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3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어요? 상처, 하면 제게는 기타가 떠오르네요.
영화 <스틸라이프>에서는 ‘담배, 술, 차, 사탕’ 이 네 가지에 관한 사색을 담아내고 있죠. 중국에서는 이 네 가지만 있으면 가정이 행복하다는 설이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해요. 옛날 얘기죠. 행복이 그렇게 쉽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하염없이 떠내려가는 걸까요?
정말 매 순간 물에 잠기는, 제가 가본 장소들이 이후에 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곳이 되었죠. 물론 영화에서 본 풍경들은 지금은 없고요. “눈뜨면 없어라.” 누군가가 펴냈던 그럴듯한 책 제목이 떠오르네요. 배를 타고 양쯔강 삼협댐 여행을 했던 당시 저는 이미 담배도 끊고, 술도 그전처럼 마시지 않고, 사탕은 좋아하지도 않고, 차, 하긴 차는 지금도 좀 좋아하네요. 커피부터 국화차, 녹차, 다즐링, 카모밀, 철관음차, 용정차, 보이차, 차라면 다 좋아하죠. 배를 타고 눈뜨면 없어지는 서러운 풍경을 바라보며 저는 하루 종일 차를 마셨어요.
하긴 우리네 인생을 가장 짧은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네요. “눈뜨면 없어라”라고요. 이후에 본 영화 속의 마을 풍경들은 이제는 수몰되어 세상에 없는 주소들이죠. 세상에 없는 주소들, 그게 바로 서로 사랑해서 10년을 같이 살던 아내와 함께했던 세월, 지금은 없는 사랑의 주소라는 생각이 들자 빗물처럼 제 눈에 눈물이 흘렀어요.
여행을 통해 저는 풍경을 보았지만, 이후에 본 영화 속에서 저는 저를 닮은 많은 사람들을 보았어요. 사라진 주소 하나를 들고 집 나간 아내를 찾아 산샤를 찾아온 남자, 소식이 끊긴 지 오랜 돈 벌러 간 남편의 행방을 찾는 한 여자, 그들의 발자취를 통해 이산과 실향의 아픔, 아니 그들과 닮은 저 자신의 고독을 읽었죠.
그래도 그 고독과 상처를 달래주는 건 언제나 기타였어요. 만남도 재회도 그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삶의 허무함, 그러나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위대함, 제게 그 위대한 일상은 바로 기타를 치는 일이었으니까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보네요. 대구에 사는 사촌 누나가 대학 예비고사 시험을 치르느라 서울로 올라와 저희 집에서 몇 달을 보내던 날들이었어요. 누나는 책이 잔뜩 든 박스 몇 개와 클래식 기타 한 대를 들고 우리 집에 왔어요. 시험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밤만 되면 포크송을 치곤 했지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요. ‘현경과 영애’의 노랫말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날들…” 그렇게 시작되는 노래들이 얼마나 제 가슴에 신선한 울림으로 다가왔는지. 저는 기타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어요.
하긴 그보다 더 좋은 건 춤추는 일이었어요. 발레복을 입은 무용반 계집아이들이 발목을 곧추세우고 발레 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저는 기타리스트가 되었어요. 춤을 추느니 기타를 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부모님들 덕분에요. 사촌누나가 기타 치는 걸 곁눈질로 보고 배운 저는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닌데, 기타 치는 걸 구경한 지 보름 만에 비슷하게 흉내 내며 기타를 치곤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무렵엔 기타를 그럴듯하게 치며 김민기의 <작은 연못>을 부르곤 했죠. 제가 기타 치는 걸 대견하게 생각한 아버지는 초등학교 6학년 되던 그해 봄 청계천에 저를 데리고 가 도매상에서 LP판 하나를 사주셨어요. 그때 제가 고른 음반이 하모니카를 부르며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밥 딜런’의 음반이네요.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북한에서 피난을 내려와 평생 먹고살기 위해 바빴던 아버지에게 저는 유일한 위안이자 기쁨이었었죠. 제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면 아버지는 <두만강> 한 곡 뽑으라고 하셨어요. 어린 저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하면서 노래를 불렀죠.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질 때마다, 저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벌써 우리들 삶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해 생각하곤 했어요.
참 조숙했죠.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 되고, 전교에서 1등을 하면 전자 기타를 사주겠다는 아버지 말에 저는 진짜 전교에서 일등을 했어요.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 외에는 산만하기 짝이 없는 제게 전교 1등은 기적 같은 일이었죠. 아버지와 저는 전자 기타를 사러 가려고 택시를 탔어요. 택시 속 라디오에서 거짓말처럼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지미 헨드릭스’의 하얀 기타를 살까 ‘에릭 클랩튼’의 검은색 기타를 살까 망설이던 저는 택시 속에서 들은 ‘지미 헨드릭스’의 하얀 기타가 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하얀 기타를 사들고 온 뒤, 저는 통기타와 결별하고 전자기타를 치며 강렬한 록 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세상은 외로웠지만 참 행복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