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015년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 사회는 조금 소란스러웠다. 정부는 ‘광복 70년’을 기념하자면서 하루 전인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고, 극장가에서는 1930년대 독립군의 활동을 다룬 영화를 보기 위해, 1,000만 명의 관객이 줄을 섰다. 동시에 일각에서는 ‘광복 70주년’이 아닌 ‘건국 67주년’을 기념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직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는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다.
‘광복 70년’을 맞아 학인學人의 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발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올 초에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다. 이 책에서 나는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출발점으로 8·15 이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싶었다. 그동안 우리는 과연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했는가?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인가? 일제의 비인간적 노예상태에서 한국인들은 과연 어느 정도 ‘해방’되었는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하려 했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 개설서는 아니지만, 공식화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을 담으려 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회의 제반 문제, 특히 보통의 국민들이 지금 겪는 고통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역사적 배경, 국제정치적 맥락과 조건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고 답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 “이게 과연 나라인가? 우리에게 국가가 있는가? 국가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퇴행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작업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세 가지다. 첫째는 한국 근현대사의 기본 과제다. 나는 8·15 이후 한반도는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과 근대화, 사회정의 수립, 인간화의 세 길을 갔어야 했고, 그것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선각자들이 제기했던 개화·독립·민권이라는 세 과제를 동시에 완수하는 길이었다고 본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는 독립과 민권을 이루지 못한 채 개화, 즉 식민지 근대화를 강요당한 것이었다. 8·15 이후 분단으로 우리는 독립(당시에는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의미했다)을 유보하고 또 다른 신개화·근대화의 길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반도는 국제적인 냉전질서의 소용돌이에 들어가 분단, 반공국가 건설, 6·25한국전쟁을 연이어 겪었다. 구한말 이래 일본을 배우자던 사람들이 이제 “미국 따라 배우자”며 노선을 갈아탔고, 그들이 지금까지 한국의 독립과 민권 보장을 유보한 채 개화, 즉 근대화·서구화의 길을 주도했다.
두 번째 쟁점은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이다. 나는 6·25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학살 등에서 드러났던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거꾸로 규정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당시 학살의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한 사람들이 월남하여 대한민국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 가치와 철학은 한국 문화의 전통 혹은 서구의 자유·평등·민주·공화 등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한 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한말 이후 근대화를 위해 조선인들이 받아들인 두 외래 사상,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립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미소 대립이라는 국제정치의 압력에 의해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반쪽인 남한은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며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반공주의)를 택했다. 헌법 위에 군림하는 『국가보안법』과 대한민국의 존립을 책임진 주한미군, 그리고 국가 종교 반열에 오른 반공주의가 사실상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인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압도했다. 여기에 좌익 혹은 북한 공산주의에 의한 피해의 기억이 국가의 기억으로 공식화되면서 대한민국의 주류가 만들어졌다.
1945년 이후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된 한국은 식민지 질서 청산, 자주독립국가 건설, 그리고 민권 보장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유보 혹은 억제하고 냉전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였다. 반공과 반북이 거의 현대판 종교가 되면서 일제 말의 전체주의나 극우 파시즘이 ‘자유’의 이름으로 변형되어 지속될 여지가 생긴 것이다.
한국은 과거사 청산을 통한 일본과의 화해 작업을 포기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로 편입됐다. 남한의 집권층은 역설적으로 북한과의 적대를 먹고 산다. 분명히 새 민주주의 국가는 건설했으나 그 국가에서 통일(독립)·민권 세력이 탄압받고,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민족주의자들까지 모두 제거되었다. 이후 다수 국민의 의사가 기존의 정치 질서나 정당에 거의 반영되지 않고, 일제에 협력했던 엘리트와 반공을 신앙고백한 사람만이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반쪽 국가에서 정의는 실종되고 국민주권은 ‘반의 반’만 보장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앞의 두 쟁점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한국 ‘근대’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서구가 들어오기 전인 18, 19세기에 맹아적으로 생겨났던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 즉 동학농민운동의 신분 철폐와 토지 균등분배·민권·정의·평등·인간화 요구가 좌절되면서, 이후 일본과 서구의 침략과 압박으로 ‘따라잡기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주류 세력은 정치·문화적 주체성을 가질 수 없었고, 국가의 이상을 민족 내부의 논의를 거쳐서 결정하기보다는, 외세와 분단의 압박 속에서 결정했다.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는 바로 이러한 ‘압박 근대’의 산물이었다.
그동안 남한이 이룬 성과는 괄목할 만하고 자랑스러워 할 점도 많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든 배경과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오늘의 남북한이 각각 다른 이유로 심각한 내부 위기에 처했다고 본다. 즉 남북한이 각각 안고 있는 문제는 양국이 별개의 ‘국가’로서 발전 전망을 세워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통일 그 자체가 최종 목표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남한의 ‘반半국가’ 상태, 남한의 국민이 누리고 있는 ‘반의 반’의 주권 상태를 극복하고 온전하게 민권과 정의가 보장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남북한 간의 평화 체제 수립과 통일, 주변 강대국과의 지혜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또한 구한말에 제기되었던 개화·독립·민권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내부 개혁이 필요하고, 동아시아 전체는 물론,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고통에 대한 대안 제시자로서의 시야나 담론도 갖추어야 한다.
나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의 주류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국가를 이끌어왔는가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이 흐름에서 탄압받고 배제된 세력들, 일제하 무장투쟁과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민중의 저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별도의 작업을 요하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주제로 책을 한번 써보라고 권유했는데, 올해가 그런 책을 쓰기에 적절한 시점이었다. 애초에 학술서가 아닌 일반인, 특히 청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을 쓰려고 했지만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과거와 현재의 쟁점을 하나의 흐름 속에 쉬운 용어로 배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분량은 늘어나고 내용도 조금 딱딱해졌다.
이 책을 쓰는 데 수많은 1차 자료와 연구서, 수백 편의 관련 논문을 참고했지만, 주석은 생략하고 독자들이 읽어볼 만한 단행본만 참고용으로 달았다. 1950년대 이후 부분은 나의 이전 학술논문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그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나 구체적인 쟁점 등에 대해서는 내가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착오나 해석상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역사학자 혹은 독자들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이 책의 주요 논지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이 책을 쓰도록 격려해준 선후배 동료 연구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초고를 읽고 좋은 논평을 해준 성공회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신나라, NGO학과 졸업생 정하나에게 감사를 드린다. 아내와 아들도 독자 입장에서 원고를 읽고 날카로운 논평을 해주었기 때문에 계속 궤도 수정을 할 수 있었다. 가족은 이 작업의 최대의 후원자이지만, 동시에 매일 일에 치여 사는 내 입장에서 보면 최대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어려운 출판 환경에도 불구하고 선뜻 책 출간 의사를 보여준 사계절출판사의 강맑실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제자이자 사계절출판사의 전前 인문팀장인 조건형은 출판 섭외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고, 편집자 이진, 이창연은 책의 구성과 방향을 잡는 데 계속 조언과 채찍질을 해주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까지 올 수 있었다. 사계절출판사 편집부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2015년 10월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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