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추락
더럽게 차갑군.
그는 생각했다. 아주 기분 나쁜 차가움이야. 물맛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데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강물에 몸을 던진다니. 자신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잊은 채 김성곤 안드레아는 생각했다. 죽음 직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하긴. 김성곤은 생각을 고쳤다. 이건 현실이 맞았다. 아주 냉혹하고 더러운 기분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었다.
폐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물을 반사적으로 뱉어내며 김성곤 안드레아는 2년 전에 강 위에 서서 똑같은 결심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차라리 그때 몸을 던졌더라면 지난 몇 년의 수고를 절약했을 텐데. 헛수고로 돌아간, 물거품이 돼버린 그 몸부림들을 말이다.
허우적거리며 물을 들이켜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그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죽기 직전 이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죽으려고 하는데 몸뚱이는 왜 몸부림을 칠까. 마치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다는 듯이. 물론 그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져갔다. 죽음을 향한 감각과 최후의 감정만 남았다.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웠다.
제발. 거의 마지막 숨으로 말할 수 있다면 튀어나왔을 말이다. 제발. 아니, 씨발. 이런 종류의 경험이라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김성곤 안드레아는 간절히 바랐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서 그는 죽지 않는다. 그게 당신이 원할지도 모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식의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김성곤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저 그런 삶을 그저 그렇게 이끌다가 그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사실 뭔가를 나쁘게 바꾸는 건 아주 쉽다. 물에 검은 잉크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쉽고 빠르다. 어려운 건 뭔가를 좋게 바꾸는 거다. 이미 나빠져버린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세상 전체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대단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뭔가를 좋게 바꾸려는 김성곤 안드레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그 고군분투가 따분하게 느껴진다면 그냥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된다. 사실 세상엔 그런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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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 2년 하고도 5일 전.
김성곤 안드레아는 오늘과 같은 위치에, 그러니까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강, 자살자들의 성지인 한 대교 위에 서 있었다. 조금 전 철수한 어느 영화 촬영팀이 두고 간 애플박스 위에 올라서서 그는 자살 방지 펜스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미동도 없이 물을 굽어보았다. 가로등 빛이 닿으면 이따금 반짝였으나 물은 검고 차갑게 일렁였다.
삶도 그랬다. 인생에는 더러 반짝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삶은 어둡고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삶이 종착할 장소로 딱 알맞았다.
김성곤의 삶은 대체로 엉망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인생이 한장의 흰 천이었다면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그 위를 엉망진창으로 내달렸다. 남들과 똑같이 지겹도록 단선적인 무늬 끝에 갑자기 나타나는 여러차례의 두서없는 시도들, 험악하게 구긴 자국과 그 모든 걸 봉합하기 위한 헛되고도 조악한 바느질. 그러곤 오려내고 잘라내고 구멍나고 찢어진, 그래서 더는 그림이라고도 천 조각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게 뭐야, 그냥 버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잡동사니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해도 그 위에 새겨진 것들을 지우거나 구김을 펴거나 그것을 다시 쓸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인생이라면 차라리 가지지 않는 편이 나왔다. 자기 손으로 명을 놓으려는 사람이 그러하듯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되돌릴 수 없다면 놓아버리자. 그것이 내게 가장 적합한 판결이니까.
그럼에도 서러움이 비어져나왔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이기 시작한 거지. 내게도 순수한 시작이라는 때가 있었을 텐데. ‘순수한 시작’을 생각하자 어머니가 두둥실 떠올랐고 순간 김성곤의 가슴은 먹먹해졌다. 그 믿음과 관용의 상징,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 몇 년은 주로 걱정 어린 그늘진 표정이었다. 그 얼굴이 부담스러워 의도치 않은 여러차례의 불효를 저지르는 와중 어머니는 세상을 등졌고 그는 마흔일곱에 고아가 됐다.
김성곤은 눈물을 참으며 숨을 들이켰다. 그래, 엄마는 떠났다. 그렇지만 한명이라도 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의 눈빛을 확인하고 싶었다. 딸 아영이. 얼마 전까지 그를 바라보던 멸시에 가까운 눈빛이 아닌, 미소 띤 아이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는 아영이의 어린 시절 사진을 모아놓은 폴더를 찾으려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러나 헤집는 손가락이 실수로 누른 앱에 뜬 건 시퍼렇게 질려 고꾸라진 주식 차트였다.
띠리리링. 날카롭고 경망스러운 벨소리가 울렸다. 아내, 란희였다. 김성곤은 잠깐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전화가 자신에게 내려진 마지막 동아줄이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거나 다시 잘해보자거나 돌아와 달라거나 우린 할 수 있다는, 그런 식의 말일지도 모른다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대했다. 하지만 귀에 쏟아진 건 악다구니 치는 포화였다.
대체, 라는 단어로 시작한 따발총은 아영이가 저녁때까지 아빠를 기다리며 혼자 밖을 서성였다는 사실을 집중 포격하며 김성곤의 고막을 초토화시켰다. 아뿔싸. 란희와의 별거 후에도 유일하게, 한달에 두 번 있는 아빠로서의 의무 사항을 잊고 있었다. 몇 년 전의 일과 똑같다며, 5학년짜리가 혼자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이나 뱅뱅 돌다가 스스로 경찰서에 갔던 걸 벌써 잊었느냐고 란희는 실패한 아버지인 그를 몰아세웠다. 핑계를 대자면 이유는 있었다. 오늘은 생에 대한 그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날이었고 죽기로 결심한 날이었고 실제로 지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장소에 와 있지 않은가.
그러거나 말거나. 수화기 너머 란희는 지옥에서 강림한 악마처럼 저주를 퍼부었다.
― 당신은 절대 안 바뀌어. 네 박복은 너 스스로 부른 거야. 그게 지금 이 꼴을 만든 거야. 너는 절대 안 바뀌어! 그렇게 살다가 그 꼴로 죽어버려! 꺼져서 썩어 문드러져 버리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엔 단지 남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란희의 처절한 원통함이 실려 있었다. 속속들이 박힌 미움과 절절하게 끓는 증오의 말들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어서 김성곤은 전화를 끊고 아예 전원을 껐다. 대체로 그는 아내의 전화를 그런 식으로 대응해왔다. 심장이 두근댔다.
란희는 원래 착한 사람이었다. 화라는 걸 1부터 10까지 열 단계로 나눈다면 란희의 타고난 성품은 아무리 큰 자극에도 3 이상의 화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란희의 화는 성곤에게만큼은 1에서 100까지 순식간에 뛰었다. 내 잘못일까, 란희의 잘못일까. 성곤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든, 이제 와 무슨 소용이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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