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_ 김동춘
1. 도입
1989년 동서독 장벽의 붕괴와 통일,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로 ‘냉전’ 그리고 그것을 지탱했던 서방 자본주의 진영의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유럽과 남미,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여전히 공산당이 소수파로 남아 있지만 그들이 의미 있는 정치 세력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지구 차원에서 반공 ・ 반소주의가 존립할 근거도 없어졌다. 사실 미국에서는 이미 1954년 매카시 청문회를 정점으로 반공주의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953년 스탈린 사망, 1956년 헝가리와 1968년 체코에서의 반소 대중시위,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와 맞물려 냉전체제는 균열을 일으켰으며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로 일단 한 매듭을 지었다. 미국과 서유럽 각국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 승리를 소리 높이 외쳤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세계는 이제 미국 단일 패권체제로 변했다.
유럽에서 냉전이 종료되었다고 하지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냉전 대신 열전이 지속되었거나, 적어도 유럽과는 다른 형태의 20세기 후반기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북대서양과 유럽의 경험을 지구 차원으로 확대 일반화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지 의문이다Wallerstein, 2010 김동춘, 2012 Heonik Kwon, 2012. 냉전 기간이 ‘긴 평화’라는 개디스Gaddis, 1989의 설명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한반도에서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선포 이전에 이미 공산주의 세력과 반공주의 세력 간의 내전적 정치갈등이 시작되었으며, 냉전이 본격화된 이후 3년간 전면전이 발생했고,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이 기간 동안 열전 또는 저강도 전쟁Low Intensity War, 국가폭력과 억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의 냉전은 식민주의 체제의 청산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이런 이유로 반공주의 역시 미국, 유럽과는 다소 다른 성격과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냉전 자체의 성립은 물론 그 성격에서도 유럽과 달랐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탈냉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공산당 일당독재가 유지되고 있으며, 대만과 여전히 분단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베트남과 북한은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쿠바 사회주의 건설과 지속 또한 서방이 사용하는 ‘냉전’ 개념이 잘 적용되기 어려운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소련 ・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에서 여전히 사회주의가 유지되는 이유도 바로 동아시아에서 탈식민주의, 즉 민족 문제가 냉전의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역사의 종언’이라고 찬양하거나 탈냉전으로 지구는 ‘문명의 충돌’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헌팅턴의 해석 역시 서구중심주의에 입각해 세계의 일부만 읽은 것이다Fukuyama, 1992 Huntington, 1996.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의 붕괴를 예상했던 서방의 언론과학자들, 그것을 그대로 수입한 한국 학자들의 예상과 예측이 계속 빗나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트루먼 독트린은 1947년에 선포되었지만, 미국과 서방 세계에 반공주의를 전면적으로 확산시킨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한반도는 미국과 서독을 포함한 지구 차원의 냉전과 반공주의를 강화시킨 진원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남북한 간의 분단이 70여 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북한과 전쟁 상태에 있는 남한이야말로 탈식민화의 굴절로 생겨난 한반도 내부의 자생적 반공주의와 미국 주도 아래 냉전 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주의가 과거가 아니라 아직 현실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로 작동하는 세계 유일의 장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한국의 반공주의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고, 과거에는 한국과 유사한 분단국가였으나 이제 통일을 이루어 반공주의가 과거의 것이 된 독일과의 비교를 시도했다.
