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8년생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나라엔 코가 큰 남자가 한 명 살고 있었다. 그는 퇴역 장군 출신의 머리가 희끗한 남자였는데, 여러모로 결코 예사로운 삶을 살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예순이 가까워지던 무렵, 갑자기 그는 '보통 사람'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담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말을 좋아했더니 자기소개를 할 때도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소개했으며 사람들이 의심이라도 할까봐 말끝마다 믿어주세요, 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시대가 올 거라고 밑도 끝도 없이 말하고 다녔는데, 얼핏 들으면 궤변처럼 들리는 그 말을 등에 업고 놀랍게도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 후에도 그의 행보는 남달랐다. 대표적으로, 퇴임 후 전대 대통령과 나란히 수갑을 차고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보통 사람은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삶을 차곡차곡 살았다.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다. 그전에 벌어진 피, 광장, 투쟁의 흔적은 사진과 다큐에서나 본 겪지 못한 옛날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몇 발자국쯤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몇 발자국이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부당함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당연히 보통 사람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대세에 머리를 조아려 수긍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나는 남들과 달리 몹시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주목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야 하는 세상이 왔다. 나는 하필이면 이 시대에 청춘의 끝자락을 맞이한 숱한 여럿 중 하나이다.
물론 내게도 시작이 있었다. 대부분의 탄생이 그러하듯, 내 삶의 시작도 누군가에겐 두고두고 얘기하는 특별한 추억이다.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엄마는 전국이 호돌이 마크로 도배되고 굴렁쇠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더웠던 여름날을 이야기하곤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펼쳐진 오림픽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전국의 국민들은, 여덟 살 아이가 굴렁쇠를 구르며 드넓은 운동장을 과연 실수 없이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인지를 두 주먹을 꽉 쥔 채 지켜봤다.
연일 경기가 중계됐고 개막식날 성공적으로 굴렁쇠를 굴린 소년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화면을 채웠다. 경기가 이어졌고 밤이면 우리가 살던 중계동의 낮은 빌라 곳곳에서 함성이나 탄식이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엄마는 부푼 배 위에 손을 얹고 소파 위에 길게 몸을 맡긴 채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추가 지난 지 한 달이 넘었건만 덥기는 여전해서 엄마의 손은 얼굴에 바람을 밀어 넣느라 위아래로 하느작거리길 반복했다. 전날 술을 마시고 들어오지 않은 아빠에 대한 화로 엄마의 눈썹은 미간을 향해 가운데로 솟아 있었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사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곧 태어날 뱃속의 아이가 가지게 될 이름에 관한 심란함이었다.
나는 추봉秋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운명이었다. 가을의 정점, 화려함의 극치 따위의 뜻으로, 이북에서 훈장을 하던 친할아버지가 휙수를 친히 감정하여 지은 귀한 이름이었다. 물론 피난민으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친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위인이 못 됐던 삼대독자 아버지의 귀에, 엄마의 볼멘소리 따위야 들어올 턱이 없었다. 엄마는 뱃속의 아기가 추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게 될 미래를 상상하며 비탄에 빠져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아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빠가 위로랍시고 했던 말은 이런 수준이었다.
"그나마 가을에 태어나게 된 걸 행운으로 생각해. 봄이었다면 춘봉이가 될 수도 있었던 거잖아. 고씨가 아닌 것도 다행으로 여겨, 고추봉보단 김추봉이 낫지 뭐."
아빠의 말에 잠깐 갸우뚱하던 엄마는 이내 다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고, 아빠는 애먼 헛기침 소리로 엄마의 울음을 못 들은 척했다. 육십 년대 초에 태어나 배말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에겐 아기의 이름을 예쁘게 짓고 싶은 소망 혹은 로망이 있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엄마가 할 수 있었던 건 제발 내가 딸이 아니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곧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백 미터 경기가 펼쳐지려는 참이었다. 엄마는 조금 전부터 뱃속의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규칙적인 간격이라는 걸 알아채기엔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아빠에 대한 원망과 태어날 아기가 평생 짊어지고 갈 이름을 맘속으로 되뇌며 손톱 주변의 굳은살만 뜯었다. 시아버지는 엄마의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태어날 달을 계산해서 추봉이라는 이름을 남기고는 곧 세상을 떴다. 살아있기라도 하면 협상이라도 해보련만, 저주 같은 유언을 남기고 떠난 시아버지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디서 뭘 하는지 만삭의 아내를 두고 연락도 닿지 않는 남편이 못내 서러워, 기어이 엄마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때,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됐다. 엄마는 떨리는 손으로 본심과 달리 꽤나 공손한 쪽지를,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존댓말로 눌러 썼다.
─ 아가 낳으러 갑니다. 빨리 와요.
