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림은 바탕이 먼저 있어야
자하가 여쭈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방긋 웃을 땐 붉은 빛 돌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흑백이 분명하니 바탕을 채색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바탕이 있고 난 뒤의 일이다.” 자하가 물었다. “예는 나중이라는 뜻인지요?”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일으켜주는 이는 상이로구나! 비로소 함께 시를 이야기할 만하다.”
子夏問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 『논어』, 「팔일」 -
자하는 공자가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던 제자로 자공과 함께 함께 시詩를 이야기할 만하다고 인정받았던 제자다. 그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는 영화를 누렸지만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실명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 자하가 공자에게 시구의 뜻을 물은 대목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시를 이미 산일된 일시逸詩라고 하지만 ‘교소천혜巧笑倩兮 미목반혜美目盼兮’ 이 두 구만은 지금 전해지는 『시경』 위풍衛風의 석인碩人에 수록되어 있다. 석인碩人은 아름다웠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남편인 장공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장강莊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다. 시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손은 부드러운 삘기 같고 살결은 엉긴 기름덩어리 같고 목덜미는 굼벵이 같고 이는 박씨마냥 가지런하고 매미 머리에 나방 같은 눈썹에다 방긋 웃을 땐 붉은 빛 돌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흑백이 분명하다
手如柔荑 膚如凝脂 領如蝤蠐 齒如瓠犀 螓首蛾眉 巧笑倩兮 美目盼兮
미인을 노래한 시라고 하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미인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삘기라는 게 어떤 풀인지, 기름 덩어리가 얼마나 매끄러운지, 굼벵이의 살결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박씨가 얼마나 가지런하고 이쁜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다가갈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주나라 사람들에게는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사물이기 때문에 장강의 아름다움이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꼭 이 시 뿐 만 아니라 시경의 시는 대부분 흥興이나 비比라고 하는 비유법을 통해 사물을 노래했다. 이른바 사물을 빌어서 자신의 뜻을 붙이는 탁물우의託物寓意의 수법이라 하겠는데 이런 방식은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본 경험이 있는 독자들에게 적절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같은 사물이라도 문화적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때문에 석인시가 지금의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때로 절대유가인絶代有佳人 같은 절대絶對의 표현으로 상대적인 비유를 단번에 넘어 버린 두보의 가인佳人 같은 시는 일체의 비유를 던져버리고 논리적 극한에 이르는 표현으로 뒤의 시인들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세상에 다시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 絶代有佳人
텅 빈 골짜기에 조용히 살고 있네 / 幽居在空谷
스스로 양가의 딸자식이라 하나 / 自云良家子
영락하여 초목에 의지하고 있네 / 零落依草木...
하지만 이런 표현은 한번 쓰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다시 쓸 수 없다는 점에서 생명력이 짧은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표현을 만나는 사람마다 남발했던 김정희 같은 이도 없진 않지만.
아무튼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서열화된 표현은 없었고 그저 뭐 같고 뭐 같다는 직접적인 비유를 통해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런데 막상 그 ‘뭐’란 게 뭔지 모른다면 시가 감상될 리가 없다. 이를테면 굴원이 쓴 이소경도 마찬가지다. 사마천이 글에 향기가 난다고 했는데, 그저 문장이 아름답다는 뜻만이 아니다. 이소경에는 향기로운 풀이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 풀을 아는 사람이 읽으면 실제로 향기가 느껴진다. 굴원의 시가 초나라 사람들에게 애호되었던 이유는 그처럼 비유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의 제자 자하 또한 그런 비유에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니 공자로부터 문학에 뛰어났다는 칭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이야기할 만하다는 칭찬까지 받았던 것일 게다.
조선의 박지원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일찍이 시골 사람과 같이 잘 때 그 사람이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코고는 소리가 휘파람을 부는 듯, 탄식을 하는 듯, 천천히 숨을 쉬는 듯, 불을 부는 듯, 물이 끓는 듯, 빈 수레가 덜컥거리는 듯 한데 들이쉴 때에는 톱을 켜다가 내쉴 때에는 돼지처럼 씨근거렸다.”
