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월리스 컬렉션The Wallace Collection에는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곳의 대표 소장품으로는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Madame de Pompadour』1759과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그네The Swing』1767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같은 전시실에 걸려 있어요. 왼쪽 벽에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이, 오른쪽 벽에 『그네』가 걸려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네』가 부셰의 그림들 사이에 걸려 있더군요. 또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프라고나르 그림을 왜 굳이 부셰의 그림들 사이에 걸어 놓은 거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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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그림)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캔버스에 유화, 81 × 64.2 cm. 월리스컬렉션, 런던. |
전시된 세 작품 중 가운데 작은 그림이 『그네』입니다. 부셰의 그림 두 점을 나란히 걸고 『그네』를 맨 오른쪽에 걸거나, 『그네』를 다른 벽으로 보내야 할 것 같지 않나요? 미술관 직원에게 물어보니 답을 가르쳐 주더군요.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왼쪽 벽면 사진을 보고 그 이유를 한 번 추측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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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그림)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9. 캔버스에 유화, 91 × 68 cm. 월리스컬렉션, 런던. |
답은 그림들의 크기와 액자 모양에 있습니다. 작은 그림들 양쪽에 있는 부셰의 그림들 네 점의 크기가 다 똑같죠? 액자 모양도 똑같습니다. 가운데 있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과 『그네』도 크기와 액자 모양이 쌍둥이입니다. 미술관 직원은 양쪽 벽면이 균형을 이루도록 작은 그림들을 가운데 걸었다고 설명해 주더군요. 엄청나게 깊은 뜻이 숨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일리가 있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소개하는 동영상에서 큐레이터인 캐리 버랏Carrie Barratt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모든 그림에는 사연이 있어서 항상 어떤 정보나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줍니다. 두 그림을 가까이 걸 때, 두 그림이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고려해 보지 않은 채 그림을 거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어느 한 작품도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전시되는 경우는 없다는 거겠죠. 전시실의 작품 배치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치밀한 전략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으니까 작품들을 나란히 거는 거겠죠? 어떤 이유로 작품들을 나란히 거는 걸까요?
큐레이터들이 작품을 걸 때 고려하는 모든 연관관계를 미술 초보들이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미술 초보라도 전시된 작품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으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그 연관관계는 바로 작품들의 시대별, 사조별 연관성입니다.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같은 시대, 같은 사조의 작품들이 나란히 전시된다는 거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Mona Lisa』1503 옆에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품이 전시되는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물론 특별기획전이 열릴 때는 예외겠죠. 2016년엔가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전시실 곳곳에 현대 작품들이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 앙투안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의 『피에로Pierrot』1718~1719 왼쪽에 피카소가 그린 『피에로 복장의 폴Paul en Pierrot』1925이 전시돼 있는 식으로요. 그렇지만 이건 예외적인 경우고, 상설 전시에서는 시대별, 사조별로 작품들이 전시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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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앙투안 와토, 『피에로』, 1718-1719. 캔버스에 유화, 185 × 150 cm. 루브르박물관,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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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피에로 복장의 폴』, 1925. 캔버스에 유화, 130 × 97 cm. 피카소미술관, 파리. |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이 시대별, 사조별로 전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술관에 다니다 보면 특정 화가들 옆에 항상 전시되는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화풍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다른 화가들과도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미술 시간뿐만 아니라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화가들과요. 저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 1632~1675 덕분에 피테르 드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라는 화가를 알게 됐습니다. ‘후흐’인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 ‘호흐’로 표기되고 있더군요. 미술관에서 페르메이르 작품을 보게 되면 그림 주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집안 풍경을 다룬 비슷한 화풍의 작품이 거의 항상 가까이에 걸려 있을 테니까요. 런던의 국립미술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는 호흐의 그림과 페르메이르 그림이 다정하게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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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 피테르 드 호흐, 『두 남자와 술을 마시는 여자와 하녀가 있는 풍경』, 1658. 73.7 × 64.6 cm, 캔버스에 유화. 국립미술관, 런던. (오른쪽 그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버지날 앞에 서 있는 여인』, 52 × 45 cm, 1670~2. 캔버스에 유화. 국립미술관,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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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 피테르 드 호흐, 『방문』, 1637. 우드에 유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오른쪽 그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1660~2. 캔버스에 유화, 45.7 × 40.6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
