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사진의 아름다움이 이야기하는 것
정주하 + 사사키 다카시 + 서경식
서경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사진가인 정주하 선생의 사진전을 이곳 미나미소마를 시작으로 일본 곳곳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맡은 저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으로, 이 사진전의 실행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도쿄케이자이대학에서 인권문제에 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2년 전의 지진으로 소중한 분을 잃었거나, 집이나 귀중한 재산을 잃었거나, 혹은 그 외의 다양한 의미에서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이 사진전은 제가 2011년 6월, 지진이 있고 3개월 후에 이곳 미나미소마를 방문해 여기 계신 사사키 선생님을 찾아뵙고, 그 장면을 포함한 다큐멘터리 방송(「후쿠시마를 걷다-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NHK교육방송, 2011년 8월 14일 방송)을 만든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의 미나미소마 방문을 알게 된 한국의 지인이나 친구들로부터, 자신들도 꼭 그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외국이기도 하고 지리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으니 안내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친구의 소개로 여기 계신 사진가 정주하 선생을 만났습니다. 정 선생도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2011년 11월에 정 선생을 포함한 한국의 친구들과 미나미소마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두 번째, 정 선생은 첫 번째 후쿠시마 방문입니다. 나중에 본인이 직접 설명하겠지만, 정 선생도 상당히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았고, 이후 지금까지 미나미소마 및 후쿠시마 각지를 촬영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진전은 한국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개최되었는데, 시작은 2012년 3월에 서울 시내에 있는 평화박물관이라는 곳에서였습니다.
그 후, 정주하 선생의 작품을 한국에서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전시해서 되는가, 일본 사람들, 후쿠시마 사람들에게도 보여줄 수는 없을까 하는 이야기가 한국의 친구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약간 주저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있는 사람이 보는 시선과, 내부에서 매일 괴로운 마음을 품고 살고 있는 분들이 보는 시선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후쿠시마에 들어가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이 상당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사사키 선생에게 의논했더니 ‘합시다.’라고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실행위원인 저는 물론, 사진가 본인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다만 작품을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여러분 안에 각자 생각이 있으니, 괴로운 내용, 엄혹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중에 서로 솔직히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제가 먼저 시간을 사용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번 좌담 시작에 앞서 꼭 소개하고 싶은 시가 있어서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그 후에 정준하 선생 말씀을 듣겠습니다.
시인이 포착한 ‘징후’
지금 소개하려는 것은 사이토 미쓰구斎藤貢라는 분이 쓰신 시입니다. 사이토 선생은 미나미소마 시 오다카小高 구의 현립 오다카상업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분입니다. 현재는 전근을 가셔서 고리야마郡山 시에 계시는데, 저희는 2011년 11월에 후쿠시마 시에서 사이토 선생을 만났습니다. 학교가 있는 오다카 구는 피난지시가 내려져 경계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학교 전체가 이사를 가서 후쿠시마 시의 고등학교에서 교실을 일부 빌려 수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이토 선생은 교장이면서 동시에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만났을 때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누고, 선생의 작품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자신이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시를 우선 소개하고 싶습니다.
너는 먼지이니
부모처럼
생기를 불어넣었으니
나와 그대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일구게 될 것이다.
설령, 그곳이 저주받은 땅이라 할지라도
일구어가며 나날의 양식을 얻을 것이다.
가시와 엉겅퀴여.
괴로움은 나누는 것입니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대와 나는 땅에 뿌려진 한 톨의 씨앗.
땅의 고통이 싹을 틔우는
목숨의 괴로움 바로 그것이니.
기쁨을 멀리하고.
열락悅樂을 멀리하고.
들풀을 뜯어가며 질박한 나날에 감사를 드리자.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지니라”*
옛적 부모처럼
나와 그대는 낙원을 꿈꾸면서
오순도순 한 톨의 씨앗이 되어 흙에 잠드는 것입니다.
나도. 그대도.
우리는 먼지이니. 먼지에 지나지 않으니.
부모가 그러하였듯이
마침내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낙원은 까마득한 옛날에 잃어버렸고
잘못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들에는 눈이 내리고, 마음에도 눈은 내려 쌓인다.
땅끝까지 떠돌 수밖에 없는 그대와 나일지니
이 갈증은 언제나 채워질 것인가?
*구약성서 『창세기』 제3장 ‘낙원 추방’ 중에서
매우 놀랍게도 이 시는 지진 전에 쓰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지진의 ‘조짐’이랄까 ‘징후’를 느끼고 쓰셨다고 생각되는, 시인이기에 가능한 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토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오다카상업고등학교가 있는 오다카 구는 쓰나미가 덮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휩쓸려갔다고 합니다. 그중에 24시간 동안 바다를 표류하다가 만 하루가 지나 살아돌아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다행히도 피난지시 구역 밖의 바닷가로 떠밀려왔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실은 그때 출입금지 구역이었던 곳 안쪽으로 떠밀려온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데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구하러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이토 선생은 그 사실에 대해 가눌 수 없는 분노를 품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나 지역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교사로서의 임무를 정력적으로 다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런 분이 지진 전에 이와 같은 시를 쓰셨다는 것을 저는 매우 충격과 감동으로 받아들여, 이 기회에 사이토 선생에게 직접 이 시를 소개해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좌담 전에 잠시 오셨는데 업무 때문에 가셨습니다. 고작해야 10분, 15분 저를 만나기 위해 고리야마에서 일부러 와주신 것입니다. 직접 낭독은 못 하셨지만 감사드립니다.
