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정조와 함께 읽는 논어
弘齋全書卷七十一 經史講義八○論語[一] 辛丑選。李時秀,洪履健,李益運,李宗燮,李顯默,朴宗正,徐龍輔,金載瓚,李祖承,李錫夏,洪仁浩,曹允大,李魯春等對。
學而
◎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정조正祖: 말은 몸을 꾸미는 것이다. 꾸미되 공교한 데에까지 가면 지극한 말이 아니니, 공교한 말에 인仁이 적다는 것은 본디 그런 것이지만, 용모容貌와 사기辭氣는 바로 덕德이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어버이를 봉양함에 오직 낯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라든지 “용모를 움직일 때에는 비루하고 어그러짐을 멀리해야 한다.”라든지 하는 것들이 어느 것이든 그 얼굴빛을 잘 꾸민다는 뜻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영색令色 두 글자를 교언巧言과 아울러 일컬어, 모두 ‘인이 적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집주》에 비록 “밖을 꾸미는 일이다.”라고 하기는 했으나, 군자의 주경主敬 공부는 안과 밖이 같은 것이므로 몸을 단속하는 일도 또한 밖에서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밖에서 제어하여 그 안을 편안히 한다.”라든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으면서도 그 마음이 태만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든지 한 것들이 모두 이런 뜻이다. 만약 심덕心德이 안에서 온전하기만 하면 되지 밖으로 덕용德容을 꾸미는 일은 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위의를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고 몸단속을 가볍게 여기는 폐단이 있지 않겠는가?
[홍인호洪仁浩가 대답하였다.]
군자의 성덕成德의 실상은 단지 내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이지만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야 어찌 색사色辭를 밖의 일이라 하여 검칙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군자는 심덕心德이 밖으로 드러남이 꾸밈이 없어도 저절로 그러한 것이고, 소인은 바야흐로 겸손과 공경을 거짓으로 내보이고 의관도 구차하게 꾸미지만 군자의 눈으로 그것을 보면 그에게는 인仁이 적은 것입니다.
◎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정조: 이미 부이호례富而好禮라고 하였고 보면 빈이락貧而樂 아래에도 도道 자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안 될 게 없을 것이다. 주렴계周濂溪는 매양 정자程子로 하여금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낙樂한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도록 하였는데, 선유 가운데에는 도道를 낙樂한 것이라고 한 분이 많았다. 빈이락貧而樂의 낙樂하는 일이 도道 이외에 또한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이시수李時秀가 대답하였다.]
단지 낙樂한다고만 말하고 그 낙樂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말을 안 해야 그 낙樂이라는 것이 바야흐로 무궁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빈이락貧而樂 아래에 만약 도道 자를 붙이면 한 가지에 국한되어서 원만한 오묘함이 없어집니다.
爲政
◎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정조: 여기서 말한 사무사思無邪라는 것은 시詩를 지은 사람의 사무사를 가리키는가, 시를 배우는 사람의 사무사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시를 가르치는 사람의 사무사를 가리키는가? 이연평李延平이 이르기를 “시인이 풍자를 할 때에는 반드시 예의에 맞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시를 지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주 부자는 “단지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무사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시를 배우는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시詩를 말하여 입교立敎를 한 것이 이러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시를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어느 학설을 정설로 삼아야 옳은가?
[홍이건洪履健이 대답하였다.]
사무사는 시를 읽는 사람의 사무사를 가리킨 것입니다. 《집주》에 이른바 “그 쓰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성情性의 정正을 얻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정조: 공자는 나이 일흔에 바야흐로 불유구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선유가 이르기를, “안자顔子는 성인聖人보다 단지 한 칸을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또한 거의 이순耳順에 가까웠던 듯하다. 그렇다면 공자가 예순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을 안자는 겨우 서른에 도리어 가능했던 것인가?
