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싯다르타는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을 살았으나, 그런 삶에 완전히 빠져들어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사문 시절에 억눌렸던 관능이 다시금 눈을 뜨고 깨어났으며, 그는 부유함을 맛보았으며, 환락을 맛보았으며, 권력을 맛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사문으로 머물러 있었으니, 이러한 사실을 그 영리한 여자 카말라가 제대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11쪽.
융이 당시에 결코 유망한 학문이 아니었던 정신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한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 정신의학 교과서에는 맨 마지막에 손을 댈 정도로, 정신의학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 무렵 의학계에서는 정신의학이 매우 인기 없는 학문이기도 했다. 정신 병동은 나환자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있으며, 그쪽으로는 아무도 깊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어둠의 영역으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던 정신의학에 대해 융은 이렇게 묘사한다. “정신병은 절망적이며 치명적인 일이었는데 그 그림자가 정신의학에도 드리워져 있었다”고. 융은 크라프트 에빙Kraft Ebing의 정신의학 교과서 서문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게 된다. “정신의학 교과서들이 다소 주관적인 특색을 띠는 것은 아마도 그 분야의 특이성과 학문 형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 일컫고 있었고, 이 짧은 서문이 융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꿔놓게 된다. 그는 항상 자연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과 인간 심리의 복잡성에 대한 비밀스런 관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그 두 가지 관심을 통합시켜줄 학문이 정신의학이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포착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의학에서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다.
-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10쪽.
융이 정신의학을 택하겠다는 결정을 주변사람들에게 알렸을 때, 모두들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 모두 의아해하며 최고의 수재였던 융이 그런 ‘비인기학문’을 택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과의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에 마음이 끌리는 그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융은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는 느낌을 아주 어렸을 적부터 뼈저리게 느껴봤기에 그 소외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과 달라 보이기가 싫어 일부러 ‘남들과 비슷한 척’ 연기를 했던 어린 시절의 융과 달리, 이제 어른이 된 융은 타인의 냉정한 시선을 견뎌낼 강인한 내면의 빛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의 결심을 훼방 놓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두 개의 강물(생물학적 사실에 대한 관심과 정신과 내면에 대한 관심)이 이제야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었다.
한편, 싯다르타는 아직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두 개의 강물을 다스릴 힘을 찾지 못했다. 세속의 삶을 향해 무한히 뻗어나가는 인간적 관심, 그리고 영적 깨달음을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깊은 내면세계를 향한 관심. 싯다르타는 한쪽을 택하면 다른 한쪽을 잊지 못했고, 두 가지 모두를 택하기엔 아직 영혼의 균형 감각이 부족했다. 그는 세속적인 삶을 택한 후 처음에는 기다림과 사색과 단식의 기술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사문의 삶’을 버리지 않지만, 점점 세속의 쾌락과 탐욕에 이끌려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마침내 그는 도박에 중독되면서 그 불안과 초조함을 병적으로 즐기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는 불안감, 그러니까 주사위 노름을 하는 동안, 그리고 막대한 판돈 때문에 걱정하는 동안 가슴을 죄는 듯한 두려운 불안감, 바로 그 불안감을 사랑하였으며, 언제나 그 불안감을 새롭게 살려내려고 하였으며, 언제나 그 불안감을 고조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불안감이 주는 자극을 점점 높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겨울 정도로 물려버린 미지근하고 맥 빠진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감정 속에라도 빠져야만 그나마 자신이 행복 같은 어떤 것, 도취 같은 어떤 것 고양된 삶 같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