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로마Ⅰ
구멍에 고개를 처박고 들여다보다
2014년 2월 21일, 오후 아홉 시 가까운 시각에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하여 뮌헨을 경유한 긴 여정이었다. 꽤 낡은 느낌이 드는 공항의 수하물 집하장에는 미리 연락해둔 성실해 보이는 택시 운전사가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인 2월 10일부터는 지바 대학에서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한 집중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중 하루는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에 대해 이야기했다. 2월 8일부터 동일본 지역에서는 기록적인 폭설로 교통에 큰 혼란이 생겼다. 그래도 9일 지바 시로 향했고 F나의 배우자는 볼 일이 있어 오사카로 떠났다. 평소보다 시간이 몇 배나 걸려 도착해보니 지바 거리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호텔 밖에서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며 어지러워 호텔 방에서 심하게 토했다. 예전에 한국에서 머물 때 일과성 뇌허혈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재발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나 택시를 부르려고 해도 폭설로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었다. F에게 전화를 걸까도 생각했지만 오사카에 있기 때문에 연락한다한들 쓸데없이 걱정만 끼칠 뿐이었다. 밤새 구토를 반복하다가 ‘이렇게 인생을 마치는 걸까…….’라는 생각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기분은 의외로 차분했다.
어쨌건 집중 강의를 취소할 수 없었기에 눈길을 비척비척 걸어 지바 대학으로 향했다. 다행히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준 학생들 덕분에 힘들게 강의를 한 보람이 있었다. 폭설 피해는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이어졌고 몸 상태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그만두어야 할까 몇 번이나 망설이면서 불안감을 안은 채 이탈리아로 출발하게 되었다.
▲ 리소르지멘토 광장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로마 시내에 위치한 리소르지멘토 광장 근처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라고 했지만 단기 임대 아파트라는 편이 어울리겠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히다카 로쿠로日高 六郞 선생과 가깝게 지내왔는데 그 부인 되시는 노부코暢子 선생께 자주 혼나곤 했다.
“경식 군, 그렇게 땅바닥에 구멍을 파고서 들여다보기만 해선 안 돼요.”
그렇게 ‘구멍에 고개를 처박고 그곳만 들여다보는’ 성향은 이 나이가 되어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번 여행 기간 내내, 마치 누군가가 마음 밑바닥에 뒤엉켜 있는 암흑을 ‘모두 토해버려!’라고 호소라도 하듯, 어떤 어두운 이야기의 플롯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후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조금 살집이 있는 코미디언이 나타나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연발하면서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집요하게 따라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덤벼들고 말았지만 내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 상대방에게 한 대도 닿지 않았다. 뚱뚱한 코미디언은 밉살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나를 비웃었다.
앗, 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순간, F가 흔들어 깨웠다. “아, 여긴 로마였지…….” 꿈이었다는 걸 깨닫고도 얼마간 시간이 지났다. 꿈치고는 잠에서 깬 후에도 현실감이 길게 꼬리를 물었다. 지바의 호텔에서 구토를 반복할 때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 커튼을 열었더니 바티칸의 외벽이 조명 아래에서 떠오르듯 보였다. 거리는 금세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슴푸레했고 이 계절치고는 후텁지근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토리노를 찾아 프리모 레비를 회상하기 위해서였지만, 먼저 로마로 들어온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카라바조Michelangelo de Caravaggio, 1573~1610다.
내가 처음 이탈리아를 여행한 것은 1983년이지만 그때는 피렌체를 건너뛰듯 훑어봤을 뿐이었다. 4년이 지난 1987년 5월에야 처음 로마를 찾았다바로 그해 프리모 레비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이탈리아에 왔지만 로마에만은 들르지 않았다. 로마는 거의 27년만이었다. 27년 전이라면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던 해였다. 물론 ‘마지막’이라는 말은 지금에야 할 수 있을 뿐, 당시에는 그 암울한 나날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나는 로마와 바르셀로나, 게다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대체 어떤 심경으로 그토록 사려 깊지 못하고 염치없다고까지 말할 법한 여행을 떠났는지, 이 이야기는 이전에도 썼던 적이 있어서 이번 글에는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나의 서양 미술 순례』 참조
▲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그 여행 도중 로마 일정을 마치고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테르미니 역 근처 버스 터미널에서 공항버스를 타려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 늘 신경 쓰고 있었지만 비행기 출발 시간 때문에 서둘렀고 양손 가득한 짐으로 여유마저 없던 탓에 눈 깜짝할 사이 주머니 속 지갑을 도둑맞았다. 황급히 뒤쫓아 갔지만 소매치기의 한패인 듯한 여성 몇 명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소리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꼼짝도 못한 채 ‘아,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에도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재빠르게 나의 불운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여권 같은 귀중품은 다른 곳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알게 된 카푸친파 수도사에게 사정을 말하자 나를 딱하게 여긴 그는 “이 양반은 선한 순례자이니, 하룻밤 묵을 곳을 제공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라며 도중에 있는 어느 교회 앞으로 소개장까지 써줬다.
▲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 속 로마 풍경.
그때 수도사와 나눴던 대화 중 하나가 『신약성서』 「요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의심 많은 토마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도사와의 만남은 나중에 그 주제를 그린 카라바조의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까지 찾게 만든 강한 동기가 되었다.『고뇌의 원근법』, 박소현 옮김, 돌베개, 2005년 참조
소매치기를 당한 경험이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처럼 남았는지 이후 때때로 밀라노, 토리노,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지만 로마에만은 발길을 두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가 보고 싶어. 지금 아니면 죽을 때까지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몰라.”라며 F가 이끌지 않았다면 이번 여행을 아예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F는 학생 때 시스티나 성당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단체 여행의 일행이 반바지 차림이어서 입장할 수 없었다고 했다.
처음 로마를 방문하고 2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땐 예상을 못했지만 두 형은 살아서 출소했고 나는 글쟁이가 되어 대학에 직장도 얻었다. 전에는 언제나 혼자서 여행을 떠났지만 15년 정도 전부터는 F라는 동행도 생겼다. 나 개인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불만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안을 찾지 못한다. 내가 이런 안정을 얻은 것은 단순한 우연과 행운의 덕이라는 의식, 과거 언젠가의 시점에 가혹하고 무참한 운명 속으로 떠밀렸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 레비식으로 말하자면, 좀 더 어울리는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따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실제 내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혹한 운명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러 우연이 겹쳐진 결과로 나 자신은 30년가량의 세월을 이렇게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인간은 조금도 나아진 바 없다는 생각이 늦가을의 그림자처럼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