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임신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오타가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임신을? 그것도 과학기술을 통해 인위적으로 몸을 바꾼 게 아니라 생래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고? 아니,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고 여자였다가 남자가 되어 언제든 임신 가능성에 열려 있는 존재, 그런 자웅동체적 존재가 지상에 생존한다고?
미국 여성작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이 1968년에 쓴 『어둠의 왼손』최용준 옮김, 시공사은 이 터무니없는 상상을 소설로 실현시켜 본 SF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이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영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장 중 하나”D. R. 화이트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혁명적이다. SF 소설 제목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시적 뉘앙스를 물씬 풍기는 『어둠의 왼손』은 1960년대 미국사회를 휩쓴 성혁명과 페미니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과 젠더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급진적으로 의문부호 속에 넣어 본 작품이다. 2009년 발간 40주년을 기념하여 쓴 서문에서 르 귄은 자신이 왜 이런 불가능한 상상을 소설화하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전쟁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려던 내 마음은 남자가 없는 세상에 도착하게 되었다. 남자 자체가 없는 세상, 늘 남자인 존재, 자신을 증명하려는 존재가 없는 그런 세상에…….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때는 여자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할까?
이게 내가 거쳤던 대략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한동안 성의 본질을 변화시키길 거부한 것을 안다. 그것이 내 이야기의 본질적 요소이자 구동점임을 인정하기 꺼려한 것을 안다.
뭐니뭐니해도, 1968년 당시 그것은 무척이나 낯선 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소설가인 나조차 움찔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성이 없다가 한 달에 한 번 잠시 열기에 빠졌을 때만 성이 생기며 또한 어떤 때는 여자였다가 어떤 때는 남자가 되는 존재의 성적 특성에 대해 단순히 고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그렇게 낯선 존재의 핵심을 알고 또한 그런 존재를 소설에 등장시키려면 꽤 능력이 있어야 했다. 뻔뻔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13쪽)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을 출간함으로써 정신의 “뻔뻔함”과 “능력”을 두루 갖춘 뛰어난 SF 작가로 자신을 증명해 보였지만, 이 소설이 던진 급진적 문제 제기는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적’이다. 전쟁 없는 사회는 인류의 오랜 꿈이다. 어떻게 이 유토피아적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알려면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르 귄의 상상 속에서 남자라는 존재와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전쟁 없는 세상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남자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세계를 상상하며 르 귄이 따라간 길은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걸어갔던 길과는 사뭇 다르다. 르 귄은 여자들만 존재하는 분리주의적 세계나 남성 지배를 뒤집어놓은 여성 지배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가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세계, 그리고 인간의 유적 본질을 구성한다고 믿는 ‘성욕’sexuality 자체가 줄어든 세계를 상상한다. 이런 상상은 비단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적 차이를 새로이 복원하고자 했던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도 호응을 얻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고, 실제로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 젠더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어둠의 왼손』은 소녀 시절 그녀를 매혹시켰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를 상속하고 있다. 그러나 자웅동체적 존재에 대한 상상을 레즈비어니즘과 결합시킨 『올란도』와 달리, 『어둠의 왼손』은 인간의 성욕 자체가 동물적 수준으로 재조정된 세계를 상상한다. 르 귄의 상상 속에서 젠더 구분이 사라진 세계는 동시에 인간의 성욕이 다른 동물들처럼 발정기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지속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성적 욕망에서 벗어난 ‘섹스리스’sexless 세계이다. 인간은 지상에 존재하는 다른 많은 동물들과 달리 일 년 내내 성욕을 충족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극히 예외적인 생물종이다. 사시사철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성기, 이것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그려준 인간의 초상이다. 인간이라는 종에게 성적 쾌락의 추구는 단순히 종의 번식을 위한 자연의 간계奸計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필생의 과업이다. 더욱이 인간의 성욕은 생명체의 ‘결합’만이 아니라 ‘해체’를 통해서도 쾌락을 즐기는 아주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맹목적이다. 이 맹목적 충동을 일정 범위 안에 묶어놓아 공격성을 누그러뜨려야만 전쟁 없는 세상에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이 『어둠의 왼손』을 쓸 당시 르 귄의 머릿속에 떠오른 “뻔뻔한” 상상이다.