분단의 장벽이 아직 두텁게 버티고 있는 남한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물론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한 사람조차 반국가사범으로 지목되어 정치적 ・ 법적 ・ 사회적 탄압대상이 되어왔다. 국가보안법이 건재하고 있으며 북한과 내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한다는 목표를 가진 국정원NIS,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이 아직 수사권을 갖고 국내 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보수 세력은 정치적 반대 세력에게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고 있으며, 급진적 개혁과 반외세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통합진보당을 ‘친북단체’로 간주해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해산을 결정했으며 이석기 등 국회의원 5명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과거 냉전 시절이나 1987년 민주화 직후 같은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은 없지만, 여전히 반공은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반공 ・ 반북주의는 현실정치, 여론, 법, 정치사회 의식의 분석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테마로 남아 있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 2013년 초 전쟁위기처럼 남북한 간에 긴장이 발생하면 그것은 모든 정치 ・ 경제 의제를 완전히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과거 냉전 시절의 유물인 반공주의를 완전히 넘어서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키기가 어렵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개발이 남한의 안보를 위협했고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에게까지 권력이 3대에 걸쳐 세습되며 김정은이 권력 획득의 일등공신인 고모부 장성택을 갑자기 처형함으로써 북한은 서방 언론에는 과거 아프리카의 야만적 독재자, 이상한 나라의 군주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북한의 심각한 인권침해를 문제 삼는 현시점에 남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반공 ・ 반북 의식은 과거 북한 공포에 기초한 반공주의와는 달리 이제 집단적인 ‘북한 혐오’에 가깝다. 최근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발생한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해 국제적으로 북한 때리기, 북한 혐오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된 지 25년이 지났으나 독일도 아직 완전한 사회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분단의 현장인 베를린 또한 과거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이 충돌하고 있다Verheyen, 2010. 하지만 1950년대 식의 반공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동독의 비밀경찰슈타지, Stasi 건물이나 감옥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함으로써 과거 동독의 공산주의 체제하에 어두웠던 과거를 폭로하고 서독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남북한은 군사적으로 적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엔에 동시 가입해 사실상 두 개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존재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 분단 독일과 매우 다른 상황에 있다. 남북한은 역사 해석이나 공식 기억에서도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이나 기억에서 북한은 그것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공식화하고 있지만 남한은 ‘6 ・ 25전쟁’, 즉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불법 침략에 의해 남한이 일방적으로 유린당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기억한다Amstrong, 2013. 북한의 반미주의, 남한의 반공주의는 각각의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으며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ceasefire이 평화협정으로 아직 바뀌지 않은 현재 남한은 북한의 위협을 상시로 의식하고 있지만, 분단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분단하에서 남한은 어느 정도 민주화와 자본주의 발전을 성취했고 남북한 간의 경제력 격차가 훨씬 크게 벌어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반공주의는 더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남한 역시 탈냉전의 국제정치와 신자유주의의 지구화된 경제질서에 깊이 편입되었고, 중국과의 무역량이 미국과의 무역량을 초과할 정도로 동아시아 경제권에 깊이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남한의 정치 ・ 사회도 과거형의 반공 ・ 반북주의보다는 친시장, 신자유주의 논리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도 과거 서방 국가들이 겪었듯이 이제 반공 ・ 반북주의는 다른 형태의 친자본주의 논리, 즉 시장주의로 변형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한국과 독일의 반공주의를 다루는 여러 글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독일의 과거를 지배해온 반공주의가 정치, 법, 정책, 의식문화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반공 ・ 반북주의는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이고, 독일 역시 과거의 반공주의 문화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날 두 분단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제 내용이었던 반공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다시 정리해보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우익 이념과 우익운동의 위험에 맞서 민주주의를 좀더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2. 한국에서 반공 ・ 반북주의의 특징