[이종섭李宗燮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본디 스스로 성인의 자질이 있는 것이고 스스로 성인의 학문이 있는 것이고 또한 스스로 성인의 진취가 있는 것이어서 일반인들의 생각으로는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십오지학十五志學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지학志學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안자가 한 칸을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두고 이순耳順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 子曰 吾與回 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 不愚
정조: 여기 ‘물러가거늘 그 사생활을 살펴보니’라고 하였는데, 물러감은 누가 물러가는 것이며 살핌은 누가 살피는 것인가? 안자顔子가 물러가고 부자夫子가 살핀 것이라고 한다면, 부자가 안자의 거처에 가서 그 사생활을 살핀 것인가?
[서용보徐龍輔가 대답하였다.]
‘물러간다’는 것이 다만 그 사차私次에 물러나 지내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부자 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청문請問하는 때가 아니면 그 일상생활의 모두가 어딘들 물러난 곳 아닌 곳이 없고 사생활 아닌 것이 없습니다.
◎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정조: 시기소이視其所以, 관기소유觀其所由, 찰기소안察其所安은 부자夫子가 사람을 관찰하던 방법이었고, 청기언聽其言, 관기모자觀其眸子는 맹자孟子가 사람을 관찰하던 방법이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부자의 방법은 사람마다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맹자의 방법은 남보다 뛰어난 총명聰明을 가진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이 맹자가 부자보다 나은 것인가?
[서용보徐龍輔가 대답하였다.]
주자가 “이 세 가지는 사람을 관찰하는 큰 법칙인데, 성인이 일반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성인이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은 본디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으니, 아마 이것을 성인이 사람을 관찰하던 방법이라고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정조: 《집주》에 ‘주周는 보편普徧이다’라고 하였다. 보편이라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말이니, 앞 장章의 범애중汎愛衆과 서로 비슷한데, 앞 장에서는 범애중 아래에 이친인而親仁이라는 한 구절이 있지만 이 장에서는 단지 주이불비周而不比라고만 하고 말았다. 묵자墨子의 겸애兼愛에 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익운李益運이 대답하였다.]
보편普徧의 사랑은,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어질면 어진 대로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대로 각각 그 분수에 알맞게 사랑을 주는 것이고, 묵자墨子의 사랑은, 친한 사이거나 소원한 사이거나 후하게 해야 할 사이거나 박하게 해야 할 사이거나 간에 처음부터 차등을 두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비슷한 듯하면서도 실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정조: 이 장의 사思와 학學은, 사思는 지知에 소속되고 학學은 행行에 소속되는데, 《집주》에 정자程子가 말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은, 학學과 사思가 모두 지知에 소속된다. 본문本文과 주설註說이 서로 합치되지 않는 듯하니, 어째서인가? 정자程子의 이 학설은 본디 《중용》을 해석한 것인데, 중용中庸의 학學과 사思는 모두 지知를 말하고자 한 것이고 보면, 《집주》에서 굳이 이것을 이끌어다 풀이를 한 것은 과연 무슨 뜻에서인가?
[이익운李益運이 대답하였다.]
학學 자는 오로지 한 가지로만 말하자면 지知와 행行을 겸兼한 것이고, 학學과 사思를 나누어 말하자면 사思는 지知에 소속되고 학學은 행行에 소속되는 것이며, 학學과 사思와 행行을 나누어 말하자면 학學과 사思는 지知에 소속되고 행行은 행行에 소속되는 것이니, 말이 각기 위주로 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정조: 공호이단攻乎異端의 공攻 자를, 《집주》에서는 전치專治로 풀이를 하고 또 “전치專治하여 정밀히 알고자 하면 매우 해롭다.”고 하였다. 대저 이단異端의 해로움이야 사람이라면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전치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나서 또 “해로울 따름이다.[害而已]”라고 매듭지었으니, 좀 범범하고 허술하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 7편篇이 오로지 인욕人欲을 막는 공부인데도, “마음을 기르는 방법은 욕심을 줄이는 것寡欲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여, ‘없앤다[無]’고 하지 않고 ‘줄인다[寡]’고 하였는데, 이 과寡 자가 이 장의 사해斯害의 해害와 말의 뜻이 느슨하기가 서로 엇비슷하다. 이것이 《논어》와 《맹자》 가운데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곳인데 그에 대한 말을 들어 볼 수 있겠는가?
