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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상승과 반학교反學校 문화
1990년대 이전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신분 상승이었다. 사회는 공부를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약속했고,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약속과 믿음이다. 한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사회가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약속이 바로 교육이었다. 학생이 교사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면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 사회가 한 약속이었다.
물론 사회는 약속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약속을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사회는 믿을 수 있는 약속만 하거나, 아니면 약속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줄 여러 장치를 만들어 사람들 주변에 배치한다. 사람들은 이 장치들이 잘 배치된 효과에 의해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 당시에는 공부를 하면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여러 장치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장학퀴즈〉였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하고 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나와 문제 풀이를 겨루었다. 거기서 일등을 하면 학교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고 동시에 개인에게는 큰 명예였다.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장학퀴즈〉를 보며 꿈을 키웠다. 공부를 잘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전국에 알리는 가장 좋은 문화적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치들의 효과는 컸다. 한 동네에서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생이 한 명에 불과할지라도 그 한 명이 있다면 여전히 신분 상승은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동네에도 공부를 잘하는 형이 딱 한 명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형이 서울대 법대에 가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공부를 좀 하는 학생들은 날이면 날마다 그 형의 이름을 들으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 형 자체가 바로 ‘공부하면 성공한다’라는 신화의 장치였던 셈이다. 신화는 이런 장치들을 통해 현실적 힘을 가진다.
신화가 현실적 힘을 가질 때 사람들은 현실을 넘어 가능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1990년대 초반까지 대학 진학률은 2년제를 포함하여 33퍼센트에 불과했다. 3명 중 2명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70퍼센트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정반대였다. 공부를 정말 못하거나 소위 날라리라 불리는 30퍼센트 정도의 학생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70퍼센트의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대학에 갈 성적이 못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그 공부를 하게 한 가장 큰 기제는 강압이었다. 공부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의 학생들은 현실적으로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공부를 했다. 혹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겠지만,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16)의 도롱뇽과 덕선이다. 둘 다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았지만 고3이 되자 어쨌든 한 번 도전을 한다. 첫해에 실패하자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면서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 드라마에는 7수생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처럼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30퍼센트뿐이었지만 공부는 거의 전부가 해야 했다.
신분 상승, 공부의 목적
이들이 공부를 하며 꿈꾸던 것은 단순했다. 신분 상승이다. 공부를 하면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보면, 현재의 교육자본이 미래의 경제자본으로 교환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은 고졸과 대졸 간 임금 격차가 컸다. 어느 정도의 학교를 나오고 어느 레벨의 대학을 나왔는지가 그 개인의 경제적 미래를 결정했다. 1980년대의 경우를 보자. 1985년을 기준으로 학력별 초임 평균을 비교하면, 중졸 임금을 100으로 뒀을 때 고졸 임금은 115, 대졸 임금은 170이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거의 10년 전인 1979년에도 고졸은 115, 대졸은 139였다. 1990년대 들어 이 격차를 일본 수준으로 줄이는 게 국가의 목표였다. 당시의 지나친 교육열이 임금 격차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이라는 교육자본은 한 사람의 경제적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현재의 교육이 결정하는 것은 미래의 경제자본뿐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사회자본이다. 사회자본이란 한마디로 말해 인맥, 즉 그 사람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의미한다. 한국처럼 혈연과 지연, 학연에 얽매인 사회도 없다. 아직도 지방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부터 지역 상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해당 지역의 어떤 고등학교를 나왔는지에 좌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대학의 경우에는,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느 학교에 몇 학번으로 입학했는가였다. 입학한 대학의 이름은 신라의 골품제도처럼 그 사람의 삶에 영원히 새겨지는 신분이 되었다. 지방 캠퍼스를 나온 학생들이 그 신분을 평생 숨기는 일까지 벌어지곤 했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대학 입시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전형적인 학벌 사회였다. 학(學)이 곧 벌(閥)이 되는 사회였다는 말이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배웠는지가 나를 둘러싼 사람들, 특히나 권력이 되고 자원이 되는 사람들의 무리를 결정했다. 그 무리는 완전히 폐쇄돼 있으며 평생을 따라다니는 신분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저항한다는 소위 ‘운동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서울대 출신이 절대다수를 차지했고 연고대가 뒤를 따랐다. 어디에서나 교육자본은 곧 권력을 의미했다.
