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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술
새벽 세 시, 개운하게 눈이 떠졌다. 종을 들어 올리듯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의 무게감도 사라졌다. 잘되어간다는 몸의 신호였다. 봉희는 누운 채로 오목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었다. 음식을 끊은 지 일주일째였다. 짧아진 수면 시간이 그 증거다. 어젯밤 운남의 소란을 겪고 늦게 잠들었는데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번쩍 떠진 건 당연했다. 단식 일주일째는 되어야 알게 되는 기분이 있다. 어떤 흐름의 끝에 안착했을 때의 평안함. 새끼손톱만 한 구멍에 물음표 모양의 쇠고리가 탁, 하고 걸린다. 아무리 바깥에서 요란하게 흔들어도 풀리지 않는, 당기면 당길수록 견고해지는 그런 상태. 모든 게 잘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봉희는 손바닥을 빠르게 움직여 배를 난타했다. 몸은 단식 초반의 사나운 저항을 지나 온순해졌다. 이럴 때는 더 못살게 구는 게 맞다. 연료가 고갈된 몸이 곳곳의 지방을 가져와 부지런히 태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얼얼해진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허벅지 바깥을 꽝꽝 때렸다. 그런 뒤 깍지를 껴 온몸을 쭉 늘어 빼고, 다시 쉬기를 반복했다. 여남은 번 만에 몸에 열이 돌았다. 손바닥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몸을 달래려는 듯 배꼽과 가슴팍 사이를 손바닥으로 둥글게 쓸며 천천히 돌아다녔다. 배에서 늑골로 이어지는 곡선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봉희는 오래 바람을 맞은 사구의 단면을 떠올렸다.
누운 그대로 몸만 돌려 벽에 다리를 올렸다. 침대 매트리스와 벽이 만나는 지점에 엉덩이를 끝까지 밀어 넣고 몸을 완벽한 ‘ㄴ’으로 만들었다. 벽의 차가운 기운이 허벅지와 장딴지, 발목과 뒤꿈치에 차례로 번졌다. 어둠에 묻힌 두 다리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따. 봉희는 두 팔을 앞으로 나란히 하듯 뻗은 뒤 호들갑스럽게 흔들었다. 천장에 운남이 보였다. 운남의 웅크린 뒷 모습이 천장을 둥둥 떠다녔다.
두 팔이 툭, 침대로 떨어졌다. 다리를 벽에 올려붙인 채 발끝 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3시 35분, 디지털시계의 숫자만 어두운 방 안에서 붉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운남의 방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운남이 변기 앞에 주저앉아 적갈색 토사물을 쏟은 게 어젯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운남이라니. 더욱이 내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 날을 앞두고 밤에 무언가를 삼킬 그런 물색없는 애가 아니었다. 하지만 변기에 쏟아진 토사물을,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주저앉는 운남을 어젯밤 똑똑히 봤다.
먹은 게 없는 몸은 특별히 배출할 것도 없다. 피부로 빠져나오는 자잘한 노페물들, 그게 아니면 지방이 녹아든 소변이 전부였다. 토사물이 나왔다는 것은 무언가를 먹었다는 것이고, 단식원에서 뭔가를 먹었다는 건 사고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운남을 흔들어 깨워서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단식 첫날의 속도처럼 더디게 흘렀다.
스트레칭을 멈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사위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침대 끝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는 순간, 침대 아래에 둔 생수병이 발에 채였다. 그걸 집어 들어 미지근해진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일주일째 음식이 끊긴 위장에 물이 닿자 웅크린 감각들이 날을 세웠다. 다시 한 모금, 봉희는 눈을 감았다. 목구멍을 조여 물을 가두고 천천히 돌려가며 씹었다. 물을 최대한 잘게 쪼개어 위장으로 흘려보내라던 원장의 말을 수련생 시절부터 코치가 된 지금까지 잊은 적이 없다. ‘물을 마실 땐 스무 번 이상 씹고 넘기기.’ 단식원 매뉴얼 중 비교적 쉬운 일에 속했지만, 봉희 외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코치가 되고 발견한 단 한 명, 그게 운남이었다. 봉희가 스무 번 씹었다면, 운남은 서른 번이었다. 수련생들이 코치의 눈을 피해 대여섯 번 씹고 대충 삼킬 때도 운남은 항상 서른 번 이상 씹었다. 그렇게나 믿음직스러운 수련생이었다.