[이현묵李顯默이 대답하였다.]
부자夫子의 시대에는 노담老聃과 양묵楊墨의 도道가 아직 널리 퍼지기 전이었으니, 이 장에서 말한 이단異端은 대개 향원鄕愿 같은 부류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이 좀 느슨한 것입니다. 해害 자와 이已 자로 보건대, 해害는 바로 도道를 해침이고 이已는 또 결사決辭이니, 말을 두어 후세에 경계를 남긴 것이 어찌 엄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의 과욕寡欲의 과寡 자는 참으로 이 장의 사해斯害와 서로 엇비슷한데, 배우는 사람의 공부로 말하자면, ‘없앤다’고 하지 않고 ‘줄인다’고 한 것이 또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 子曰 由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정조: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치에 밝은 것이고 한편으로는 뜻이 정성스러운 것이니, 그 알지 못함이 본디 자기의 앎에 끼치는 손실이 없는 것인데, 꼭 참 앎을 가졌다고 할 수도 없는 대부분의 후세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 자기는 안다고 여긴다. 우리 유학儒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나 잡기雜技를 지닌 자들까지 어디든지 이러한 병통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른다고 하기의 어려움이 안다고 하는 것보다 어찌 그토록 더 어렵단 말인가?
[홍인호洪仁浩가 대답하였다.]
모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병통이 오로지, 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라는 세 글자가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의 교접처交接處로서 절실하고 중요한 공부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八佾
◎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鄒人之子 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정조: 혹인或人이 “예를 모른다.[不知禮]”고 공자를 기롱했다면 공자의 대답은 마땅히 ‘내가 무엇을 잡을까[吾何執]’라거나 ‘장차 벼슬을 할 것이다[吾將仕]’라고 한 것처럼 물음에 따라 대답하고, 대답만 하고 변설은 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굳이 ‘이것이 예이다[是禮也]’라고 하여, 마치 그와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듯이 한 것은 어째서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이 예라는 한 구절은 예의 뜻을 밝힌 것이지 예를 앎을 해명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이다’라는 말은 지知 자의 뜻을 담아 풀이해서는 안 되는가?
[홍이건洪履健이 대답하였다.]
예禮는 경근敬謹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시례是禮의 시是는 경근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이것으로 답을 한 것은 대개 혹인으로 하여금 종묘 안에서는 경근이 예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지 스스로 예를 안다고 하여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변설한 것이 아닙니다. 지知 자의 뜻을 띠고 말할 수 없음은 성상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정조: 관저關雎가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프면서도 화和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은 문왕文王의 슬픔과 즐거움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궁인宮人의 슬픔과 즐거움을 가리키는가?
[홍이건洪履健이 대답하였다.]
관저의 슬픔과 즐거움은 바로 시詩를 지은 사람의 슬픔과 즐거움인데, 시를 지은 사람을 선유先儒들은 대부분 궁인宮人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궁인의 슬픔과 즐거움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公冶長
◎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정조: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침이 매양 배우는 사람의 병통되는 곳을 따라서 그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라면, 자공子貢의 병통은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부자夫子가 이 장章에서 도리어 “너와 안회顔回는 누가 더 나은가?”라고 질문을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석하李錫夏가 대답하였다.]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자공子貢이 사람을 비교하자 부자夫子가 일찍이 불가不暇라고 답하였는데, 또 안회顔回와는 누가 더 나으냐고 질문을 한 것은 사람 비교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양씨楊氏는 말하기를, “안자顔子를 들어 질문을 한 것은 대개 그로 하여금 바다에 나가 해약海若을 우러러본 것처럼 스스로 힘쓸 줄을 알게 하고자 해서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감히 이 말을 아룁니다.
