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아래로부터의 역사인가?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관 청산과 새로운 한국사 정립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인 미국과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냉전 체제에 의해 남북 분단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 대립 구도 안에서 친일 청산 문제는 냉전 체제의 정치적 반공 이념과 결부되어 역사의 문제를 넘어 정치적·사회적 성격을 띠고 격렬한 국가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이 문제들은 여전히 정치적·이념적·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우리에게 살아 움직이는 ‘기억의 장소’가 되고 있다. 역사는 그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하고 살아온 기억의 집합체다. 역사의 역할은 지금까지 쌓여온 민족의 기억을 후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민족의식과 국가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민족의 기억이며, 따라서 역사와 기억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과거의 역사는 국가 차원에서 공적인 영역이었으며, 국민 또는 민족의 결속을 위한 국가 원리였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의 가치가 줄어들면서 역사는 국가 공동체적 성격을 상실하고 사적私的 영역으로 전락해 민족의 기억이 아닌 특정한 계층을 위한 기록이 되고 말았다. 역사의 이러한 현상은 민족과 역사의 결합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가의 작업은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민족의 기억들을 다시 끌어내 이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민족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데 있지 않고, 오로지 과거의 기억을 위한 역사 서술에만 치우쳐 있다.
역사가 개인의 판단과 해석의 영역이 되어버리면서 우리나라에서 역사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거나 정치권력의 도구가 되어 민족의 기억보다는 현실을 위한 각색된 이야기로 전락한 느낌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학의 과제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면서 민족의 기억을 새롭게 정립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 담론에 의한 우리 민족의 기억에는 행복과 불행의 사건들이 모두 담겨 있다. 친일의 기억은 불행의 역사지만, 독립투사들의 행적에 대한 기억은 해방 이후 희망의 역사가 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독일 나치 점령 시기의 문학가, 음악가, 정치인 등 유명 인사들이 나치 협력자로 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두 가지 상반된 기억은 그들의 역사에서 점차 잊어야 할 의미 없는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역사에서 어둠과 밝음은 항상 공존하기 때문에 그 좋고 나쁜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고 항상 살아남아 있기 마련이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좋은 기억만 기록하고 나쁜 기억들은 지워버리는 것은 진정한 역사가 아니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을 위한 밑거름이다. 인간은 역사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며, 그 비추어진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사느냐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갈 수 있다. 역사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 역사가는 역사의 거울에 비친 기억의 허상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편견에서 벗어나 과거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국민의 기억 속에서 독립운동 정신을 앞세우고 친일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것도 진정한 역사가 아니고, 남북 국가 수립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친일을 부각하는 것도 진정한 역사의 기억이 될 수 있다. 이런 경우, 역사는 국가 공동체를 위한 공적인 영역이 아닌 특정 집단을 위한 사적인 영역에 머물게 되며, 궁극적으로 민족의 기억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담론에 불과하게 된다. 민족의 정체성은 ‘좋은 기억’만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며, ‘나쁜 기억’ 또한 잊지 않아야만 완성될 수 있다. 그동안 민족의 정체성과 순수성의 확립을 위해 ‘나쁜 기억’을 청산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오면서 ‘좋은 기억’조차 얼마나 많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왔는가? 특히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독립투사 등에 대한 기억들은 해방 이후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 갈등과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혼란을 거듭하면서 결과적으로 국가 정체성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 서술, 그리고 미래 지향적인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
제5장
조선인의 세 갈래의 선택
1
친일과 순종, 그리고 항일
중일전쟁1937에 이어 발발한 태평양전쟁1941을 전후해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이를 구실로 식민통치를 철저하게 강화해나갔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1937년 일어 사용의 의무화와 1938년 각급 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 폐지 조치가 취해졌으며, 지식인에 대한 사상 통제 등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관련해 1930년대 후반에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자 하는 시詩가 많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을 들 수 있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서정주는 노비 집안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유명한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 덕분이었다. 조선 신분제 체제에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교육을 천민들도 받을 수 있는 삶의 전환이 일제 식민 체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천민은 글과 학문을 배울 수 없었다. 학문과 글은 지배층 사대부 양반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양반을 제외한 모든 피지배층은 글을 배워서도 안 되고 학문을 공부해서도 안 되었다.
양반들은 관료가 되면 토지와 녹봉祿俸 등을 국가에서 받게 되므로 지주계급地主階級을 형성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래 여러 왕권 교체에 공을 세운 공신들과 사대부 양반들은 자신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으로 지급된 광대한 토지를 세습, 사유함으로써 대지주가 되었다. 반면, 피지배층 백성들 가운데 노비와 천민들은 아예 법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도록 규정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농공상 등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노비 등 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사대부 양반 출신이 아닌 양민들도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에 가까웠다. 양민계층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도외시한 채 학문 활동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벼슬은 사대부 양반 출신이 아니면 그 어떤 신분도 허용되지 못했다.
조선이 망한 후에도 신분 출신에 따라 부의 대물림은 그대로였다. 사대부 양반 가문들은 대지주로서 여전히 부를 누리고 살았던 반면, 소작인 농민이나 노비 등 피지배층은 각기 자신의 생존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았다. 신분제 철폐로 노비, 백정 등 천민계층이 사라졌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신분제 철폐로 인해 이제 노비 출신들도 사람대접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어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출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500여 년 동안 뿌리 깊게 자리해온 신분의식 탓에 신분에 대한 편견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노비의 다른 형태는 곧 머슴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해방되자 사대부 양반가나 시골의 대지주들은 농사일을 시키기 위해 머슴을 고용했는데, 이때 많은 노비가 머슴으로 전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은 농업경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노비제가 폐지되었어도 노비는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가장 주요한 토론 주제의 하나가 노비의 실질적 해방이었다. 노비 해방의 목표는 경제적으로 구속하는 등 온갖 편법을 동원해 사실상 노비처럼 부리는 행위를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1900년을 전후로 독립운동가 김좌진金佐鎭, 여운형, 이회영李會英 등 지식인들은 솔선수범해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가정 내의 노비들을 해방했다. 또 1928년 계명구락부에서 노비 해방에 관한 논의가 있던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 내내 노비계급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면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시대 여러 신분의 위계에 따른 삶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신분이 높고 부유한 자들, 그리고 신분이 낮고 가난한 자들은 각기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이어갔다.
이들 각각의 신분 출신들은 조선이 망한 후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첫째가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친일 그룹, 둘째는 항일투쟁에 뛰어든 독립운동가 그룹, 셋째는 일제 식민통치에 적응하며 살아간 순응주의 그룹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