2차 세계대전 후 지구 차원의 냉전질서 수립과 함께 미국의 직간접 지원과 영향권 아래 있던 모든 나라에서 반공주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근본을 형성했다. 그러나 탈나치화Denazification와 민주화를 수반했던 독일 등 유럽, 미국의 점령정책이 유럽과 달리 자본주의 일본의 재건에 초점을 둠으로써 전쟁범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천황제도 그대로 지속시킨 일본 그리고 식민주의에 협력했던 세력이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지배계급의 일원이 됨으로써 결국 탈식민화decolonization의 과제가 굴절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소련 간의 긴장, 즉 냉전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매우 제한적으로만 청산하고 그 유산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지속시켰다Buruma, 1995 Dower, 2000. 특히 중국의 반제국주의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전쟁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나아갔고, 이후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구식민지 국가들이 중국과 함께 비동맹 노선에 가담함으로써 사회주의 중국과 지정학적으로 직접 마주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은 미국 반공정책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모든 점을 살펴보면 냉전이 동아시아에서는 유럽과 다소 상이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다르게 개념화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해방 후 남한에서 반공주의는 1947년 미군정의 남로당 불법화, 좌익계 노동운동 탄압정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남한에서의 냉전 또는 반공주의는 사실상 내재적인 것이었고 세계사적으로 보면 독일 파시즘 지배가 후퇴한 이후 내전이 지속된 그리스와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Eve 1982.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반공주의가 대량학살로 연결되었고 전쟁 후 반공주의는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정착해간다. 반공주의는 남북한 간의 정치적 ・ 군사적 대립 상황을 집약하고 있으며 남한의 입장에서는 체제유지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냉전 세계질서를 적극 내면화하는 친미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웠으며, 그런 국제정치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하자는 논리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한국의 군부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과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의 태세를 재정비”한다는 공약, 이 책에 실린 박태균의 논문이 지적한 것처럼 로스토 등을 초청해 적극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 노선을 지지하도록 한 것은 모두 1960년대 이후 미국 주도의 지구적 반공주의의 진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발전development’은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변화된 냉전정책이 제3세계에 적용될 때 그것을 집약한 개념이었다. 당시 박 정권의 북한에 대한 입장도 경제발전을 통해 북한을 경제적으로 앞지르게 되면 체제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남한이 우위에 설 거라는 전제를 갖고 있었다. 즉 지배 세력의 입장에서 반공주의를 경제발전론과 결합시킨 것은 적어도 1987년 군부정권의 붕괴 시점까지는 유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60년대 이후의 반공주의는 북한의 남조선혁명론, 끊임없는 간첩침투에 의해 정당화되고 재생산되었는데, 이는 1950년대 독일에서 동독의 사통당SED이 서독의 공산당KPD에 영향을 주어 그것이 독일의 반공주의를 강화시킨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독일의 경우 1968년 혁명과 신좌파의 등장으로 냉전 지배구조와 반공주의가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오랜 군사독재 기간의 민주화운동 세력도 분단체제와 미국 의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반공주의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1987년 민주화와 1989년 소련 ・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흔들리지 않은 채 존속했다. 한국의 경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직후, 즉 해방 정국에서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정치 ・ 사회운동이 등장했으나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거의 불법화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과거 독일과 달리 사회민주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 그룹이 우익보수 세력과 대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반공주의 이념을 견지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즉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밑에서 중도 또는 좌익의 입장을 취하되 북한과는 선을 그은 정치 세력도 거의 존재할 수 없었고 사회민주주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반북 ・ 반공주의 노선을 걸은 조봉암 같은 정치가까지 처형당하고 말았다. 물론 우익반공의 입장을 가지면서도 전체주의에는 비판적인 급진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liberitarianism와 같은 노선을 견지한 정치가나 사상가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박태균, 이하나, 김정인 등 몇몇 필자가 주장하듯 한국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은 반-반공주의, 즉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우익반공 세력의 반민족성을 비판하는 점, 또한 민족주의나 (자유)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그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양상을 지녔다. 