엄마는 힘겹게 밖으로 나가 한참을 기다린 끝에 택시를 잡아 무사히 병원까지 이송됐다. 진통이 점점 심해질 즈음 그제야 어디선가 해장술 삼아 낮술을 하고 온 아빠가 벌건 얼굴로 나타났다.
엄마는 고통으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아빠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겸연쩍어진 아빠는 떠듬떠듬 말을 뱉었다.
"벤 존슨이 이겼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싸대기를 후려 맞았다. 하여간 엄마의 진통은 길고도 끈질겼는데 내가 왜 그리 배 밖으로 나오기 싫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홉 달 동안 지내던 엄마 뱃속이 좋아서였는지, 추봉이라는 이름을 갖기가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내가 대면하게 될 세상이 두려워서였는지.
엄마는 꼬박 이틀 동안 진통을 겪으며 초췌해져 갔다. 수술을 권하는 의사의 말에도 엄마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한 가지가 해결되기 전까진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의사는 이런 산모는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둘렀고 아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엄마에겐 고통을 넘어선 초인적인 꿍꿍이가 있었다. 결국 의사가 안경을 고쳐 올리며, 이러다간 산모도 아기도 위험할 것 같다고 했을 때, 엄마는 수없이 애원했던 문제에 대해 최후통첩을 했다.
"죽어도 추봉이는 안 돼. 각서 써."
얼굴이 새하얘진 아빠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이미 죽은 아버지와 곧 죽을지도 모르는 마누라 사이에서 잠깐 고민했다. 결국은 살 사람이 살아야 했다. 아빠는 엄마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 혼미한 와중에서도 의사를 대동한 채, 각서를 썼다.
"나 몰래 출생 신고하러 가면 아기 데리고 도망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거짓말 아냐."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신호가 왔다. 엄마는 책에서 본 대로 흡, 하고 짧고 강하게 기합을 넣었다. 흡, 흡, 흡, 세 번 만에 아기가 세상으로 나왔다. 딸이었다. 엄마는 안도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김추봉이 될 뻔했던 나를 꼭 껴안았다. 어쨌든 내가 폐호흡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쌔근쌔근 잠든 세상의 첫 번째 밤, 엄마의 뒤바뀐 승리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백 미터 금메달리스트는 벤 존슨에서 칼 루이스로 바뀌었다.
그렇게 눈물겨운 투쟁을 거쳐, 아직 산후조리도 채 마치지 못한 엄마가 밤을 새우고 옥편을 뒤지며 고심한 끝에 내가 얻게 된 이름은, 88올림픽을 즈음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가 되었다.
탄생은 드라마틱했지만 그 이후 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는 칼 루이스나 벤 존슨처럼 스펙터클한 대신 오히려 애잔한 쪽에 가깝다.
가령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의 호명에 나 말고 다른 아이가 먼저 대답한다. 그 아이의 이름도 김지혜다. 조금 후 선생님은 또다시 김지혜를 부르는데, 이번에도 다른 아이가 선수를 친다. 얼마 후에 나는 출석부에 내 이름이 '김지혜(다)'라고 쓰여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학창 시절 내내 그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가나다가 ABC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뿐, 주변엔 어디에나 지혜가 산적해 있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심지어 한 반에 지혜가 다섯 명이었던 적도 있는데,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까만 지혜, 통통한 지혜 등, 이름보다 형용사가 구분의 기준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참 색깔이 없는 '작은 지혜'였는데 특별히 내가 작아서라기보단, 큰 지혜가 월등히 컸고 그에 비해 나는 덜 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전국의 지혜들은 역시 전국에 만만찮게 포진해 있는 민지, 은지, 은정, 혜진이 들과, 양념처럼 한 반에 한 명쯤은 포진한 보람, 아름, 슬기 들과 어울려 무럭무럭 커갔다.
새로운 반이나 학원 경품 추첨, 등에서 같은 이름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자를 먹다가 봉지를 뒤집어보면 생산 공장 직원명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고 유명한 연예인의 본명 역시 내 이름이었다. 때로 그건 나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강아지, 고양이 같은 보통명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좀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때로는 그 무수한 익명 속에 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삶에는 그게 더 어울린다.
물론 수많은 입사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특히 가장 가고 싶었던 DM그룹의 콘텐츠 기획부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내가 아닌 다른 김지혜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는 가슴이 쓰렸다. 그러나 이미 체념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게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칼 루이스는 벤 존슨과의 경기에 앞서 멋진 말을 남겼다.
"아직까지 내 앞을 달린 인간은 없다."
이에 벤 존슨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난 남의 등짝이나 보고 달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말은 내게 주어진 대사가 아니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마라톤 행렬 중 어딘가에 속해 있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모두의 틈에 섞여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특별히 슬프지 않다는 것이, 가끔은 담담히 미소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현재의 나에까지, 이르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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