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12 (최종회)
서울로 돌아온 뒤 저는 떠나간 아내가 무척 그리웠어요. 사랑이 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착각이죠. 사랑은 내게 따뜻한 밥을 해주는 사람이어요. 적어도 제게는요. 물론 거꾸로 생각하면 따뜻한 밥을 마련할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겠죠.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그렇게 겸허하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밥이 해결되는 순간 금세 다른 욕망이 차오르는 게 인간이죠. 어쨌든 저는 아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내가 끓여주던 시금칫국이 너무 그리웠고요. 어느 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나간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법’이라는 문구가 떠오르더군요. 더 이상 뚱뚱하지 않은, 옛사랑 그녀가 들려준 말이라는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어요. 우습지만 저는 포도를 발가락마다 끼워 넣고 출근을 했어요. 그래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더군요. 제일 듣고 싶은 건 그 아무도 아닌 아내의 쓸쓸한 첼로 소리였어요.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자기가 누군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채 우리는 온 삶을 낭비하죠. 제가 보고 싶은 딱 한 사람은 바로 제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난 아내였어요. 섹스보다 중요한 건 사랑이 묻어있는 스킨십이에요.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 껴안고 누워있는 시간, 어쩌면 섹스 후의 평화로운 스킨십이야말로 제가 꿈꾸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이지요.
어쨌든 저는 미국에서 돌아온 몇 달 뒤 캄보디아 출장의 기회를 얻었어요.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한 <화양연화>라는 영화는 제 청춘 시절에 본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어요. 뚱뚱한 내 사랑 그녀가 떠난 뒤 혼자 본 영화였어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캄보디아의 거대한 앙코르와트 유적지에 쓸쓸히 서 있는 ‘양조위’의 모습이었지요. 마치 제 모습 같았어요. 어슴푸레한 기억을 지니고 그 마지막 장면에 관해 컴퓨터에 클릭을 해보니 누군가 이렇게 썼더군요. 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막에는 이렇게 씌어있더래요.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씨엠립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수영장이 아름다운 호텔에 짐을 풀었어요. 크메르 왕국의 영화로움을 재현해 놓은 듯 아름다운 호텔이었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히틀러’와 ‘폴 팟’이에요. 그 아름다운 크메르 왕국을 킬링필드로 만든 폴 팟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어요. 중학교 이상 학력을 지닌 사람은 닥치는 대로 데려다가 비닐봉지로 얼굴을 씌워 숨통을 막아 죽인 장본인이 바로 폴 팟이에요. 전국에 의사가 7명 남아 환자를 치료할 수도 없었다더군요. 어쩌면 제가 전생에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벽돌을 나른 크메르인이었는지 모르죠. 아- 앙코르와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저는 대충 일을 마치고 해질 무렵 앙코르 톰에 올라 일몰을 바라보았어요.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가 마치 영화 속의 왕조위가 된 기분이었어요. 아쉬운 기분을 뒤로하고 앙코르와트를 내려와 야시장엘 갔어요. 왠지 제 발길을 끄는 골동 가게 안으로 들어섰는데, 정말 놀랍게도 아내와 너무 닮은 여인이 오래된 첼로를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고 있었어요. 하지만 분명 아내는 아니었어요. 저는 이 세상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꿈이었을까요?
저는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아내가 첼로를 켜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첼로를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고 있던 아내를 닮은 여인은 그 첼로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서툰 영어로 말하더군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연주를 하려 해도 소리가 나지 않더래요. 어쩌다가 캄보디아까지 흘러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더군요. 저는 직감으로 알았어요. 그 소리 나지 않는 첼로는 틀림없이 뚱뚱한 내 사랑 그녀의 첼로였어요. 아니 제 첫사랑 선생님이 커다란 트럭같이 생긴 택시에서 들고 내리던 바로 그 첼로였어요. 얼마냐고 물었더니 달러로 천 불을 달라더군요. 원래는 무지하게 비싼 첼로인데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싸게 주는 거라 하더라고요. 저는 두말 않고 그 첼로를 샀어요. 돌아와 거실에 두고 저는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요. 저 첼로를 소리 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제 아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왜 우리는 늘 한 발자국 늦는 걸까요? 저는 지나간 날들을 생각했어요. 오래도록 닦지 않아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어요.
텔레비전을 켜니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가 들려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