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4
참 이상하죠? 기타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도 그 여러 개를 다 연주할 수는 없어요. 오래도록 연주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기타는 소리 내는 걸 거부하지요. 기타는 왜 나를 그렇게 오래도록 내버려두었냐고 나무라며 어느 날 갑자기 등을 돌리는 여자를 닮았어요. 그러기에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인지도 모르죠.
그렇고말고요.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까닭에 제가 이런 시련을 겪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두 사람을 사랑하던 그 시절, 기타 줄을 조율하는 일은 늘 저를 긴장시켰어요.
기타 줄을 조이다 보면 줄이 ‘탕’하고 끊어져버리곤 했거든요. 요즘의 기타 줄은 잘 안 끊어지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도 맑은 가을 하늘의 채도처럼 ‘탕’하고 끊어지는 그 시절의 기타가 가끔 그리워져요. 그렇게 갑자기 끊어지는 기타 줄을 볼 때마다 엉뚱하게도 저는 목이 ‘탕’하고 떨어지는 사형수가 떠오르곤 했어요. 영화 <스틸라이프>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세요? 한 남자가 허공 위에 떠있는 가늘디가는 전신주 줄 위를 천천히 곡예 하듯 한 발자국씩 내디디며 위태롭게 걸어가는 풍경이요. 산다는 건 정말 그런 거죠.
그 가느다란 허공 위의 줄이 제가 조이던 기타 줄처럼 느껴졌어요. 삶의 줄이 기타 줄처럼 느껴질 때, 제게 있어 기타를 치는 행복은 중국인들이 사탕과 담배와 차와 술을 마시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제야 알았네요. 그 가는 줄 위를 걸어가는 영화 속의 실루엣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 보였어요. 인생이라는 가느다란 줄 위에서 제가 기타 치는 거 말고 하고 싶던 일은 바로 춤을 추는 일이었다는 거, 기억하시죠? 기타가 소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몸도 움직임을 거부하는 순간이 있겠지요. 어쩌면 죽음은 우리의 호흡을 거부하는 것일 테지요. 제가 여행 중에 보았던 그 풍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양쯔강 삼협 크루즈 여행의 배 안에서 저는 한 여인을 만났어요. 영화 속처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온 그녀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 알고 혼자 여행이나 할 겸 크루즈 배에 올랐대요. 하긴 그녀도 남편을 마냥 기다린 건 아니래요. 어떤 돈 많은 유부남 눈에 들어 큰집과 하인들과 좋은 차를 지니고 한 삼 년 살았더래요. 어느 날 주인으로 믿고 살기로 한 그 유부남이 또 다른 여자한테 반해서 그녀 집에 발걸음을 끊고 난 뒤, 그녀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랜 남편을 딱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대요. 우리가 탄 배는 다른 배들에 비해 상당히 호화 유람선이었죠. 그녀를 보자 첫눈에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처제를 꼭 빼닮은 그녀가 중국말만 하지 않았다면 저는 처제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을 거예요. 한 이틀이 지나 서로 혼자였던 그녀와 저는 신통치 않은 영어로 서로의 신상에 관해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몸을 떨었어요. 하지만 그건 너무나 큰 착각이었죠. 여행이 끝나가는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소란한 소리에 잠을 깬 저는 무슨 일이 났나 싶어 갑판으로 올라갔어요. 무슨 일이 단단히 났더라고요. 물에 빠진 여인의 사체를 앞에 두고 경찰들이 갑판을 둘러싸고 있었어요. 분명 지난밤 물에 뛰어든 그녀의 사체였어요. 바로 그 직전까지 저와 함께 맥주를 마셨던 바로 그 여자가 틀림없었어요. 경찰들이 접근금지를 시키는 바람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지만, 어차피 아무도 보지 못한 터라 제가 증인으로 어젯밤 같이 있었노라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어요. 그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 거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해요. 비겁한 걸까요?
언제나 저는 비겁했어요. 이 한 많은 삶, 그 가느다란 삶의 줄 위에서 발 하나만 잘못 내려놓으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될, 이 아무것도 아닌 삶. 그래도 저는 줄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어요. 근데 참 이상하죠? 처제를 꼭 빼닮은 그 중국인 처자가 세상을 떠난 그날 이후 제가 늘 치던 전자기타도, 처제가 남기고 간 통기타도 소리를 거부하는 거예요. 저는 더 이상 기타리스트가 아니었어요. 아무리 새 기타를 쳐보아도 기타는 제대로 음률을 갖춘 소리를 거부하며 이상한 울음만 울어댔어요. 그 울음소리는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두 사람이 목소리를 모아 저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기도 했어요.
아니 헤어진 아내와 죽은 처제와 처제를 닮은 중국인 처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뒤엉켜 있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중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저는 그 이후 다시는 기타를 연주하지 않는답니다. 기타를 치지 않고서는 상처니 고독이니 달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만해요. 쓸쓸할 땐 춤을 추곤 하지요.
영화 속 마지막 장면처럼 창밖의 허공 위에 상상의 가는 줄을 매 놓고 그 위에서 춤을 추는 거예요. 관객은 아무도 없어도, 기타 줄처럼 팽팽한 발밑의 삶의 줄은 그래도 삶은 살만한 거라고 제 발바닥을 간질이네요. 일주일에 한 번 발레를 배우러 다니는 딸아이 덕분에 발레 학원에 가서 구경만 하다가 나중에 혼자 연습해보기도 해요. 딸아이를 가르치는 발레 학원의 선생님은 제게 호감이 있는 듯 가끔 향수나 넥타이 같은 선물을 주곤 해요. 다음 주말엔 고마움의 표시로 식사라도 같이 하려고요.
기타를 치기 때문에 여자들이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기타를 치지 않아도 여자들은 저를 좋아하네요. 제 몸속에 기타가 들어 있어서 연주하지 않아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걸까요? 아무러면 어떻겠어요? 저는 정말 오랜만에 또다시 행복한 기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