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예전부터 나는 한국 독자를 주요 대상으로 일본 근대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써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일본 근대미술’이라고 일괄해서 말했지만, 그 안에는 과감한 개혁자나 비극적인 패배자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질곡 아래 발버둥 치면서 보편적인 ‘미’의 가치를 추구하며 싸워 나간 작가였다. 이러한 ‘이단자’야말로 일본미술계의 ‘선한 계보’를 체현해 왔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이 책에서는 그런 ‘이단자의 계보’를 소개해 보고 싶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조국조상의 출신지인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해는 1966년, 열다섯 살이었다. 그 후 두 형이 한국에서 정치범으로 투옥되는 등 여러 일이 있었지만 나와 조국의 관계는 단속적이고 불안정했다. 그렇게 거의 반세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양미술을 다룬 책을 몇 권 썼고, 한국에서도 번역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랬던 내가 오랫동안 회피해 온 영역이 있다. 첫 번째는 ‘내 민족조선’의 미술이다. 인생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냈기에 ‘조선 민족’이 만들어 온 미술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의 일본인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작품을 실제로 접할 기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4년에야 겨우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라는 책을 펴낼 수 있었다.
또 하나 미답의 영역이 ‘일본미술’이라고 말하면 독자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본에서, 그것도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인 교토에서 태어나 물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일본미술’을 접하며 자랐다. 나에게 일본미술은 단순히 친근하다고 말하고 끝낼 수는 없는 대상이다. 나라는 인간의 ‘미의식’은 ‘미각’이나 ‘음감’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일본미술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일본미술에 애증이 뒤섞인 굴절된 마음을 품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일본 근대미술’을 이야기해 보려는 이유는 무얼까.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보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근대미술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금 두 나라 사람들 사이의 왕래는 (일본 정부에 기인하는) 양국 관계의 악화와 코로나19covid-19 탓으로 답답하게 가로막혀 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한국 관광객이 일본을 찾아왔다. 유학이나 사업 때문에 체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교류는 언제 재개될 수 있을까, 일본에는 좋은 미술관이 꽤 많고 한국인이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도 적지 않은데 실제로 방문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점도 특히 아쉽다.
‘일본미술’이 뛰어나다고 선전하려는 의도는 물론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내 자신이 그래 왔듯 근대라는 시대, 수십 년에 걸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의 감성에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은 자명한 이치다. ‘조선인이라는 존재’는 식민지 경험을 통해 종주국의 미의식에 침투당한 사람들이라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일본’을 진정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에 침식당했고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미의식’의 수준으로까지 파고들어가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자기 이해, 진정한 정신적 독립을 위해서 필요한 태도다. 내가 일본미술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는 ‘패배주의’도, ‘식민지 근대화론’도 아니며, ‘일본 찬미’는 더더욱 아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미술가는 나카무라 쓰네, 사에키 유조, 세키네 쇼지, 아이미쓰, 오기와라 로쿠잔, 노다 히데오, 마쓰모토 슌스케, 이렇게 일곱 명이다. 그밖에도 필요에 따라 그들과 관련 있는 미술가를 조금씩 언급했다. 일곱 명 모두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미술가다. 한국에서 친구나 지인이 찾아오면 꼭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조선 민족의 일원인 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조국’의 사람에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겐 있었다. 그들의 작품에서 내가 느낀 매력을 ‘조국’의 사람과도 과연 공유 가능할까, 그런 점도 궁금했다. 그들은 대부분 1920년대부터 1945년까지 짧은 시기 동안만 활동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 시작해서 일본이 패전에 이르는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본미술사의 주류로부터는 ‘이단자’로 여겨지기 쉽지만, 지금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일본 근대미술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할 만큼 거듭 상기되고 언급되는 존재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평생 ‘일본 근대미술’이라는 어려운 문제와 온몸으로 격투하다가 불행하게 요절한 이들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역병주로 결핵과 전쟁이라는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작품과 삶을 바라보면 ‘근대 일본’이라는 문제가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떠오른다. 그 ‘문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근대’로 ‘끌려 들어간’ 조선 민족에게 한층 더 복잡한 ‘응용 문제’로 던져져 있는 셈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요즘 상황을 보며 빠트려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두고 싶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고 2년 이상 흘렀지만 아직 완전히 진정될 조짐은 없다. 게다가 올해 2월 말부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지금도 전쟁이 진행 중이다. 세계는 점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개발도상국의 앞날까지 상상하면 암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수많은 근대미술가가 고투했던, 전쟁과 역병의 시대가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계속 떠오르는 이런 의구심 속에서도 나는 “그렇다.”라고 믿는다. 이유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해 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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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들고 평온한 남자
― 나카무라 쓰네, 〈두개골을 든 자화상〉
과거를 돌이켜 보면 역병이 휩쓸어 세상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을 때 뛰어난 미술 작품이 만들어지곤 했다. 페스트 창궐 이후 탄생한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이 대표적이다. 북방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죽음의 승리〉는 좋은 예다. 20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 그중에서도 〈죽음과 소녀〉를 들 수 있겠다. 실레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8~1920년 사이 크게 유행하며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사망자를 낳은 인플루엔자속칭 ‘스페인 독감’가 만연하던 시절에 제작됐다. 화가 자신도 이 병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역병의 참화 속에서도 어째서 인간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 걸까. 왜 거기서 뛰어난 예술이 생겨났을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바짝 다가옴을 느끼면서, 죽음의 의미를 (바꿔 말하면 삶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상황 자체에 어찌할 수 없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 질문을 앞에 두고 온몸으로 맞섰던 예술가의 행위가 시공을 넘어 지금 우리 내면에 도사린 공포, 불안, 비탄, 절망과 (어렴풋한) 희망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공명한다.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은 현재 코로나19 상황과 매우 닮았다. 난폭하게 낫을 휘두르는 사신死神이 물러간 다음 무엇이 남을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역사의 교훈에 따르면 이러한 사건에 연동하여 일어나는 일은 불황이었고, 파시즘의 발호나 전쟁이기도 했다. 현재 일본의 상황이나 지난 트럼프 정권의 언동을 보면, 어두운 예감은 점점 짙어만 간다. 이런 때에 ‘일본 근대미술’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누구의, 어떤 작품에서 시작해야만 할까.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첫 번째 작품은 나카무라 쓰네中村彛, 1887~1924의 〈두개골을 든 자화상〉을 골랐다. 그가 다뤘던 테마가 지금 상황과도 호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잊기 힘든 그림이라는 까닭도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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