사이토 선생의 이 시를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도호쿠라는 장소, 후쿠시마라는 장소, 오다카라는 장소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이미 사태 이전부터 느끼고 있던 ‘징조’, 그리고 지금 감당하고 있는 고통이라는 것을 이렇게 깊이 전하는 말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정주하 선생으로부터 사진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듣겠습니다.
핵안보정상회의에 저항한다
정주하 제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는 일이고, 한국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백제예술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여섯 차례 미나미소마를 방문했고, 드디어 중앙도서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후쿠시마 현 미나미소마라는 곳을 반복해서 방문하고 사진 작업을 하게 됐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짧게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사진을 보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시각매체를 다루는 예술가들은 두 가지 지점에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기술적인 것을 포함한 예술로서의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다룰 것이냐는 주제에 관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973년부터 사진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작업 해왔습니다. 여기 미나미소마에 와서 작업하기 전, 그러니까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그 작업으로 전시를 하고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2008년 5월 서울에서 ‘촛불시위’라고 하는 상당히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있었을 때, 아트선재센터라는 곳에서 3개월간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사람이 제 사진을 잊었고, 저 또한 지속해서 작업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2009년에는 가나자와金沢 시, 그리고 2010년 8월에는 원자폭탄 투하 기념일에 맞추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열린 평화기념식에 제 가족과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2009년 여행은, 일본 서해 쪽에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보기 위해 자전거로 17일간 진행한 것입니다. 다카하마高浜라는 자그마한 마을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데, 그곳에 며칠 머무르면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상황이 한국과 너무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낚시하고, 수영하고, 스킨스쿠버를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 매우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깊이 관심을 두고 있던 주제였기 때문에 한걸음에 달려와 보고 싶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제 작업의 주된 관심은 일어난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징후’입니다. 그래서 계속 긴 시간동안 슬픈 마음으로 미디어에서 전달해주는 내용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 3월 26일과 27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에서 핵안보 정상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으며, 지금 북한은 바로 핵문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좀 더 의미 있게 쟁취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세계정상들이 한국에 모여서 미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제2회 핵안보정상회의를 서울에서 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사진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핵에너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작업해온 예술가로서 그 소식을 접한 후, 그것에 대항하여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산에 있는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저를 비롯하여 독일 작가 위르겐 네프쯔거, 일본인 작가 코다마 후사코 3명의 작품을 묶어서 원자력을 주제로 하는 전시회를 계획하였고(‘하얀 미래, 핵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 미나미소마에 와서 제 눈으로 일어난 일을 바라보면서 느낀 점들을 작업해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에서 전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먹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서경식 선생이 2011년 6월에 NHK와 함께 이곳에 와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서경식 선생이 놓아주신 징검다리를 같이 밟으면서 제 나름대로 작업을 진행해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곳 미나미소마에서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사진들을 작업하게 된 경위입니다. 결론적으로 2012년 3월 16일부터 한 달간 평화박물관에서 이 사진으로 전시를 했고, 한국 국립현대미술관과 협력하여 세계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장소(코엑스)에서 핵 문제를 가지고 일본, 한국을 포함한 여러 작가와 함께 전시(핵아트 프로젝트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에서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대한 기념 세미나를 했는데, 마찬가지로 미나미소마에서 작업한 사진들을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작업한 사진들에 대해 소개해보겠습니다.
처음 미나미소마에 왔을 때에는, 사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한국에서의 불안과 공포를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마스크도, 장갑도, 모자도,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함께 온 서경식 선생도, 선생의 사모님도, 한홍구 선생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충격을 마주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담담해지려는 노력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같이 보고 싶은 것은 일하시는 할머니들의 사진(사진 5)입니다만, 이 사진을 사진집에 넣은 이유는, 이분들이 지니고 있는 긍정성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온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왔다 갔다 해도, 다가가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너무도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서경식 선생이 6월에 돌아봤던 장소들을 다시 버스를 타고 함께 지나오면서, 제가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곳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고,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반드시 여기 사는 분들게 되돌려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여정에서 가장 먼저 다다른 곳은 ‘료젠霊山’이라는 산입니다(별지화보 사진 1). 우리의 여정에서 처음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료젠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진은 후쿠시마 시내의 호텔에 묵었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갔다가 찍은 것입니다.(72쪽 사진) 할 할머니께서 거리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계셨는데, 그 낙엽을 쓸어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았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방사능이 묻어 있는 낙엽은 보통 다른 쓰레기들과 달리 그렇게 투명한 봉지에 담아야 하는 모양인가 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작업을 하는 순간에 느낀 감상은 저 나이 드신 할머니께서 거리의 낙엽을 쓸어 담는 행위 자체가, 방사능에 오염된 것을 투명하게 보이고 있다, 투명한 비닐 안에 오염이 비쳐 보이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겨울의 시작입니다. 제가 사는 한국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도 이곳처럼 감이 유명합니다. 이 사진에서는 잘 안 보입니다만, 감나무에 매달려 홍시가 된 감이 얼어서 도저히 살아있는 생물체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사진 6).
이것이 마지막 사진인데요(사진 22), 미나미소마 해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누군가가 해변에 있는 방파제 위에 저 조그마한 장난감 같은 것들을 올려놓았겠지요. 저것은 분명히 3·11 사태 이후 누군가가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 곰의 시선과 표정이 제 마음을 무척 아련하고 아프게 눌렀습니다. 태평양 너머 먼 영원의 바다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올 봄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서경식 감사합니다. 그럼 이곳에서 사시는 사사키 선생에게 작품을 보신 감상을 듣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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