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어둠의 왼손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마주 잡은 두 손처럼,목적과 과정처럼. (321쪽)
마지막 행에 ‘과정’으로 번역된 원어는 ‘the way’이다. 이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도’道의 영어 번역어다.1)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원리이자 궁극의 지향점이기도 한 ‘도’는 상반되는 양극이 오른손과 왼손처럼 서로 맞잡을 때 도달할 수 있다. 두 손이 놓인 자리는 ‘위아래’가 아니라 ‘양옆’이다. 그것은 ‘포갬’과 ‘잇댐’이 가능한 위치다. 인간과 세계는 맞잡은 두 손처럼 수평적 교류와 연대를 통해 서로 연결될 때 ‘도’에 이를 수 있다.
작품은 지구인 겐리 아이가 게센인 에스트라벤을 만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참다운 의미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여러 장애를 넘어야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을 가로막는 요인들 중에는 게센 행성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그로부터 연원하는 사회문화적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성과 젠더의 차이가 있다. 속도와 효율성에 익숙하고, 솔직하고 진취적이며, 무엇보다 양성이 분리된 세계에서 ‘남성’으로 살아온 아이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순종적이며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게센인들의 삶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여성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독특한 태도는 번번이 소통의 장애를 일으킨다.
‘겨울 행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게센은 인간이 “자신보다 더 잔인한 적”(146쪽)을 갖고 있는 곳, 사람들의 모든 에너지가 혹독한 추위를 방어하는 데 소모되느라 전사戰士가 되지 못하는 환경이다. 전사가 없는 곳에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와 에스트라벤이 횡단하는 고드윈 빙원은 이 추위를 극단적으로 상징한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고정된 성이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패턴의 성욕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게센인들은 성이 정해져 있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 게센인들의 성의 주기는 26~28일이다. 그 중 21~22일은 성욕이 잠재되어 있는 섹스리스 상태이고 불과 5~6일만 성욕이 활성화된다. 성욕이 다시 살아나는 이 짧은 시기를 ‘케메르’라 부르는데, 이 시기 동안 상대의 성에 따라 여성이 될 수도 남성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누구든 임신을 할 수 있으며, 아버지가 될 수도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성적 유혹은 있지만 상대의 동의 없는 성교나 강간은 없다. 이런 사회에서 성적 이원론에 나타나는 경향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게센 행성에 파견된 에큐멘 대원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게센인의 독특한 성이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게센인들은 “전 생애의 5분의 4 기간 동안 성적으로 전혀 자극되지 않으며” 게센 사회는 “그 일상적 기능에 있어서나 지속성에 있어 성이 없다”(142쪽). 보고서는 이런 무성적 특성이 게센 행성에서 전쟁을 없애는 데 일조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게센인들은 서로 한두 명씩 죽이는 일은 있지만 열 명, 스무 명씩 죽이는 일은 드물다. 수백, 수천명을 살육하는 일은 한 번도 일어 난 적이 없다. 왜일까?”(142쪽) 이 질문에 대한 보고서 작성자의 대답은 두 가지, 혹독한 추위와 지속적인 성적 능력의 부재가 그것이다. 추위가 투쟁정신을 불태워 버렸다면, 장기간의 섹스리스 상태는 사회적 공격성과 조직화된 폭력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실상 ‘일어난 일’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이 르 귄이 이 작품에서 시도하는 ‘사고실험’의 특징이다. 게센 행성에서는 이미 3천년 전에 전기와 기계를 발명했지만 지구에서 산업문명이 일으킨 것 같은 비약적 기술발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추위를 막기 위한 중앙난방은 도입했지만 빠른 운송수단은 개발하지 않았다. 날짐승과 몸집이 큰 들짐승이 없는 이곳에서는 빨리 달린다는 관념 자체가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걸어 다닌다. 탈것의 속도는 시속 25마일을 넘지 않는다. 물건의 교환은 이루어지지만 사적 소유에 기반한 이윤 추구는 없다. 게센인들은 글을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좋아해서 라디오는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신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센은 종교의 영향이 짙게 깔린 사회이다. 카르히데의 종교인 한다라교는 어둠을 숭상하고, 오르고레인의 종교 요메시교는 빛을 숭상한다. 한다라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을 묻지 않는 것, 삶의 불확실성과 무지를 견디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할 때 인간은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이는 파멸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사회경제적 형태로 볼 때 게센은 발전 없는 저성장 사회, 중세가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않고 제퍼슨 식 농본주의적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 봉건사회에 가깝다. 권력형태로 볼 때 카르히데는 군주제를, 오르고레인은 관료제를 택하고 있지만 아이가 지구에서 본 것 같은 중앙집권식 국가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평등과 원시적 권력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곳에도 문제는 있다. 작품의 현재 시점 카르히데에서는 왕의 친척인 티베가 국민들의 원초적 공포감정을 자극하여 이웃 나라와 전쟁을 획책하고 있으며, 오르고레인은 강제 노동수용소를 만들어 주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있다. 