鄕黨
◎ 肉雖多 不使勝食氣 唯酒無量 不及亂
정조: 《예기》 악기樂記에 “선왕先王이 주례酒禮를 만들 때에 일헌一獻의 예법을 빈賓과 주主가 백배百拜를 하도록 하여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예에서도 깊이 경계한 바인데, 이 장에서는 “술은 정량이 없었다.[惟酒無量]”라고 하고, 주자가 풀이하기를, “양을 정해 놓지 않고, 취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고 하여, 마치 취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이익운李益運이 대답하였다.]
‘정량이 없었다[無量]’는 두 글자는 외면만 얼른 보면 마치 사람을 취하도록 유도한다는 혐의가 있을 듯하지만, ‘어지러운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不及亂]’는 세 글자를 보면 정량이 없는 가운데에 절로 정량을 둔 뜻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주량이 같지 않으니 다만 얼근히 마시는 것일 뿐입니다. ‘취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以醉爲節]’의 취醉 자가 어찌 얼근히 마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정조: 이 장은 정자程子의 학설에, “환공桓公은 형이고 자규子糾는 아우이다. 만약 환공이 아우이고 자규가 형이어서 관중管仲이 보좌한 것이 정당한 것이었는데도 환공이 그 나라를 빼앗고 자규를 죽였다면 관중에게 환공은 같은 세상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이다. 만약 그 뒷날의 공로를 계산하여, 그가 환공을 섬긴 것을 허여한다면, 성인의 말씀이 의리를 매우 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형제의 순서로써, 성인이 관중을 허여한 의리를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뒷날의 학자들이 여기저기서 인용한 기록들에는 모두 환공이 아우이고 자규가 형이라고 하였다. 시험 삼아 그 한두 개만 들어 보자면, 《사기史記》에는 “양공襄公의 다음 아우가 규糾이고 그다음 아우가 소백小白이다.”고 하였고, 두예杜預의 《좌전左傳》 주註에는 “자규는 소백의 서형庶兄이다.”라고 하였고, 관중이 직접 지은 글에는 “제齊 나라 희공僖公이 공자公子 여럿과 공자 규公子糾와 공자 소백公子小白을 낳았다.”라고 하였고, 순경荀卿은 “환공이 형을 죽이고 나라로 돌아왔다.”라고 하였고, 《한비자韓非子》에는 “환공은 오패五伯의 으뜸이다. 나라를 다투어 그 형을 죽였다.”라고 하였고, 《월절서越絶書》에는 “관중이 환공의 형인 공자 규에게 신하가 되었다.”라고 하였고, 《설원說苑》에는 “환공이 형을 죽이고 즉위하였으니 인의仁義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옛 책들에서 반드시 징험할 수가 있는 것들인데, 정자가 다만 박소薄昭의 말만으로 환공이 형이고 자규가 아우라고 쉽게 결정지어 버린 것은 어째서인가?
[서용보徐龍輔가 대답하였다.]
정자가 비록 환공이 형이고 자규가 아우라고 하였으나 후세의 여러 학자들이 널리 기록들을 끌어 와서 바로잡았습니다. 대개 성인의 뜻은 다만 그 공로만 논하고 그 죄는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또한 어찌 반드시 정자의 학설을 고집한 뒤라야 이 장의 뜻이 통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子張
◎ 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정조: 여기 이른바 ‘학문을 하고 남는 힘이 넉넉하면 벼슬을 한다’는 것은 옳으나, ‘벼슬을 하고 남는 힘이 넉넉하면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커서 실천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뜻과 크게 어긋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벼슬하고 남는 힘이 있어야 비로소 학문을 할 수 있다면, “저는 아직 벼슬에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한 칠조개漆雕開에 대해서 부자가 기뻐할 것이 뭐가 있겠으며, “어찌 반드시 글을 읽은 뒤라야 학문이 되겠습니까.”라고 한 자로子路에 대해서 부자가 책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석하李錫夏가 대답하였다.]
어려서 배우는 것은 커서 실천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말한 것이고, 벼슬하고 남는 힘이 넉넉하면 학문을 한다고 한 것은 이미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한 것입니다.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말하면 칠조개의 독실한 의지는 마땅히 허여해야 할 바이고, 이미 벼슬을 한 사람으로서 말하면 자고(子羔)가 아직 학문을 안 한 것은 마땅히 면려해야 할 바입니다.