그것은 한국 반공주의의 주력이 필자가 이 책의 앞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과거 친일, 지주 세력의 주도로 주창되었고 그들이 해방 이후 민족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보다는 오히려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맥락은 다르지만 서독에서도 1968년 혁명과정에서 나치 체제와 이후 서독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독GDR 체제나 공산주의의 입장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서독식 반-반공주의, 즉 신좌파의 노선 또는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즉 서독에서 반공주의 비판은 소련과 공산당에 대해서는 분명히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되 냉전과 반공주의가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을 위반하는 점을 주로 비판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 이후 수정주의 학파에서 냉전 초기의 전통적 반공주의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냉전반공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점에서 과거의 독일과 미국, 한국에서의 반공주의 비판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즉 우파들이 국가, 자본주의 체제, ‘애국심’을 거론하면서 역공을 취할 경우 방어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8혁명 이후 체계적인 탈나치화를 추진한 서독과 달리 한국에서는 헌법에서나 기타 법령에서 극우파시즘의 주장이나 행동을 처벌하고 견제할 만한 조항이 없다. 즉 반공주의는 과거 파시즘이나 군사독재, 심지어 대량학살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임에도 공공연하게 쿠데타를 선동하는 극우 세력의 언술이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한국에는 없다. 즉 자유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준수하려면 좌익 극단주의와 함께 우익 극단주의도 견제하고 그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할 위험을 막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는 좌익진보 세력에 대한 처벌은 이중 삼중으로 이루어지지만 극우 세력의 어떤 반사회적인 발언이나 행동도 처벌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공주의의 구호를 내건 군사쿠데타가 두 번이나 발생했고 그에 앞서 한국전쟁기 반공의 이름으로 정부가 민간인 대량학살을 저질러도 그들을 제대로 단죄할 수 없었다. 또한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이 수없이 자행한 국가폭력, 간첩조작이나 의문사, 고문 등 중요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정보기관을 없애거나 그 기관의 권한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결여되어 있다. 이런 한계로 말미암아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국가의 안보위기, 즉 반공과 반북주의의 명분으로 얼마든지 제약되거나 정지될 수 있었다.
한편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나 미국에서는 우익의 사상과 운동 중에서 반공주의가 인종주의, 낙태, 동성애 문제 등과 결합된 사회적 보수주의와 병존했으며 탈냉전 후에는 후자에 좀더 강조점이 두어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도 민주화 이후 이런 사회적 보수주의의 흐름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김동춘, 2014. 그러나 한국의 경우 과거나 현재나 시민사회 차원에서 자생적 반공주의나 보수주의가 형성되기보다는 주로 국가 이념, 국가기관 자체가 이념과 정책의 최종 유포자가 되고 집행자가 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기무사), 검찰 등 공안기관이 주로 그 역할을 담당했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검찰과 보수언론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반공 ・ 반북 히스테리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북한 관련 정보는 물론 국내 반체제 비판 세력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국정원이 이 모든 반공 ・ 반북 선전과 대적심리전 수행의 선두에 서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고, 이 점에서 한국의 반공주의는 그 주체에서 보면 과거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와 유사하며 자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대공수사기관의 존립과 권한 남용, 불법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바로 한국의 분단 상황이다.
극단적인 흑백논리, 종교적 근본주의 입장에 서서 모든 세력을 ‘적’과 ‘나’로 구분한다는 점에서 반공주의는 정치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일종의 유사종교, 문화, 심리적 태도에 가깝다. 물론 미국은 파시즘을 겪지 않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안전장치가 있으며 반공주의가 학살과 대규모 국가폭력을 불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매카시즘하의 미국이나 1950년대 독일에서 모두 공산주의의 위험을 과대 포장하거나Boyer, 2010, 공직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는 물론 국민 전체를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험대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우익 세력의 공포와 위기의식이 만성화되어 있다는 점, 우익 세력이 국가권력과 거대 상업미디어의 힘에 편승해 국가나 사회 전체를 반공 히스테리의 회오리바람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Kovel, 1994.