다른 글에서 르 귄은 이 “뻔뻔한” 상상을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 부르며 이를 ‘SF’의 장르적 특성과 연결시키고 있다. 본격문학에서 흔히 B급 장르로 치부되는 SF는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미래를 예측하는 문학이 아니다. 예측과 예언은 예언자나 미래학자의 몫이다. SF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현실을 괄호 속에 집어넣고 다른 사회를 그려봄으로써 ‘지금-여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실험해보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만일’이라는 가정법을 써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합의하고 있는 것들을 체계적으로 줄이거나 삭제하는 것을 ‘세계의 축소’reduction of the world라 부른다. SF가 ‘세계의 축소’를 통해 도달하려는 것은 경험적 현실과 다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SF는 다른 모든 소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은유’다. 사고실험은 이 은유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SF가 기존 소설과 다른 것은 우리 시대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학’에서 새로운 은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말했듯이, “신은 꿈의 형태뿐 아니라 기하학의 형태로, 소리의 화음뿐 아니라 순수한 사고의 화음으로, 언어뿐 아니라 수의 형태로 말할 수도 있다.” SF는 “순수한 사고의 화음”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의 은유를 통해 신의 언어를 해석하려는 문학 형식이다. 르 귄은 SF를 미래 예측 소설로 보는 통념에 맞서 SF의 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SF는 과학적 사유를 빌려와 다른 세계를 상상해보는 은유인 한에서 “현대소설 고유의 윤리적 복합성을 희생할 필요가 없으며 판에 박힌 진부한 결론을 꾸며낼 필요도 없다. 사고와 직관은 실험조건에 의해서만 제한된, 실로 광범위할 수도 있는 경계 내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24쪽).
SF에 인문적 상상력과 윤리적 사유를 복원하는 이런 생각은 르 귄의 SF 소설을 과학기술주의에 추동된 대다수 남성작가들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다. 르 귄이 SF에 뛰어들던 1960년대 후반 SF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연애소설과 심리소설을 쓰고, 남성은 SF를 쓴다는 젠더 구획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시절, 르 귄은 남성의 영토인 SF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이 장르를 탈남성화한다. 그는 과학기술주의가 지배하던 SF에 신화와 종교와 민담을 가져오고, 전투적 영웅과 얼굴 없는 대중들이 있던 곳에 피와 살을 지닌 보통 사람들을 데려온다. 또한 그는 20세기 들어와 디스토피아에 자리를 넘겨준 유토피아 문학의 불씨를 되살린다. 그러나 그가 복원한 유토피아는 어떤 모순이나 갈등도 없는 완벽한 사회의 청사진이 아니라, 그 자체 한계와 결함을 안고 있지만 ‘지금-여기’와는 급진적으로 다른 가치·규범·문화에 따라 운용되는 사회다. 탈남성적·탈기술주의적 SF를 유토피아문학과 접속시키고, 이를 도가사상의 영향이 짙게 깔린 무정부주의적 페미니즘문학으로 발전시킨 것에 르 귄의 문학적 공로가 있다. 르 귄은 앞서 언급한 『어둠의 왼손』 4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나는 언제나 페미니스트였지만 언제나 배우는 게 느렸다”고 고백하면서, 이 소설을 쓸 무렵 미국사회를 휩쓴 페미니즘 열기 속에서 자신이 ‘성’과 ‘젠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품고 그는 게센 행성으로 갔다.
