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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중략)
사유역량은 읽기의 특권인가
김성우
영상은 기본적으로 지각perception의 매체죠. 내가 언어를, 소리를, 또 이미지를 인지하는 거예요. 반면 텍스트는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게 아니라 그걸 기반으로 내 몸이 시뮬레이션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그 묘사가 구현되는 곳은 종이 위가 아니라 내 머릿속입니다. 영상을 보면 그 화면 속에 구현돼 있는 걸 보는 거잖아요.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희곡을 100만 명이 읽으면 100만 개의 세계가 만들어지거든요. 추상성이 높은 시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인지과학에 ‘체화된 시뮬레이션 가설embodied simulation hypothesis’이라는 게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언어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게 아니고 의미작용을 격발trigger시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책 위의 문자 자체로 의미가 된다기보다는 문자가 전해주는 설명, 묘사, 정서적 분위기, 이런 것들이 제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경험, 정서와 사회성의 총체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는 거예요. 이때 텍스트와 제 뇌 속의 기억이 만나서 시뮬레이션을 일으키는 거죠.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을 100만 명이, 대충 보는 게 아니라 정독을 했다면, 100만 개의 〈로미오와 줄리엣〉 시뮬레이션이 생성되는 거예요. 비유를 들자면, 셰익스피어가 각본을 제시하고 이에 기반해서 우리 뇌가 연기를 하는 셈이죠.
그러니까, 역지사지의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이 영상과 책은 달라요. 영상은, 내가 좋은 영화를 봤다 할 때는 누가 보든 객관적으로 그런 상황, 색깔, 크기, 말투, 이런 것들이 소리와 시선을 통해 전달되는 반면, 문자는 큐만 주는 거죠. 단어의 배열은 말 그대로 시나리오고, 그것이 구현되는 곳은 내 머릿속이에요. 우리는 문자를 통해 정보를 전달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달받은 정보를 가지고 자기 인생과 지식, 경험을 거기에 넣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거죠. 둘 다 외부에서 자극이 들어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야 하는 문자라는 매체와, 외부에서 거의 완제품으로 들어오는 영상이라는 매체는 당연히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방식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저는 사유역량을 키운다는 측면에서 볼 때 텍스트만이 역할을 해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웹툰도 가능하고요, 동영상이나 영화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방식이 다른 게, 타 매체와 비교했을 때 텍스트는 나의 인생과 지식, 경험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동원하는 방식의 사유라는 것이죠. 이런 차이는 생각보다 커요. “왜 그걸 책으로 읽어, 복잡하게. 영상으로 잘 나와 있으니까 영상을 보면 되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차이를 간과하는 거죠. 책을 읽을 때는 나의 참여와 관여가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돼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졸리고요, 자게 돼요. 하지만 잘 만든 영상은 보고 있으면 그냥 보게 돼요.
이건 언어의 추상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 전에 읽었던 《힐빌리의 노래》의 맥락을 떠올릴 거고, 어떤 사람은 좌파가 생각하는 자유를 생각하겠죠. 똑같은 문장을 읽어도 사람들 머릿속에서 활성화되는 게 다 달라요. 사람들이 말을 통해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언어를 기반으로 한 소통이란 사실 완벽한 공감이나 정보의 교환이 아니고 적당한 선에서 계속 타협하는 거거든요.
제가 수업시간에 잘 드는 예가 있습니다. 제가 “나 두통이 심해.” 그러면, 친구가 “그런 이거 먹어.” 하면서 진통제를 줍니다. 그런데 과연 친구는 제가 말하는 두통을 이해했을까요? 제 머리 어느 쪽에 두통이 있는지, 심하다고 한 것은 어느 정도인지, 사실 친구는 잘 모르죠. 저는 심하다고 생각하는 두통이지만 그 친구에게는 그 정도의 두통이 별거 아닐 수도 있어요. 잘 모를 수밖에 없죠. 몸이 다르고 살아온 궤적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도 “그래, 진통제 줄게.” 하면서 주고, 저는 그걸 먹고 나을 수도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엄밀하게 두통이라는 걸 정의한 적도 없고 심하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합의한 적도 없지만, 사회 속에서 소통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거죠. 아니, ‘살아지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언어가 갖고 있는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봅니다.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 이해한 척 사는 거고, 그래도 서로에게 아주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 물론 예외는 있지만요.
완벽한 이해는 당연히 불가능한데, 책을 읽었을 때와 사람을 만나서 표정을 보고 말투를 들었을 때, 영상을 봤을 때, 이해나 사유의 방식이 다 다른 거죠. 그 방식들을 골고루 균형 있게 성장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영상이 막 뜨고 있으니까 이제 영상 능력을 키워줘야 되고 책은 됐다. 이렇게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도리어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여러분, 영상 잘 만들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돼요. 여태까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대부분이 텍스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싹 무시하고 좋은 영상을 만든다는 건 만용이에요. 그리고 글도 많이 써보는 게 좋아요. 글이 갖는 특징과는 다른 영상만의 특징을 구현해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요.”
그리고 더 비판적으로, 조금 회의적으로 보자면, 여태까지 우리 사회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나마 제대로 시킨 적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도 반드시 던져야 합니다.
사실 저희 할머니 세대는 텍스트를 처음 접한 세대죠. 간단한 편지를 쓸 수 있다면 그 세대에서는 상당히 글공부를 많이 한 편이었어요. 생각해보면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에 수백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텍스트 중심의 소통체계가 만들어진 건 해방 이후, 짧게 보면 1960~70년대 이후거든요. 길지가 않아요. 1940~50년대 대중이 글을 써서 서로 소통하고 사회적인 논의를 전개했던 건 아니었잖아요. 시민대중이 공론장에서 글을 쓰고 읽기 시작한 게 몇십 년 안 되는 거죠. 폭발적으로 성장한 건 2000년대 중후반 이후고요.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소통, 관계성을 생각하는 문해력을 제대로 가르쳤냐고 묻는다면, 많은 부분 실패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해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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