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고통을 ‘마주 대하는 것’이 나에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국제 인권운동을 하면서부터였다. 인권이란 늘 피해자를 만나고 그들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었다. 어디를 가나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그들이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그 울음 앞에서 모두가 침묵하는 장면이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다가 클라이맥스에서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것. 울음 말고는 자신이 겪은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고통의 절대성 앞에 모두가 말을 삼갈 수밖에 없는, 그런 경건함이 있었다. 침묵을 통해 피해자가 겪은 참혹함과 이를 견뎌온 세월에 경의를 표하는 것, 그것이 활동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침묵의 순간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강한 유대와 공감의 공기가 흘렀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교감하고 연대하게 했다. 고통의 힘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돌아올 때 활동가 대부분은 결기에 넘쳤다. 이 고통의 현장을 알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고통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고통의 강도와 파괴력을 보여준다면 측은지심이 일어나 사람들이 즉각 행동에 나서고 저절로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이 본 피해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크고 치명적이며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확신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활동가 대부분은 의문에 빠지게 된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매번 불러 그 고통에 대해 증언하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인지를 되물으며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 사람이 증언을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증언자’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도 의문의 대상이었다. 보통 이런 행사들은 세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첫 번째 단계는 고통에 대한 증언이다. 두 번째 단계가 이 증언에 대해 학자와 전문가, 그리고 활동가 등이 모여 토론하는 자리다. 마지막으로는 참가자 모두가 모여 고통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 세상에 공표하며 행동을 개시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을 하며 마무리된다.
이런 구성에서 증언자의 증언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전문가들의 해석을 기다리는 말로 여겨진다. 전문가들이 매우 조심하며 증언이 그 자체로 충분히 해석적인 말이라고 강조하더라도, 실상은 해석을 기다리는 ‘날것의 정보’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무슨 권한으로 증언을 해석하며, 그 해석은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하는가. 때때로 이 문제로 자리가 소란스러워지곤 했다.
반대의 문제도 있었다. 증언자의 말이 절대적인 것으로 선언되는 경우였다. 증언자의 자기 서사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들려야 하고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한다며 다른 어떤 개입도 거부하는 것이다. 증언자 자신이 이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변 지식인들에 의해 그렇게 선언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참석자들은 증언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사람이지 대화를 나누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것은 증언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사회적 행동을 촉발하려는 활동가들에게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전시하여 소비하지 않되 고통의 절대성에 사람들이 충분히 공명하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하면 고통에 대한 증언을 전문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날것의 정보도, 그렇다고 그 자체로 완벽한 말도 아닌, 고통에 대한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런 자리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뒤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증언자들이 힘차게 증언하고, 참석자들이 공명하고, 정치적 결의를 하고 난 다음이다. 참석자들이 떠나간 자리, 혹은 증언자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난 다음의 문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고통에 다른 사람들이 공명함으로써 증언자들은 힘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홀로 남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묻곤 했다. “이 고통이 끝나긴 할까요?”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고통을 고통으로 지속시켰다. 따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고통이 끝나는 것. 고통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고통에 대한 언어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 끝난다면 그 모든 걸 접을 수 있다고 했다.
끝이 없다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권 현장에서의 고통뿐만이 아니다. 모든 고통이 그랬다. 사회적 관계로 인한 것이건 육체적 질병에 의한 것이건 사람들을 가장 공포스럽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통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무엇을 배우려고 한다. 신의 의도든 삶의 의미든 혹은 고통을 다루는 역량이든 뭔가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 끝을 통해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계에서 고통은 매우 부적절하게도 아이를 낳는 산고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끝이 있고 새로운 탄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고통은 그 강력한 파괴 때문에 한 번의 고통이 끝없이 지속된다. 또 어떤 고통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반복된다. “이제 다시는 나에게 찾아오지 마라”며 보내줬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지나고 바로 다시 찾아오곤 한다. 고통의 의미를 찾아 뭔가를 배우려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인 과정인 데 반해 고통의 원인은 대개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기에 반복되거나 혹은 원인이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종종 다시 발생해버리는 것이다.
끝날 줄 알았던 고통이 반복되면 고통을 겪는 일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진다. 의미는 끝이 있고 다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끝도 없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득도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생각하고 노력해도 끝이 없다고 절망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생각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생각해봤자 쓸모없으니 생각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망할 생각은 끊이질 않고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며 사람을 괴롭힌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엿가락처럼 들러붙어 사람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뭐라도 하면서 잊을 때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결국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오로지 바라는 것은 생각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고 싶다. 잠이 올 때가 제일 행복하고 잠에서 깨어날 때가 가장 괴롭다. 또 이 지긋지긋한 끝없는 것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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