미국의 경우 1950년대의 매카시즘이 한풀 꺾인 이후 더 이상 과거 형태의 반공주의가 재연되지는 않았으나 1980년대 레이건 집권 초기, 2001년 9 ・ 11테러 이후에 이런 국가 주도의 ‘좌익사냥’이 부드러운 형태로 재연되었다.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그 이후 미국의 문화나 정치사회 그리고 민주주의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가 1968년 혁명을 통해 전면적으로 비판되는 계기가 있었고Haynes, 2000, “비루한 행태이자 광기”라고 비판을 받았다. 독일도 68혁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반공 ・ 반동독의 정치 분위기는 변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 그리고 1972~1979년의 유신체제에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시기, 1991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방북 전후, 김영삼 정권기 김일성 사망 시 조문 파동, 김대중 정권기 정권에 진입한 민주인사들의 전력과 사상을 문제 삼은 빨갱이 공세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의 이석기 등 통합진보당 당 간부들의 내란음모사건 등 1950년대 식의 반공주의의 광기가 여러 번 반복되어왔다. 그리고 이 반공 ・ 반북주의 히스테리는 거의 우익 정치권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수사정보기관과 보수언론이 합작해 진행된 점이 그 특징이다. 물론 북한 체제를 경험했거나 한국전쟁기에 북한인민위원회의 체험을 가진 기성세대가 존재하고 이후에도 한국 국민들이 북한의 게릴라 침투, 연평도 포격 등 호전적인 태도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이처럼 위로부터의 반공 ・ 반북주의 선동이 먹혀들어간 셈이다.
히스테리로서 반공주의는 모든 사람을 ‘적과 나’로 구분해 내부의 적을 색출하는 광기의 정치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이 경우 공산주의에 관용적인 자유주의자까지 좌익으로 몰아붙이게 된다. 냉전 초기, 특히 미국의 매카시즘 시기에는 소련이나 국내 공산주의에 분명히 선을 긋지 않는 자유주의 세력까지도 공산주의의 앞잡이라고 공격했으며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자유주의나 노동운동의 자기검열은 결국 자유주의 세력이나 노동운동의 정치사회적 입지를 위축시키는 역할을 했다.5 즉 반공주의는 처음에 국가의 ‘내부의 적’ 사냥하기 논리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이제 언론이 주도해 시민사회가 스스로 적을 찾아내는 캠페인으로 확산되고 나중에는 모든 구성원이 자신이 국가나 사회가 지목한 ‘적’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며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김동춘, 2013. 반공주의가 사회 내에서 자기검열의 논리로 착근하게 될 경우 모든 구성원은 국가나 이웃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어떤 정치적인 비판 발언이나 행동도 자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위로부터의 통제가 없더라도 반공주의가 사회에 침투하고 착근하여 전체주의의 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파시즘, 독재, 권위주의 지배가 물리적 통제 없이 유지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특히 광주 5 ・ 18학살을 겪은 이후 반공주의의 비판 흐름이 반미주의로 나아가기도 했고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이후 과거 청산 작업을 통해 과거 반공주의의 폭력성과 인권침해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공식 기억이 계속 재생산되고 국가보안법과 국정원의 정치적 개입이 엄존하는 상태에서 반공주의 ・ 반북주의 이념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정치 세력이나 사회운동이 나오기는 어려웠다. 즉 한국에서는 독일에서의 나치 청산, 미국에서의 매카시즘 비판과 유사한 형태의 전면적인 반공주의 비판과 광기의 역사에 대한 정리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쿠데타, 우익독재, 인권침해, 간첩조작을 정당화하는 담론이 거침없이 통용되고 있으며 과거의 국가범죄에 가담했던 세력이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거나 다시 정권 핵심부로 들어갔다. 이런 반공주의의 지배는 진보정당의 진출과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제약하는 것은 물론 재벌의 경제력 남용이나 과도한 사회적 지배에 맞서는 운동과 사회정책 논의의 폭을 제한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즉 반공주의는 한국에서 우익보수 세력의 가장 중요한 ‘정치자본political capital’으로 남아 있다.