두 나라는 각기 권위적 봉건주의와 억압적 관료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게센 행성에서 이 필요성을 공감하는 유일한 인물은 에스트라벤이다. 그는 아이가 제안하는 에큐멘의 이상이 두 나라가 억압적 상황에서 벗어나 보편적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하지만 아이와 에스트라벤 사이엔 아직까지 신뢰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성별 이분법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남성’으로 살아온 아이는 성적 특성을 짐작하기 어려운 게센인들의 모호한 행동 양태를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시프그레서’로 불리는 이들의 독특한 행동양식, “위신과 체면, 지위와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얽힌, 말로 옮길 수 없는 카르히데의 사회적 권위와 게센 문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여성적’ 특성과 긴밀히 얽혀 있다.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러운 에스트라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무언가 비밀을 숨기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면, 에스트라벤은 좀체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이의 이상한 습속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순적이게도 겐리 아이Genly Ai라는 그의 이름은 ‘고통의 울음’을 뜻하지만, 통증을 견디지 못해 흐느낄 때에도 그는 얼굴을 감춘다.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문화적 코드가 그를 감정교류에 극히 둔감한 특이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더욱이 1년 내내 케메르 상태이면서도 한 성만 유지하는 지구인의 욕망이 에스트라벤에겐 매우 낯설고 저급하게 느껴진다. 빙원을 횡단하는 어느 시점에 아이는 에스트라벤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보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 에스트라벤에게서 보고도 애써 못 본 척 해왔던 것을 다시금 보고야 말았다. 그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 두려움의 근원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은 두려움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마침내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에스트라벤을, 그의 진정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 나는 여자인 남자, 남자인 여자 에스트라벤에게 신뢰와 우정을 주고 싶지 않았었다. (337-8)
아이가 이런 감정적 장벽을 넘어선 것은 좁은 텐트 안에서 케메르 상태에 들어선 에스트라벤을 직접 지켜보면서다. 이제 아이는 성적 황홀경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끌리긴 했지만 성적 교류를 하지는 않는다. 성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서로에게 외계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서 멈췄다.”
하지만 이들이 멈춰 선 자리는 이 작품에 쏟아지는 여러 비판들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발표 직후부터 『어둠의 왼손』은 수많은 찬사를 받은 만큼이나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 작품은 남성독자들로부터는 비교적 호의적 반응을 얻었지만 여성독자들에게서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일차적으로 이런 비판은 작가가 에스트라벤을 가리키는 대명사를 ‘he’로 쓴 데서 비롯됐다. 에스트라벤은 남녀 양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남성대명사로 호명됨으로써 여성적 측면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은 비단 인칭대명사의 사용에 국한되지 않고 작가가 에스트라벤을 양성인이 아니라 남성으로 그리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르 귄과 함께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의 선두주자로 호명되는 조애나 퍼스는 “이 소설엔 단 한 명의 여성도 없다”고 단언하며 “여성 없는 유토피아”가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있다.
르 귄은 처음엔 이런 비판에 강력 반발했지만 나중엔 어느 정도 수용한다. 게센인을 그리는 자신의 시각에 여성적 측면이 부족했으며 이성애의 틀을 벗어나지도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말로 한계를 인정하며, 자신은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변화와 함께했었다고 고백한다. 이 작품에 여성적 측면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이성애적 편견이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남성을 제거한 여성만의 세계나 성별 위계질서를 단순히 뒤집어놓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여전히 ‘동일성’의 회로를 벗어나지 못한 여러 소설들에 비해,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공생 가능성을 넓은 시야에서 조명하고 있다.
“걷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다.” 작품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온전한 전체로 살아가기 위해 남성과 여성은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 가야 한다. 이는 비단 성별 관계만이 아니다. 작품에서 에스트라벤이 아이에게 말하듯, 우리가 이원론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방식일 필요는 없다. 작품의 서두에 카르히데 왕국에서 아치 준공식이 열린다. 두 개로 벌어진 다리 사이로 쐐기돌이 놓이면서 무지개처럼 둥근 아치가 완성된다. 이 장면은 주체와 타자, 남성과 여성, 동성과 이성, 삶과 죽음이 만나 하나로 결합하는 장면을 상징한다. 무지개는 지상과 하늘을 잇는 다리다. 둘이 하나가 되는 이 신비로운 결합을 유토피아적 꿈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 이 작품이 들려주는 먼 행성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둘이 만나는 과정이 늘 조화롭지만은 않다는 지적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아니 무수히 많은 ‘여럿들’은 만나야 한다. 소란스럽고 시끄러울지라도. 그 끝 어딘가에서 무지개는 떠오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