게센은 르 귄이 창조한 헤인 우주의 한 행성이다. 헤인은 한 때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지녔던 행성이었으며, 다른 행성에 사절을 파견하여 우주연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은하에 흩어진 헤인인들은 통신수단을 발명하지 못해 연결이 끊어지고 결국 고립된다. 르 귄의 헤인 연작 시리즈는 그 시절을 다루고 있다.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 에큐멘은 수십 광년을 뛰어넘어 실시간으로 교신하는 통신기계 엔서블을 발명함으로써 우주연맹의 기획을 재시도한다. 『어둠의 왼손』은 에큐멘 우주 시대 게센 행성을 방문한 지구인 겐리 아이가 겪는 현지 체험담이자 인류학적 보고서이며, 그가 게센인 에스트라벤과 나누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서사를 끌고 가는 중심인물은 겐리 아이이다. 그는 게센 행성의 두 국가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을 에큐멘에 가입시키기 위해 이곳에 파견된 지구인 남성이다. 출신 민족은 알 수 없지만 검은 피부색으로 보아 흑인임은 분명하다. 그는 독자들이 게센 행성의 낯선 환경과 문화를 걸러낼 여과지로 기능하고 있다. 에큐멘은 인간들 사이의 친선과 사상과 무역의 자유로운 교류를 도모하는 자율적 우주연합체로 이미 83개 행성에 3천개의 국가가 가입해있다. 그러나 2년이 흐르도록 아이는 게센에 온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작품이 시작되는 현재시점 그는 카르히데에 머물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를 지지하는 유일한 인물은 에스트라벤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투쟁에 휘말려 왕의 신임을 잃고, 이웃나라를 돕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오르고레인으로 망명을 준비 중이다. 아이 역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작품은 카르히데에서 오르고레인으로 건너간 아이가 정치적 음모에 빠져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에스트라벤이 그의 탈출을 도와 마침내 카르히데가 에큐멘에 가입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전에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북극의 빙원을 횡단하는 대모험을 감행한다. 이 위험천만한 여정을 완수하여 카르히데에 도착한 후 에스트라벤은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이의 정치적 시도가 성공하여 카르하이데가 에큐멘에 가입하도록 만들기 위한 희생적 결단이다. 아이와 에스트라벤이 고브린 빙원을 횡단하며 만들어가는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는 멜빌의 『모비 딕』에서 인종이 다른 이슈마엘과 퀴퀙이 한이불을 덮으며 만들어낸 우정을 연상시킨다.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절대조건 하에서 두 사람은 함께 썰매를 끌고, 좁은 텐트에서 몸을 포개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면서 서로를 갈라놓았던 불신과 몰이해의 장벽을 넘어선다. 빙원을 횡단하는 어느 시점에서 에스트라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빙원에서 우리는 외톨이이고 격리되어 있으며, 나는 나와 같은 이로부터, 내 사회와 규범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고, 아이 역시 자신의 동료, 사회, 규범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내 존재를 설명하고 지지해줄 게센인이 충만한 세계는 이곳에 없다. 우리는 마침내 평등해졌다. 동등하고, 외계인이고, 혼자다. (319쪽)
이에 응답하듯 아이는 또 이렇게 말한다.
추방된 우리에게 우정은 절실했으며, 그간의 험난한 여행의 밤과 낮을 견디며 잘 확인된 우정을 이제는 사랑이라 불러도 좋았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 사이의 차이점에서 생긴 것이지 유사점이나 닮은 점에서 싹튼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은 갈라진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 유일한 다리였다. (338쪽)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과 문화, 종교적 가치와 성적 관습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한 개인으로 만나 감정적 교류를 이뤄내는 일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마침내, 사랑을 했다! 작가는 이런 사랑의 관계를 유대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언어를 빌려 ‘나-너’의 관계라 부른다. 그것은 상대를 사물로 객체화하는 ‘나-그것’의 관계나 개인이 집단 속에 숨어버리는 ‘우리-그들’의 관계를 넘어 단독적 개체들 간의 ‘만남’을 이뤄낼 수 있는 윤리적 관계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와 너, 주체와 타자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양과 음처럼 서로를 보완하는 전체, 둘로 나눠 있긴 하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 상태를 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품 제목이 함축하는 어떤 세계에 도달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
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321쪽)
(계속)
★「전쟁 없는 사회, 성 없는 사회 ②」는 금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