같은 시대, 같은 주제를 같은 화풍으로 그린 두 작품을 비교해 보라는 큐레이터의 의도가 담긴 작품 배치겠죠? 실내 풍경을 그린 그림이지만 페르메이르 작품이 호흐의 작품보다 명암 대비가 좀 더 극적이고, 색채가 더 풍부한 것 같습니다. 실내 그림의 단짝이 페르메이르와 호흐라면, 살로몬 판 라위스달Salomon van Ruysdael, 1602~1670과 야코프 판 라위스달Jacob van Ruisdael, 1629~1682은 풍경화 단짝입니다. 한 사람의 풍경화가 걸려 있으면, 주변 어딘가에 다른 한 사람의 풍경화도 어김없이 걸려 있습니다. 성이 같으니 혹시 부자지간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사이랍니다. 첫 음을 연결해서 ‘삼촌 살로몬’과 ‘조카 제이콥’으로 외워 두면 삼촌과 조카를 구분하기가 조금 더 쉬워집니다. 두 사람의 그림은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제 눈에는 삼촌의 나무가 더 시적으로 보입니다. 사진 파일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의 그림을 한 컷으로 담은 사진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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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몬 판 라위스달, 『어부가 있는 강 풍경』, 1645, 패널에 유화. 국립박물관,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마드리드. |
가족이라는 연관관계로 나란히 전시되는 화가들이 또 생각났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 모두 오르피즘Orphism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가족관계가 아니었어도 아마 가까운 곳에 전시됐을 확률이 높습니다. 오르피즘이란 입체파Cubism에 강렬한 색채를 도입한 양식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작품은 매우 흡사해서 남편 그림인지, 아내 그림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술관에서 두 사람의 작품을 보면 남편 그림일지, 아내 그림일지 혼자 작가 맞추기 게임을 하곤 합니다. 이 두 화가는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와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 1885~1979 부부입니다. 성이 같고, 나이도 같아서 두 사람이 부부일 것이라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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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 캔버스에 유화. 퐁피두센터,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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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아 들로네, 『전기 프리즘』, 1914. 캔버스에 유화. 퐁피두센터, 파리. |
미술관의 작품 배치 덕분에 알게 된 화가들 중에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와 에두아르 뷔야르Édouard Vuillard, 1868~1940도 있습니다. 이 두 화가의 작품을 처음 본 곳은 LA 카운티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의 인상파 전시실이었습니다. 이후 다른 미술관에서도 인상파 화가들 작품들과 함께 있는 이 두 화가들의 작품을 반복해서 보게 됐죠. 그러다 보니 인상파 화가들과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끝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이 두 화가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습니다. 미술관에서 그저 작품 관람을 한 덕분에 국내에서 도록을 구하기도 힘든 낯선 두 화가들을 알게 된 겁니다. 작품 캡션에 적힌 설명을 통해 이 두 화가가 나비Nabi파라는 것도 알게 됐죠. 인상파가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채를 화폭에 담았다면 나비파는 마음의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채를 화폭에 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대별, 사조별 작품 배치 방식을 넘어서서 특별한 연관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나란히 전시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 두 그림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지 한 번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사진 속의 그림들은 모두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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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 페테르 파울 루벤스,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 1636~1638. 캔버스에 유화, 176 × 83 cm. 미술사박물관, 빈. (오른쪽 그림)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8~1639. 캔버스에 유화, 110 × 85.5 cm. 미술사박물관, 빈. |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부부일까요? 아니면 연인일까요? 엘렌 푸르망Hélène Fourment, 1614~1673은 루벤스의 두 번째 아내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했을 당시 루벤스가 53세, 푸르망이 16세였다고 합니다. 루벤스는 아내를 모델로 해서 여러 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왜 이 두 그림이 나란히 전시됐는지 이해가 되죠? 그런데 몇 년 뒤 미술사박물관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이 두 그림 사이에 루벤스의 『추위에 떠는 비너스Venus Frigida』1614가 걸려 있더군요. 부부 사이를 떼어 놓을 만큼 대단한 사연이 있는 작품인지 궁금해서 작품 캡션을 읽어보니 안트베르펜Antwerp에 있는 벨기에 왕립 미술관the Royal Museum of Fine Arts에서 대여해 온 작품이라고 합니다. 대여 기간이 끝나면 부부가 재결합하겠죠?