經史講義九○論語[二] 癸卯選。李顯道,鄭萬始,趙濟魯,李勉兢,金啓洛,金煕朝,李崑秀,尹行恁,成種仁,李晴,李翼晉,徐瀅修,沋晉賢,申馥,李儒修,姜世綸等對。
里仁
◎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정조: 성인聖人이 증자曾子에게 일관一貫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증자는 충서忠恕라고 문인門人들에게 말해 주었다. 일관은 하나이고 충서는 둘이다. 어찌 충서가 일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선유가 이르기를 “충忠은 일一이고 서恕는 관貫이다.”라고 하였으나, 본문에 분명하게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말하였고 보면, 이관以貫의 이以에서 바로 일一과 관貫이 처음부터 두 가지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나누어 붙인다면 천착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만시鄭萬始가 대답하였다.]
일관은 성인의 충서이고 충서는 학자의 일관입니다. 충忠이 체體이고 서恕가 용用이니 체와 용이 어찌 둘이 있겠습니까. 충과 서를 일과 관에다 나누어 붙이는 것은 학자들 가운데 비판하는 사람이 많으니, 대개 일관이라는 두 글자는 나눌 수 없는 것이고 관貫은 다만 일一의 관貫이기 때문입니다.
◎ 子曰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정조: 이 장의 유어의喩於義와 유어리喩於利에 대해서, 정자程子는 “오직 분명하게 잘 알아서 이 때문에 독실히 좋아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알게 된 뒤喩後의 효험으로써 말한 것이고, 상산象山은 “사람이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익히는 바에서 말미암는 것이고 익히는 바는 뜻을 두는 바에서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 알기 이전[喩前]의 공부로써 말한 것이다. 어느 학설이 맞는가? 주자朱子와 상산象山이 이 장을 강론하자 좌객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기까지 했었다. 그 학설이 매우 절실하여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러했고 보면, 주자가 《집주》에 반드시 정자程子의 학설을 취한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였다]
이 장은 반드시 정자程子와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을 겸한 뒤라야 뜻이 바야흐로 완전히 갖추어집니다. 그래서 주자가 《집주》에서는 정자의 학설을 취하였으나 《혹문或問》에서는 육상산의 학설을 아울러 취하여 말하기를, “먼저 분명히 알아서 좋아함이 더욱 독실해지는 사람도 있고 먼저 좋아해서 앎이 더욱 깊어지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예로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서로 보완이 되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述而 · 雍也
◎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정조: 안자顔子의 즐거움을 주자周子는 암시만 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선우신鮮于侁이 ‘도道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자 정자는 허여하지 않고 말하기를, “가령 안자가 도를 즐거움으로 삼았다면 안자가 아닌 것이다.” 하였고, 유불劉黻이 정자의 학설을 인용하여 “인仁을 즐긴 것이다.”라고 하자 주자가 또한 허여하지 않고 말하기를, “인仁을 즐긴 것이 아니라 오직 인仁 하였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학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천리天理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하는 자도 있고, “극기克己로 즐거움을 삼았다.”라고 하는 자도 있어서 오늘날까지 서로 옳으니그르니 하고 있은 지가 오래다. 만약 한마디로 잘라 말하고자 하면, 그 즐거움이란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주자周子가 말해 주지 아니한 은미한 뜻에 맞는 것인가?
[성종인成種仁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道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인人과 도道가 둘이 되고, 만약 인仁으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인仁도 또한 도道이고, 만약 극기克己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즐거움이란 것은 극기를 한 뒤의 일이고, 만약 천리天理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주자가 이르기를, “즐거움이란 것은 저 낙천지명樂天知命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안자의 즐거움은 끝내 끝까지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어류》를 읽었더니, “즐거움은 말이 필요 없다. 마치 하나의 물건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학설이 매우 맛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안자의 가슴속에 본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