3.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익보수주의: 반공주의의 진화와 변화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세계의 정치사회 지도는 다시 그려졌다. 미국의 단일패권이 확립되었고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이 이제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동서독 통일 이후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의 역할이 커졌고 유럽연합이 과거 동구권까지 확대되었다. 소련연방이 해체되면서 주변 국가들이 독립했고 유고연방의 해체는 냉전하에 잠복해 있던 인종 ・ 종교 간의 갈등을 폭발시켜 급기야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이어졌다. 9 ・ 11테러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고 과거 이래 지속되는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과 함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에서 국지전이 계속되었다.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의 재스민 혁명으로 독재자들이 물러났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국제적 위상 증대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도전받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간에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와 맞물려 동북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아주 위험한 지경까지 나아가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에서의 정치갈등과 미국 ・ 러시아 간의 충돌, 러시아의 군사력 동원으로 새로운 형태의 냉전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즉 소련 ・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전파되었던 ‘자유주의 최종 승리’, ‘역사의 종말’, ‘문명충돌’론은 과거의 ‘냉전’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구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런 이유로 또다시 실제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01년 9 ・ 11테러 이후 미국은 과거의 공산주의 대신에 이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새로운 악마로 몰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유럽의 주요 국가들도 대체로 미국의 그런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다. 남미 여러 나라에서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이 선거를 통해 들어서기도 했는데, 얼마 전에 사망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쿠바의 카스트로를 이어받는 21세기형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남미의 이런 사회주의 정권도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거부하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소련 ・ 동구권과 같은 스탈린적 사회주의 국가로 되돌아가려 하지는 않고 있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행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1989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지구화가 가속화되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의 지배적 가치, 이념,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영미식의 유연화된 자본주의는 거역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자본의 세계화는 국가 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전 세계 대부분의 노동자를 고용불안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과 서구에서는 공산주의라는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냉전구도하에서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냈던 각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조직 노조, 사회운동 단체까지도 모두 이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압도당해 약화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적이 사라진 자본주의’는 더 거침없이 나아가 이제 지난 100여 년간 인류가 투쟁을 통해 얻어낸 민주주의의 소중한 성과까지 위협하는지경에 이르렀다. 즉 탈규제와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는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고 모든 피고용자를 고용불안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대자본에게 막대한 부가 축적되었고 불평등이 심각해졌으며 CEO의 연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졌으나 대다수의 노동인구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신음하고 있다.7 그 결과 국가 간 격차보다는 국가 내의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후발국에서 밀려온 노동이민자들이 하층 노동시장을 채우게 되자, 국가 내에서 인종차별이 더 심각해졌다. 2008년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사태,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국가부도 사태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일대 타격을 입었으나 미국의 대량 긴급 재정지출과 양적 완화 조치로 일단 봉합 국면에 들어섰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잠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증가한 적이 있으나, 곧이어 대부분의 나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과거 상태로 돌아갔다. 즉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반영하는 노동계급의 조직화는 전통적 노동계급의 현저한 축소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판명이 났으며Therborn, 2012, 대항적 이념이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불평등, 높은 청년실업률, 빈곤과 늘어나는 범죄는 비조직화된 저항의 일종으로 체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참여나 조직화된 사회운동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종교적 근본주의와 테러, 폭력, 새로운 극우보수 사회운동, 외국인혐오증Xenophobia, 인종차별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Blee et al, 2010. 통일 후 구동독 지역에서 과거 사회통합당의 후신인 민사당이 일부 지지를 얻고 있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은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현재의 자본주의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으며 좀더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 사회주의 실패 경험 때문인지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없다. 즉 고삐 풀린 자본주의는 각 나라 내에서 심각한 불평등과 갈등을 일으키고는 있으나, 조직화된 사회주의 운동을 불러오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반공주의, 반사회주의 이념이 다시 동원될 명분이나 여지는 거의 없다. 단지 미국이나 남미 국가들에서 범죄가 점점 심각해지자 이에 맞서 점차 ‘치안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Waquant, 2009,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국민 일반에 대한 사찰이나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해지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의 국민통제 기능은 약화되기보다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불평등은 정당정치를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앞서 스첼의 머리말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반공주의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났다. 특히 러시아혁명 등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운동이나 사상이 등장한 이후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소련의 위협을 과장하는, 냉전기에 미국의 외교 노선과 국내 정치의 원칙을 집약해주는 용어였지만, 유럽에서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일단 유럽에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반공주의가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가져온 모순이나 위기에 대한 반발 또는 저항도 종교적 극단주의, 테러, 인종차별, 사회적 보수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그것에 소외된 사람들의 집단적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의 기치하에 ‘증오범죄’나 제도적 차별은 계속될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과거 국가 차원의 반공주의는 이제 복지국가 확대, 증세, 노동운동, 보편적 의료보험 요구 등을 비판하는 시장 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의 형태로 나타났다. 오늘의 반공주의는 이제 탈규제, 반복지, 시장주의, 개인주의, 국가불간섭주의, 자유지상주의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신자유주의의 반사회주의, 반공주의 이념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과거 신자유주의 경제사회 사상가들에게서 구해지고 있다.