물론 교육자본이 사회자본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이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교육자본이 달라짐에 따라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이 달라지면서, 자신의 삶의 질도 달라졌다. 교육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이러저러한 위기 국면에서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조언과 충고, 그리고 실제적 조치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갑자기 어디가 아플 때, 전화해서 물어볼 수 있는 의사 친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삶의 질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얼마 전 한 친구가 겪은 일이 이런 경우를 잘 보여준다. 그의 부인이 밤중에 갑자기 두통을 호소했다. 그에게는 즉시 전화를 할 수 있는 의사 친구가 있었다. 그 의사는 증상을 묻고는 바로 응급실로 뛰어가라고 했다. 진찰 결과 가벼운 뇌출혈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늦지 않게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른바 명문대인 연세대학교를 나온 나의 경우도 교육자본으로 사회자본을 만든 대표적인 사례다. 나는 사돈의 팔촌을 뒤져서 의사는 고사하고 대학 나온 사람이 드문 한미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전통적인 사회자본인 친척과 인척에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에 들어간 뒤로 내 주변에는 의사와 변호사 등의 지인이 다수 생겼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전화를 하면 그들은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해준다. 그들의 조언으로 인해 나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을 넘어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언과 충고의 네트워크’가 없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 생길 때 물어볼 곳은 인터넷밖에 없다. 질병과 관련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본 사람들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안다. ‘멘붕’이다. 처음에는 속이 약간 쓰려서 검색을 시작했지만 검색이 계속될수록 그가 얻는 답은 ‘암’이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많아서 잘 안다. 그럴 때 의사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발 닦고 잠이나 자라는 핀잔만 돌아온다.
이런 점에서 공부의 목적인 신분 상승은 그저 경제적인 수준이나 권력 같은 부패한 탐욕만 충족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통해 사회자본을 쌓으면 내 삶의 질이 달라진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처신이 가능해지는 것 또한 중요한 효과다. 이런 것을 통해 그 사람의 경제자본과 사회자본, 그리고 문화자본이 달라진다. 읽는 책에서부터 보는 영화와 듣는 음악 등 교양과 문화가 달라진다. 이 또한 공부를 통한 신분 상승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예측 가능성, 사회적 약속
현재의 교육자본이 미래의 경제/사회/문화자본으로 교환된다는 것이 사회의 약속일 때, 이 약속이 지켜지리라 믿는 것을 ‘예측 가능성’이라고 한다. 내가 하는 행동과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예측 가능성이야말로 한 사회가 사회로 기능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이 자기 행동의 결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게 되며, 그럴수록 그 사회는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책임으로부터 면제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1990년대 이전의 교육에서는 이 예측 가능성이 꽤 잘 맞아떨어졌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완벽하게 한 줄로 세워진 학교에서, 내 성적과 졸업장은 곧 나의 미래였다. 내가 어느 정도 내신에 어느 정도 모의고사 점수를 받는가는 곧 내 학력고사 점수를 예측하게 했으며, 그 학력고사 점수는 곧 내 미래의 월급이자 교양 수준의 상당 부분을 결정했다. 예측이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정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일 정도로 예측 가능했다.
이렇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계산을 하며 살아간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자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인지 아닌지 계산한다. 근대적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인 계산, 즉 합리성은 이처럼 예측 가능성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예측 가능한 곳에서는 계산을 하고, 예측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운명에 자신을 맡긴 채 그 운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하나 알 수 있다. 근대적 계산이란 실은 부정성에 기초한 것이다. 즉, 덧셈을 통해 확실성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뺄셈을 통해 확실성에 다가가는 것이 근대적 합리성이다. 대학 진학과 관련해 생각해보자.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탱탱 놀았는데 3학년에 올라가서 갑자기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럼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해도 안 되는 것, 포기해야 하는 것을 가장 먼저 정렬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해도 되는 것, 그중에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이게 계산이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정성에 기초해야 합리적으로 찾을 수 있다. ‘좋은’ 부모나 교사는 자기 자녀나 학생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게 도우려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너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 하고 싶은 걸 찾아라. 돈 벌고 출세하는 것보다 그게 더 행복한 일이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자아실현이 바로 이런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일찍 발견했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이 말은 사람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 뿐이다. 흔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면 그걸 열심히 노력해서 잘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학생들의 성장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 말과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노력함으로써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잘하고 있는 것 중에서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좀 더 노력해서 그걸 마음에 들 정도로 잘하게 되는 것이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특히 한국처럼 잘하지 못할 때 초기부터 사람을 위축시키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자기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의 범주를 대부분 학교에서 정하고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평가하지 않는 것, 즉 학교화된schooliing 공부가 아닌 것은 아예 잘하고 못하고의 평가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잘하는 게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아예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아무리 다른 어떤 것을 잘한다 해도 자기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반대로,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한 과목만 잘하는 경우보다는 대부분의 과목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잘하는 것들 중에서 특히 더 배우고 싶거나 다루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잘하는 것 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에서 잘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잘하는 것 중에서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학생은 추상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치과의사가 되고 싶고, 그중에서도 어린이 치과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비교적 분명하게, 자기 경험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상당수 학생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잘한다는 평가를 공적으로 받아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런데 그 가장 긍정적이고 확정적인 ‘하나’를 찾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발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확신에 이를 만한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긍정적인 질문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사람을 더 위축시킨다.
이 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 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을 통해 자기에 관한 부정적 앎에는 도달할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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