지금 운남이도 나처럼 일찍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는 건 아닐까. 봉희는 눈을 떴다. 물을 씹으며 책상 옆에 세워둔 거울을 똑바로 응시했다. 목구멍으로 도망가는 물을 혀로 잡아 돌려 씹는 자신의 얼굴이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보이다가, 먹잇감을 잘게 부수는 맹수 같기도 했다. 운남에게 어제 일을 자세히 물어야 했다. 그런 다음 말해야 한다.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고 말이다.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달래고 싶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써요, 전.” 운남이라면 응당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 하루의 일정을 향해 자리를 털고 일어날 터였다. 단식원 전체가 술렁이는 촬영 날이지만, 운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산책을 위해 봉고차에 오르겠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긴 시간을 통과해낸 운남. 그 모습은 떠올리기만 해도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완전 터졌어요.”
대중이 그걸 알아봤다는 게 봉희는 몹시 신기했다. 파일럿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조회 수가 저조하면 그저 특집 방송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영상 업로드 일주일 후 전화를 걸어온 공진표의 목소리가 원장의 휴대폰을 뚫고 나와 봉희의 귀에도 꽂혔다. 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회의실에 새로운 공기가 흘렀다. 저 멀리서 분명한 호의로 가득 찬 어떤 것이 봉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먹었다는 게 너무 확실했다. 코치로서의 자긍심을 선물한 건 운남이었다. 그걸 다시 한번에 회수당한 기분이었다.
“방심했던 건 아닌가요.”
구유리의 한마디가 날카롭게 꽂히는 착각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운남은 약속할 것이고, 그걸 위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인을 찾고 해결하면 된다. 조급해진 봉희가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6시에 단식원 입소생들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코치는 5시 40분부터 담당 수련생들의 방문을 열었다. 복도 초입의 6인실부터 4인실, 2인실, 1인실까지 차례로 인기척을 내며 수련생을 깨웠다. 아직 6시가 되려면 한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좁은 방을 서성이다가 창문을 열어젖혀 밖을 보았다.
노란빛의 가로등 대열 덕분인지 바깥이 더 환했다. 단식원 바로 뒤는 편의점이었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주변을 밝혔다. 비틀거리며 길을 걷던 남자가 핀 조명 같은 편의점 불빛 안으로 들어와 선명했다. 남자는 몇 걸음 더 걸어 여자의 노점상을 지나갔다. 성단비를 한 손으로 휘감아 들고 왔던 그 여자의 바퀴 달린 작은 상점. 주황색 천막으로 덮어놓은 모양새가 바윗덩어리 같았다.
며칠 전 봉희 팀의 수련생 성단비가 요가복 구입을 위해 외출했다가 단식원 뒤 노점상에서 빈속에 떡볶이를 사 먹은 사건이 터졌다. 성단비는 다섯 걸음도 채 못 떼고 길바닥을 뒹굴었다. 노점상 주인 여자는 성단비가 건넨 지폐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기도 전에 그 꼴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성단비가 주인 여자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단식원에 들어왔다. 그때 성단비를 부축한 여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 일을 몰래 수습할 새도 없었다. 소란스런 소리에 요가를 끝낸 수련생들뿐 아니라 코치 몇 명도 내려왔다. 오세라 코치가 봉희의 얼굴을 살피는 게 보였다. 애써 담담하게 여자에게서 성단비를 넘겨받았다. 여자의 머리카락에 밴 기름 냄새와 달큰한 양념 향에 단식 3일째인 봉희의 위장이 꿀렁이며 축축한 소리를 냈다.
하얗게 질린 성단비를 보건 코치에게 인계하는 사이, 요가실에서 내려온 무리를 보고 여자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낯선 세계를 한 바퀴 훑어내는 시선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얼마 안 가 이제는 알겠다는 듯 반말을 내뱉었다.
“찜질방이 세련됐네?”
데스크 똑똑이 정미향은 모욕을 당한 표정이었다. 무심하게 뱉은 반말 때문인지, 찜질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정미향 앞에 있던 ‘구유리 건강힐링센터’ 팸플릿을 잡아채 슬쩍 앞뒤를 돌려보더니 던지듯 내려놨다.
“뭐 하는 데래, 대체?”
성단비가 보건실로 들어가자 수련생들도 슬슬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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