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는 수평사회에서 가능하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말 생소하지 않다. 오래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가 기술의 발달에 경제가 얼마나 잘 적응해나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했던 개념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가져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창조적 혁신을 주장했으며, 특히 경제발전 과정에서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행위를 강조했다. 최근 ‘창조’ 운운하는 말이 유행하면서 자주 들먹였던 개념이다.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행위 운운하니까 그게 기업가 혹은 경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의 ‘경제발전론’에서 이윤이 기업가의 혁신에서 발생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맞는 말이다. 이윤은 혁신적인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행위로 인한 생산요소의 새로운 결합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윤이라는 건 바로 그 창조적 파괴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기업가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조금 더 넓게 이해하면 기술혁신으로 낡은 것을 파괴하고 도태시키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혁을 일으키는 창조적 파괴 과정이 기업경제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이고 흥미로운 건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전파한 슘페터는 마르크스 이론을 깊이 연구한 학자라는 점이다. 1942년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서 처음 사용할 때는 창조적 파괴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의 축적과 소멸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그러다가 이를 경제혁신과 경기변동주기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했다. 슘페터와 ‘창조적 파괴’가 어떻게 마르크스와 연계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본디 그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사람은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라는 독일의 마르크스 이론가며 사회학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엥겔스는 좀바르트야말로 마르크스 이론을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에 부합하는 환경 내에서 경제질서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재편하며 여러 위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기존의 부를 평가절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존의 부, 즉 경제적 기득권을 스스로 파기하고 쇄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슘페터는 그것을 기술혁신을 통해 기존의 낡은 것들, 즉 기술과 제품 그리고 관행 등을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시장질서가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을 경기변동으로 서술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개념을 단지 과거의 생산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혁신으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기존의 것을 버린다는 것은 어렵다. 미래가치를 만들어내는 기업들이 주로 자기창업의 회사들이라는 건 그 방증이다. 그들로서는 매달려야 할 과거의 부와 기술이 별로 없다. 버릴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 그러나 일단 그들도 어느 정도의 부화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거기에 매달린다. 그렇게 되면 결국 수직적 조직으로 굳어지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창조적 파괴는 그 수직성을 스스로 무너뜨릴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 수직성의 정점에 있는 기업가들이나 관료들이 창조적 파괴를 요구하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혁신이 아니라 고용을 줄이는 방식이나 노동시간의 연장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즉 창조는 없고 파괴의 방식으로 흐를 뿐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