다음 작품들은 로마에 있는 보르게세Galleria Borghese 미술관의 한 전시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면에 있는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조각 작품과 벽에 걸린 바티스텔로 카라촐로Battistello Caracciolo, 1578~1635의 그림 사이에 무슨 연관관계가 있을지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각 작품 뒤쪽에 있는 그림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서 사진을 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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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 1609~1610. 패널에 유화, 125 × 100 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제가 찍은 다비드 조각상 사진에는 카라촐로의 그림이 살짝만 보여서 위키미디어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이 전시실에는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09~1610도 함께 걸려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조각 작품과 그림들을 비교해서 관람하라는 큐레이터의 깊은 뜻이 담긴 작품 배치겠죠? 미술관에서는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시실 전체를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한 전시실에는 헨드릭 아베르캄프Hendrick Avercamp, 1585~1634의 겨울 스케이팅 풍경화 두 점이 서로 마주보게끔 맞은편 벽면에 전시돼 있습니다. 전시실 전체를 보지 않으면 찾아내기 힘든 연관관계입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의 다른 전시실에서도 같은 주제를 다룬 조각 작품과 그림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는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 『아폴론과 다프네Apollo e Dafne』1622~25가 전시돼 있고, 이 조각 작품 뒤쪽 벽에는 도소 도시Dosso Dossi의 그림, 『아폴론과 다프네』1524가 걸려 있습니다. 아래 첫 번째 사진에서 조각상 뒤로 보이는 그림이 도시 작품입니다. 다프네가 막 나무로 변신하는 순간이 조각 작품과 그림에서 다르게 표현돼 있죠? 조각상이 오비디우스Ovid or Ovidius의 『변신 이야기』기원후 8년를 더 충실하게 따라 아폴론이 다프네를 뒤쫓아 가는 모습으로 표현했다면, 도시는 아폴론이 다프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을 때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하는 모습을 그림 왼쪽에 잘 보이지도 않게 작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시실에서는 벽을 넘어서 천장까지 고루고루 살펴봐야 합니다. 천장에 피에트로 안젤레티Pietro Angeletti, 1734~1798가 그린 『아폴론과 다프네』1780~1785의 그림이 전시돼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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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1622~1625. 대리석, 243 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앞으로는 미술관에서 눈앞의 작품에만 집중하지 말고 눈을 들어 주변의 작품들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큐레이터의 유머 감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작품 배치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래 사진들을 보고 그림이 걸린 장소가 왜 여기일지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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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캠벨 수프 통조림』 32점, 1962. 캔버스에 합성수지 페인트, 각 캔버스 50.8 × 40.6 cm. 현대 미술관, 뉴욕. |
‘Terrace 5’는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 있는 카페입니다.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캠벨 수프 통조림Campbell’s Soup Cans』 그림들1962이 카페 출구 옆에 걸린 이유는 굳이 설명을 안 드려도 되겠죠? 물론 이곳 카페 메뉴에 캠벨 수프 통조림은 없습니다.
특별한 인연으로 나란히 전시된 작품들이 한 가지 더 생각났습니다. 런던의 국립미술관에는 독립된 작은 방에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의 풍경화와 J.M.W. 터너J.M.W. Turner, 1775~1881의 풍경화들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제 사진 실력으로는 네 작품이 걸려 있는 세 벽면을 한 컷에 담을 수가 없어서 터너와 클로드의 작품을 따로따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 작품을 한 컷에 담은 사진을 보고 싶으시면 이곳을 눌러 보세요. 터너와 클로드의 작품들은 무슨 인연으로 나란히 걸려 있을까요? 터너의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Dido Building Carthage』1815 작품 캡션에 그 이유가 들어 있더군요. 클로드의 풍경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터너가 죽기 전에 많은 수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초기 작품인 위 두 작품을 반드시 클로드가 그린 『이삭과 레베카의 결혼식이 있는 풍경Landscape with the Marriage of Isaac and Rebecca』1648년과 『시바의 여왕이 승선하는 해항Seaport with the Embarkation of the Queen of Sheba』1638 옆에 걸어 달라는 거였죠. 터너의 유언에 따라 지금도 두 작가의 작품들이 한 방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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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 J.M.W. 터너, 『수증기 속으로 떠오르는 태양』, 1807년 경. 캔버스에 유화, 134 × 179.5 cm. 국립미술관, 런던. (오른쪽 그림) J.M.W. 터너,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1815. 캔버스에 유화, 155.5 × 230 cm. 국립미술관,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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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로랭, 『시바의 여왕이 승선하는 해항』, 1638. 캔버스에 유화, 149 × 194 cm. 국립미술관, 런던. |
지금까지 전시된 작품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몇 가지만 살펴봤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시대별, 사조별 연관성을 시작으로 작가들 사이의 가족관계, 작품 속 대상과 작가의 가족관계, 동일한 작품 주제, 작품과 주변 환경과의 연관성, 작가 자신의 요청 등 수많은 요소들이 작품의 전시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작품을 관람할 때 미술 초보들은 전시 작품들을 배열하면서 큐레이터들이 고려했던 모든 요소들을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는 불가능하죠.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전시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며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작품들 사이의 연관성을 하나씩 새롭게 발견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누가 알겠어요? 우리 미술 초보들이 참신한 시선으로 큐레이터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연관관계를 찾아낼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