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모리스의 유토피아 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새로운 노동 개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노동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힘겨운 것이었고, 노동의 결과물은 노동력을 제공한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의 것이었다. 그리고 물품들은 자체의 사용가치보다는 시장에서의 교환가치 때문에 생산되었다. 하지만 교환가치는 사라지고 사용가치만 있는 유토피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용도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83쪽). 교환가치를 위해 수요 이상으로 물품을 많이 만들 필요가 없고,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여 정성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이 낮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제품을 만들 때 기계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수작업이 즐거운 부분은 손으로 직접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협동 작업장에 모여 함께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기질과 재능에 맞는 일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다른 사람의 필요 때문에 희생을 하는 경우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노동하게 할 수 있는가? 유토피아에는 강제 수단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다시 묻는다면 왜 사람들은 열심히 노동하는가? 노동이 고통과 결부되고 일종의 필요악처럼 되어버린 자본주의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게스트도 “노동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노동을 하게 만듭니까?”(78쪽)라고 묻는다. 해먼드 노인은 “노동에 대한 보상은 삶이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소?”(79쪽, 강조는 원저자)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특별히 뛰어난 결과물에 대한 보상도 없지 않느냐고 게스트가 되묻자 해먼드 노인은 “창조라는 보상”(79쪽)이 있으며 노동을 통한 창조는 인간의 천성에서 비롯되는 행위라고 답한다. 19세기 사람인 게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너무나 다른 노동 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 노동이 향유의 대상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었는지 묻는다. 해먼드 노인은 다음과 같이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함으로써 그 답을 대신한다. 혁명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79쪽)이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줘야 반혁명 시도를 막을 수 있는데, “행복한 일상 노동이 없는 행복은 불가능하다”(80쪽). 자본주의가 없어지면서 경쟁이 사라지고 힘든 초과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자 노동이 즐거워지고, 이에 따라 노동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열망이 싹트고 예술이 노동의 필수 요소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예술이 “노동-쾌락”(115쪽)으로 새롭게 정의될 정도로 예술과 노동은 하나가 되고 일상 노동에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향유하게 되자 사람들은 “삶 자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155쪽) 된 것이다.
「예술과 사회주의」에서 모리스는 문명사회의 사람들은 열심히 노동하지만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예술을 잃어버림으로써 노동이 주는 위안, 즉 노동을 통해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한다. 예술은 ‘삶의 진정한 즐거움’인데 임금을 받기 위해서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경쟁 상업 사회에서는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고 그 자체로 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서 즐거운 노동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만 일상 노동 속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고 삶이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이렇게 일상생활과 결부된 예술은 전통적 의미에서 보면 유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생활용품 제작에 주목하는 실용 예술에 가깝다. 게스트가 목격하고 있는 유토피아가 바로 노동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노동인 행복한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이고, 여기에서는 집이나 다리 같은 건축물에서 의복뿐만 아니라 담뱃대 같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모든 것이 예술품이다. 이렇게 노동이 예술화되고 향유 대상이 되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던 게으름은 치유되어야 하는 질병으로 간주된다.