한국의 반공 ・ 반북주의도 오늘날 서구의 발전된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점차 시장주의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특히 노조활동 자체를 아주 혐오하거나 대기업 노조 자체를 ‘귀족노조’라고 공격하거나 민영화 반대, 복지나 증세 요구 등을 모두 싸잡아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상당수 경제학자들과 전경련 산하 연구소나 삼성경제연구소 등의 기업연구소가 이런 이념을 생산하고 주요 보수신문들과 방송이 그것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반공 ・ 반사회주의는 과거와 달리 공안기관에 의해 일방적으로 유포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선전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내면화되고 있다. 한병철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개발의 논리, 경쟁질서의 내면화, 개인주의화는 사람들을 ‘자기착취’로 몰아가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효과적인 친자본주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한병철, 2012.
물론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냉전반공주의를 유지했던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간첩조작으로 악명을 떨쳤던 국정원 등 공안기관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미국도 9 ・ 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국가안전보장국NAS, National Security Agency이 미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수상과 대통령의 대화까지 감청하는 등 냉전적인 통제방법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지구적 불평등에도 과거의 사회주의와 같은 대안적인 이념이 형성되지 않음으로써 빈곤대중과 실업청년들은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처럼 국가나 사회의 구체적 개혁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저항의 형태를 보여준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치안국가’로의 변화는 불안한 상태에 놓인 대중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한국에서 과거의 반공주의나 오늘의 시장근본주의는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말한 일종의 문화적 폭력의 성격을 갖고 있다Galting, 1975. 국가나 시장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낙인을 찍고 그들의 정당한 항의나 문제제기를 힘으로 눌러 제압하거나, 미디어나 공론장에서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즉 인종주의, 종교적 근본주의와 함께 반공주의와 시장근본주의는 사회적 소통과 화합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다. 과거에는 국가의 국민통제를 위한 이념으로 반공주의가 정당활동이나 사회운동,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장벽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가 유사종교와 같은 성격을 갖고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내면화되어 시민참여를 억제하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위축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민주주의의 결핍Bauman, 2013”은 한국뿐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근대사회에 존재하는 전근대적인 폭력과 배제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난 2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피 흘려 쟁취한 이 문명이 또다시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과 독일의 반공주의 연구를 통해 한국과 독일의 정치사를 다시 검토해볼 수 있었으며, 오늘날 반공주의가 한국과 독일의 정치사회에 남긴 상처나 그 유산을 극복하고,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현재진행형의 반공분단체제를 넘어서서 평화통일을 완수하고 정치 ・ 경제 ・ 사회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반공주의의 역할은 무엇인가?과거 반공주의는 왜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어떻게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반공주의자가 되는가?반공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교육이나 교조 주입, 두뇌 세탁, 테러의 역할은 무엇인가?물질적 유인은 어떠한가?어떤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 문화적 조건을 만들어야 하는가?권력관계나 지배는 어떠한가?
앞으로 이런 주제에 대한 개인적 ・ 집단적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아직도 20세기적 반공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정치경제 민주화를 위해 반공주의에 대한 연구가 더 진척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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