루를 살아가는 내가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그러니 나는 나를 격려합니다. 나도 곧 시멘트를 뚫고 지상으로 나갈 날을 누리게 될 겁니다. 그런 내가 참 좋습니다. 나는 장미가 부럽지 않습니다.
햇살 한 컵
나를 사랑할 수 없으면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위대한 일의 원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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