유토피아의 새로운 노동관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노동 자체가 곧 휴식을 담보한다는 점이다. 14세기 풍의 의상과 마차와 배 같은 이동 수단, 수작업에 대한 이상화, 자연과의 평화로운 공존, 작품 말미에서 추수를 앞두고 벌어지는 축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게스트가 목격하고 있는 미래는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물질문명의 시대가 아니며 새로운 것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발명의 시대도 아니다. ‘안식의 시대’An Epoch of Rest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대는 동요와 혼란의 시대 뒤에 오는 평온한 안식의 시대다. 템스 강 위쪽에 사는 이웃들의 추수 노동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추수기에 맞춰 딕이 클라라와 게스트를 데리고 템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 그리고 실내 노동을 많이 한 사람이 기분 전환으로 실외 노동을 하고자 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추수철에 들판에서의 노동을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추수를 맡기고 쉬거나 추수가 축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토피아에서 노동과 안식은 순차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로 결부되어 있다. 게스트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자신이 과거에서 온 사람임을 유일하게 털어놓는 엘런Ellen은 그들의 삶을 “활기 속에서의 휴식”, “즐거움인 노동과 노동인 즐거움”(176쪽)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안식이 노동의 정지 상태라기보다는 노동이 자본주의에서처럼 강요된 고역이 아니라 놀이처럼 즐거운 행위가 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노동과 즐거움이 하나인 시대가 거저 온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유토피아로의 이행은 파업과 공장폐쇄, 무력 충돌 등의 격렬한 갈등을 거치며 이루어진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비이성적인 열정을 닮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90쪽)이다. 자본가계급과의 싸움에서 노동자계급은 오랫동안 좌절하고 실패하며 크나큰 고통을 겪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 연합하는 법을 배우고 노동자 연맹을 결성한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이나 최저임금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 천연자원 운영권을 쟁취하고 특권계급을 연금생활자로 강등시키는 “혁명”(95쪽)을 이룬다. 그러나 이 혁명은 자본가계급에게 전쟁 선포로 받아들여지고, 그 와중에 트라팔가 광장에서 군인들이 비무장 상태의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이 격렬해진다.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은 “평등과 공산주의에 토대를 둔 삶의 체계”인가, “특권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절대적인 노예제”(110쪽)인가를 놓고 계급 전쟁을 벌이고, 여기에서 혁명 세력이 승리하면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품위 있는 삶의 체계가 확립된다. 계급 전쟁에서 혁명 세력을 이끈 것은 “이 나라에서 용감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일소하자”(113쪽)는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와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었다.
결말부에서 사유제의 폭정이 안식과 행복으로, 노예노동 같은 고역이 예술 활동인 즐거운 노동으로, 경쟁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업자본주의가 협력과 자유가 보장되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공산주의로 대체된 유토피아는 게스트가 꾼 꿈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게스트는 그것이 꿈이었을 뿐임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과 투쟁의 시대의 편견과 불안, 불신에 여전히 싸여 있으면서도 외부의 시선으로 그 모든 새로운 삶을 정말로 보고 있었다”(181쪽)고 생생하게 느낀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꿈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이상적인 “비전”(182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꿈꾼 미래의 유토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소식은 무엇인가? 게스트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엘런의 마지막 시선에서 읽어내는 그 전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우리의 일원일 수 없어요. 당신은 불행한 과거에 너무도 완전히 속해 있어서 우리의 행복이 당신을 지치게까지 할지 몰라요.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우리를 보았고,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의심할 여지없는 모든 격언들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해 예비된 안식의 시대, 지배가 협력으로 바뀐 시대가 아직 있음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배웠으니까요. (…) 돌아가서 우리를 본 것에 대해, 당신의 투쟁에 희망을 조금 보탠 것에 대해 더 행복해하세요. 할 수 있는 한 계속 살아가면서 어떤 수고를 들여서라도 협력과 안식과 행복의 새날을 조금씩 건설하려고 애쓰세요.(181~182쪽)
엘런이 게스트에게 전하는 이 전언, 게스트가 유토피아에서 가져오는 이 소식의 핵심은 현실은 불행하고 암울하지만 희망이 아직 있으니 사람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가 협력 관계로 전환되는 안식과 행복의 시대를 열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꿈이 미래를 위한 비전일 수 있다는 게스트의 마지막 생각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한 사람이 품으면 그것은 꿈으로 머물러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공유하면 미래를 위한 비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바로 이것이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을 쓰면서 모리스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전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흔히 ‘99% 대 1%’로 수치화되는 것처럼 빈부 격차가 극명하고, n포 세대로 불리는 청년 세대의 상황이 절망적이고,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이니 인구론인문계 졸업생의 90%가 논다이니 하는 자조 섞인 유행어들이 보여주듯이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산출하지 않는 학문 분야를 괄시하고, 금수저와 흙수저로 계급 격차가 표현되고, 경쟁이 질서이고 노동이 고역인 우리 사회에서, 헬조선이란 자조 섞인 조어로 표현되듯이 지옥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 현재의 우리나라에서 게스트를 통해 전해지는 ‘유토피아로부터 온 소식’은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모리스가 당대 독자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전언은 우리에게도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