또 비유를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김려 같은 시인도 있다. 시골 처녀 방주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앞에서 바라보니 관세음보살, 뒤에서 보니 석가모니불 / 前瞻觀世音 後眺釋迦尊
아무튼 이런 비유를 이해해야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자하의 물음은 비유에 관한 것은 아니고, 흰 바탕을 채색으로 삼았다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그리고 그 물음에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답했다. 그런데 이 회사후소繪事後素 어떤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 ‘후소後素’를 ‘후어소공後於素功’으로 풀어야 할지 ‘후가소공後加素功’으로 풀어야 할지 지금까지 논란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소素가 바탕을 비유하기도 하고 예禮를 비유하기도 하기 때문에 뜻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주희는 “후소는 바탕이 있은 뒤를 말한다後素 後於素也”고 했다. 주희의 견해를 따르면 회사후소는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바탕이 있고 난 뒤의 일이다.” 고 번역해야 한다.
그런데 전한의 정사농과 후한의 정현은 정반대로 풀이했다. 『주례』 고공기 주에 보이는 정사농과 정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무릇 그림을 그릴 때는 먼저 온갖 채색을 칠한 뒤에 흰 색을 그 사이에 뿌려서 문채를 이룬다
凡檜〔繪〕先布衆色 然後以素分布其問〔間〕
이 견해를 따르면 “그림 그릴 때는 맨 마지막에 흰 색을 칠해서 마무리한다.” 고 번역해야 한다.
이 부분의 해석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의 학문전통은 주자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주자의 해석을 따라 충신의 아름다운 자질이 먼저고 예는 이차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왔고, 고학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는 정현의 견해를 따라 아름다운 자질보다 예가 우선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현대의 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한국의 논어 번역가들은 대체로 주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고, 일본의 학자들은 정현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아직 어느 견해가 옳은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에 중국 장사에서 마왕퇴 한묘가 발굴되면서 정현의 견해가 옳다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히라오카 다케오平岡武夫가 번역한 논어에서는 마왕퇴에서 발굴된 한 대의 채색에서 흰 색깔이 맨 나중에 입혀졌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하여 흰 색을 나중에 칠한다는 정현의 주석이 옳다는 견해에 힘을 실었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의 견해를 살펴보면 주희의 해석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를 남겼는데, 논어 주석사에 빛나는 탁월한 저술이다. 그래서 정약용의 견해는 어떤가 싶어서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는데, 이런 논란에 이렇다 할 언급이 없어서 이상하게 여기다가, 이 내용은 본디 시경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므로 논어주에 나오지 않고 시경강의에 나오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시경강의』는 정조가 시경을 읽고 질문 800여개를 뽑아서 정약용에게 답하라고 던져 주어서 쓰게 된 저술이다. 그래서 찾아 봤더니 『시경강의』에는 해당 부분에 대한 주석이 없고, 『시경강의보유』에 회사후소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가 실려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정현의 후소後素에 대한 풀이는 주례 고공기의 문장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고공기의 주가 본디 잘못 풀이한 것이다. 지금 본문을 상고해보면 백색白은 백白이라 했고, 흑색黑은 흑黑이라고 표기하고 있을 뿐 백색을 소素라고 표기한 것은 없다. 무릇 채색으로서의 백색은 모두 백白이라고 표기했으니 이른바 소공素功이라는 것이 어찌 백색을 일컫는 것이겠는가? 소공素功이라는 것은 요즘의 분본粉本과 같은 것으로 요즘의 화공들이 그림을 그릴 때 먼저 흰바탕粉本을 만드는 것과 같다.
鄭玄後素之解 蓋據考工記文 雖然考工記之注 原是誤解 今攷本文 白曰白黑曰黑 以白爲素 經無文也...凡施采之白 皆謂之白 結之曰凡畵繢之事 後素功 所謂素功 豈白之云乎 素功者 若今粉本 今之畵工 先作粉本
정약용의 풀이를 요약하면 『논어』의 본문에 백자는 보이지 않고 소素자만 있는데, 바탕이 비록 흰색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바탕일 뿐 채색으로서의 흰색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왕퇴에서 발굴된 그림에서 흰색이 나중에 칠해졌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주희의 견해가 타당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