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에겐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장 저주하는 누군가도 그것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괴물인 내가 또 다른 괴물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끝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를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 첫째, 결론을 말하는 순간 모든 이야기는 시시해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둘째, 그렇게 해야 당신을 이야기에 동행시킬 가능성이 조금은 커지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변명을 하자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1부
1.
그날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 먼저 엄마와 할멈, 다음으로는 남자를 말리러 온 대학생. 그 후에는 구세군 행진의 선두에 섰던 50대 아저씨 둘과 경찰 한 명이었다. 그리고 끝으로는, 그 남자 자신이었다. 그는 정신없는 칼부림의 마지막 대상으로 스스로를 선택했다. 자신의 가슴 깊이 칼을 찔러 넣은 남자는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숨이 끊어졌다. 나는 그 모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2.
첫 번째 사건은 여섯 살 때 일어났다. 징후를 보인 건 훨씬 전부터였고 여섯 살이 되어서야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엄마의 예상보단 꽤 늦은 나이였다. 방심한 탓이었을까.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그날 오랜만에, 실로 몇 년 만에 아빠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제는 당신을 잊겠노라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잊겠노라고, 납골당의 빛바랜 벽을 닦으며 그렇게 얘기했단다. 그렇게 엄마의 사랑이 완전히 끝맺어지는 그 순간에, 철없는 사랑이 가져다준 불청객인 나는, 철저히 잊히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후, 나는 유유히 유치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섯 살짜리 남자애가 집의 위치에 대해 아는 거라곤 육교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육교 위로 올라 난간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아래로 차들이 미끄러지듯 씽씽 달리고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본 게 떠올라 입 안에 침을 잔뜩 끌어모았다. 아래로 지나가는 차에 침을 맞히는 거다. 하지만 내 침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며 몇 차례 계속하고 있자니 몸이 붕 뜬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 뭐하니! 더럽게.
고개를 드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줌마는 제 갈 길을 가는 차들처럼 그 말만 남긴 채 미끄러지듯 나를 지나쳤고 나는 다시 홀로 남았다. 육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나는 방향을 알지 못했다. 어차피 계단 아래로 보이는 풍경은 오른쪽이나 왼쪽이나 똑같이 회색빛으로 차가웠다. 비둘기 몇 마리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새들이 향하는 방향을 쫓아가기도 했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린 뒤였다. 그즈음 유치원에서 배우던 노래는 「앞으로」였다. 그 노랫말처럼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나아가면 언젠간 집에 도착하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집스럽게 짧고 투박한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큰길은 골목으로 이어졌고 골목 양옆으로는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너져 가는 시멘트 벽 여기저기에 알 수 없는 붉은색 숫자며 ‘공가’라는 글자 따위가 적힌 게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아, 하고 작게 소리쳤다. 아,였나, 어,였나. 아아아,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작고 짤막한 외침이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졌고 그 외침은 으,가 되었다가 이이이,가 되기도 했다. 모퉁이 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나는 지체 없이 모퉁이를 돌았다.
한 아이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정신없이 드리워졌다 거둬졌다 하길 반복했다. 아이는 맞고 있었다. 짧은 외침은 그 아이가 내는 게 아니라, 그 애를 둘러싼 그림자들에게서 기합처럼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그들은 아이에게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나중에서야 그들이 고작 중학생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 내 눈에 비친 그림자들은 다 큰 어른처럼 길고 거대했다.
아이는 이미 맞은 지가 너무 오래된 듯 저항을 하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그저 헝겊 인형처럼 이쪽저쪽으로 내팽개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마무리 동작처럼 아이의 옆구리를 내리찍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사라졌다. 빨간 물감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이의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열한 살이나 열두 살, 그러니까 내 나이의 두 배쯤. 그런데도 형이라는 생각은 안 들고 아이인 것만 같았다. 아이의 가슴이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짧고 얕은 숨으로 빠르게 달싹거렸다. 꽤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모퉁이를 다시 돌아 나왔다. 여전히 인적은 없었고 회백색 벽 위의 붉은 글씨들만이 눈을 어지럽혔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작은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 아저씨.
텔레비전에서 「가족오락관」이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대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귀마개를 한 출연자들이 앞사람의 입모양을 보고 단어를 알아맞히는 게임이었다. 전달해야 할 단어는 ‘전전긍긍’이었다. 그 단어가 왜 기억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때 전전긍긍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니까. 어쨌든 젊은 여자 출연자가 자꾸만 엉뚱한 단어를 얘기해서 방청객과 가게 아저씨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결국 주어진 시간이 종료됐고 여자 팀은 그 문제를 놓쳤다. 아저씨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는 다시,
─ 아저씨.
하고 불렀다.
─ 응?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고 나는,
─ 골목에 누가 쓰러져 있어요.
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 그러니?
라고 대수롭잖게 대꾸하곤 자세를 추슬렀다. 텔레비전에선 역전이 가능한 점수 높은 문제를 걸고 양 팀이 대결하려는 참이었다.
─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매대에 가지런히 진열된 캐러멜을 만지작거렸다.
─ 그래?
─ 네, 그래요.
그제야 아저씨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 무서운 얘기를 참 태연히도 하는구나. 거짓말하면 못 쓰는 거야.
나는 한동안 아저씨를 설득한 말을 찾느라 침묵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아는 단어도 별로 없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했던 말보다 더 진짜 같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 죽을지도 몰라요.
했던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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