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서구 중심주의 사회학을 넘어
1980년대 민족적·민중적 사회학의 도전
지난 1980년대는 분단 이후 남한의 지식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변동의 물결이 몰아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북한의 공식적인 기록문건이나 연구서가 남한 학자들에게 읽혀서 비교적 공식적인 석상에서도 공공연하게 논의된 사실이나 민족 통일의 전망과 방법론,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격과 변혁의 전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진보적 사회과학 이론이 도입·적용된 사실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진보적 방법론 혹은 학문 지향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표현이 등장한 이유는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남한의 정치사회적 조건이 지극히 기형적이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전개되어온 남한의 사상 이데올로기와 사회과학은 남한의 정치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존속해온 것이다.
혹자는 소위 진보 측의 문제 제기를 서구의 지성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대안 없는 비판주의, 혹은 하나의 유행병 정도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문의 현실적 토대인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기존 사회학의 풍토를 생각해볼 때 ‘민족적·민중적 사회학’이란 표어는 서구의 사회과학이나 사회운동의 이념 전개 과정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실험이자 문제 제기임에 틀림없다. 서구 사회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판단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1980년대 이전 사회학의 전통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사회를 설명하려는 그 이전의 노력에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1960년대, 1970년대의 사회과학자들도 우리 사회는 서구사회와 다른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편’의 절대적 우위에 입각해서 그것의 한 변종으로서 ‘특수’를 사고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왜곡된’, ‘기형화된’, ‘제한된’ 형태로서 한국 사회와 그 재생산의 원리를 설명했으며, 보다 정상적인, 바람직한, 이상적인 형태로 진입해야 할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했다. “왜곡된 것을 바로잡으라”는 것이 가장 강력한 비판의 무기였다. 우리는 모두 장밋빛 미래, 즉 국민소득 1,000달러가 가져올 선진조국의 미래상을 효과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1980년 광주에서의 총성과 대살육은 우리의 이러한 소박한 이론적 ‘무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서구식 시민사회가 형성된 적이 없어
새로운 이론적 무기를 당장 고안해낼 경험도 역량도 부족했지만 기존의 무기에 대한 회의를 제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회현실을 설명하는 데 우리의 조건과 맥락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쉽게 사용해온 시민사회의 개념을 새롭게 접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은 ‘보편’과 ‘특수’의 대립 혹은 식민지 경험이 우리의 의식 속에 각인해놓은 그릇된 ‘보편성’의 가정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부해온 ‘사회’는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이며, 그중에서도 사회의 지배질서와 계급 간 대립의 개념을 사상捨象한 문화적·도덕적 질서로서의 사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요소로서 ‘폭력’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 성원의 도덕적 합의에 비해서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지배자와 지배집단은 그 성립 기원이나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물질적 토대의 분석을 통해 비판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시행한 한두 가지 정책, 그 질서에 대한 성원들의 지지 정도 등 경험적인 사례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사회학에서는 ‘국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국가가 시민사회를 압도하여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극도로 제한해왔는데도, 이론의 지평 속에서는 국가가 그저 시민사회를 도와주고 관리하는 자애로운 후견인 정도로 간주되었으며, 시민사회 내부의 문제는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역량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하여 다양한 처방을 내렸다. 실로 국가를 문제 삼지 않는 사회학은 국가의 자애로운 후원을 받았다. 그것은 국가 자체, 혹은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문제들에 대해 실천적인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학문적인 발전도 어느 정도 성취해낸 것이다.
사회적 갈등이 부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갈등도 식민지의 초과 이윤 덕택에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까지 포섭해낼 역량을 갖춘 선진자본주의의 그것처럼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동자들은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지 말 것이며, 사용자나 국가도 “갈등이 사회 발전에 기능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여 갈등을 제발 죄악시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국가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중립적인 중재자로서 처신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갈등의 본질이 지배자들의 도덕적 결단이나 피지배 계층의 자제심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이러한 호소는 양측을 분명히 감동시켰을 것이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 요구는 자제되었을 것이다.
사회학의 이러한 성격과 그것이 갖는 한계에 대한 회의는 ‘도덕적 개인주의’로서의 객관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기존 서구 사회학의 철학적·방법론적 기반에 대한 문제 제기다. 경험적 현상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접근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그 재생산의 구조, 변혁의 전망을 조망할 수 없다는 생각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 것은 몇몇 연구들의 관념의 고안물은 아니었다. 사회학은 ‘시민사회의 해부학’,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모순과 그 재생산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사회학의 지적 전통이 새롭게 주목되었다. 또한 사회학이 특정 정파나 계급의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대상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철회되었고, 이론 작업에서 당파성의 견지가 피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소외 계급의 변혁주체로의 성장을 돕기 위해서 강하게 견지되어야 할 자세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사회를 물질적인 토대로부터 이해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재해석의 과정이었다.
사회과학이 시민사회의 해부학, 그 한계와 해체의 법칙을 밝혀내는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뿐더러, 서구 사회의 지적 흐름에 비추어보면 구태의연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현재 서구의 사회과학은 구체적인 방법론을 둘러싸고 논의를 저만큼 진전시켜놓았다. 즉 『자본론』의 서구 사회 해부학의 방법론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나 실천가는 서구 사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실천적 활동과 경험의 맥락 속에서, 철학적인 전통의 연장선에서 나름의 ‘이론적 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론들의 현실 설명력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 제기가 ‘이미 극복된’(?) 구태의연한 논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인식의 전환이 갖는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적 현실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 제기의 당사자들은 ‘구체적 현실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들을 유행병 환자라고 비난할지도 모르는 기성 학자들의 후배요 제자이기 때문이다. 즉 특정의 방법론이나 이론의 발생과 성장을 그 객관적 토대로부터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뽐내는 세련된 이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회현실의 일차적인 우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을 치장할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는 이론에 불과한 경우가 흔하다. 중요한 것은 당파성의 주장이나 ‘시민사회의 해부학’으로서 사회과학의 자기정립의 주장이, 모든 사회적 갈등의 근원이 자본주의적 생산 제 관계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1980년대의 사회현실에 대한 실천적 고민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무기를 ‘도덕적 개인주의’의 철학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철학적 입장의 전환이 이론적 전통이 결여된 척박한 ‘냉전’의 토양에서 발생했다면, 그 이론의 내용은 세련된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원칙주의나 교조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바로 ‘민족적’, ‘민중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뜻밖의’ 사회학(?)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사회운동의 발전에 편승하여 이러한 사회학을 추구하는 집단은 기존의 학문사회에서는 학문적이지 않다고 배척된 논리나 방법론을 거리낌없이 주장했다. 그리고 기성 사회학의 자기반성을 촉구했다.
물론 반성과 고민은 과거와의 지적인 단절을 강조하는 새로운 세대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학문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직업적 학자나 지식인도 어쩌면 ‘고민을 낳는’ 사회현실의 더 큰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이들의 고뇌 어린 고백을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속에서는 서구식 시민사회가 형성된 적이 없다. 즉 ‘국가’와 ‘사회’가 미분화된 채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라고 하는 어떤 정치적 실체와 뚜렷이 구별되는 이른바 시민 세력의 실체인 사회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다. 아직까지 이 같은 시민사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려 성장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 사회학은 시민사회가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현상을 연구해온 셈이다. 즉 정치 및 행정현상, 인구현상, 경제현상, 과거의 역사적 재료 등을 연구 대상으로 삼거나 통계학, 조사기술이나 방법론 등에 전념해온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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