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1학기 서울대학교 차익종 교수의 글쓰기 강의에서는 색다른 형식의 글쓰기가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저자를 직접 만나 책에 관해 묻고, 인터뷰 형식을 빌어 서평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인터뷰 서평'인데요. 책과 저자, 그리고 학생들의 생각까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되도록 편집 양식을 그대로 살려 게재했습니다. (편집자 주)
돈이 많은 사람을 재벌이라 부르고 학력이 높은 사람을 학벌이라 부른다. 그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모든 장르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신 지식인이면서도 좋은 카페를 찾아 포스팅하는 블로거처럼 좋은 책을 모두에게 알리려 하시는 '책벌'. 최재천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는 포크 대신 녹음기를, 나이프 대신 메모지를 들고, 선생님과 함께 통섭의 식탁에서 코스요리를 상에 올릴 채비를 했다.
셰프 소개 -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최재천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 동물학과를 졸업.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를 거쳐서 하버드 대학원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우리들에게 최재천 선생님이 익숙한 이유는 역시 성실히 연구하시면서도 틈틈이 쓰시는 책을 통해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과학자의 서재, 통섭의 식탁, 개미제국의 발견을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는 자국 과학자가 쓴 과학책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귀중한 양식이 되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석좌 교수로 재임 중이시다.
손님 소개
이지아, 동물생명공학 11
자연과학 중에서도 생물학을 좋아해서, 셋 중에 '통섭의 식탁'을 읽자고 말한 장본인이다. 대학생이 되면 제대로 된 공부를 하겠지 쉽게만 생각하다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 고민이 많아진 헌내기 대학생이다. '과학 반찬'만이 아닌, 다채로운 '통섭의 식탁'에 앉아 지식을 넘어선 인생을 준비하자는 교훈을 얻어와 배가 부르다.
장석규, 사회과학계열 12
딱히 좋아하는 것 없이 고등학교 내내 수능 공부만 설렁설렁 하다 운이 좋아 꿈꾸던 대학에 들어와 버렸다. 새내기 주제에 꿈 없는 대학생의 전형을 있는 그대로 보이며 살고 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내 마음의 양식 상태는 기아 수준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편식도 아닌 영양실조에서 통섭까지 갈 길은 멀지만 한번 꿈을 찾아 도전해보련다. 그래도 아직은 철부지인게 부끄러운 나이는 아니라고 믿는다.
유대종, 철학과 04
처음에는 통섭이라는 단어도 모르고 뛰어들었다. 그리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유람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통섭의 식탁>인터뷰를 통해 내 방향의 완성형 인물을 뵙게 되었다. 04학번인데 여전히 재학생 + 방황의 시간 2년 + 행시 중도 포기 + 단과 강사. 온갖 학문과 기술을 잡다하게 익히던 나의 재료를 이제는 모으고 통섭으로 활용하련다.
샐러드 : 통섭의 식탁이 우리 상에 오기까지
'통섭의 식탁'은 서평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다른 책과는 다른데요. 어떻게 이런 책을 출간하게 되셨는지, 혹시 탄생 비화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사실은 좀 우습게 태어난 책입니다. 타치바나 다카시라는 분께서 십 몇 년 전에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라는 책을 냈어요. 워낙 독서를 많이 하는 분인데 그동안 읽어 왔던 책을 죽 정리한 책이지요. 그 책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요. 그동안 쓴 서평이나 다른 사람 책 낼 때 써준 추천의 글 좀 묶으면 책 한권이 되고도 남을 텐데, 언젠간 나도 그런 책 하나 내야 되겠는데 싶었어요. 그렇게 쓴 글이 그냥 없어진다 생각하니 섭섭했어요.
어느 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같이 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그동안 쓴 서평이나 추천의 글을 묶어서 '과연 책을 읽는다는 일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써 보자고 시작했지요. 그런데 출판사 사람이 자꾸 찾아와서 그 책을 읽을 당시에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물어보더군요. 그렇게 자꾸 하다 보니까 꼬임에 넘어가 옛날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요. 그렇게 묶여 나온 책이 ‘과학자의 서재’에요. 책 얘기를 하려 했는데 어쩌다가 인생 얘기를 해 버린 겁니다.
군데군데 책 얘기가 있긴 하지만 원래 생각했던 책은 아닌 거예요. 좀 우습게 되었죠. 이 나이에 자서전을 쓴 것 같아서 기분이 영 그렇더라구요.
그 책이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던 중에 그 출판사에서 또 왔길래 '원래 내가 하려던 책을 합시다.' 했더니 출판사에서 자꾸 피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은 불러서 '책 안할 겁니까?' 했죠. 그래서 마지못해 내준 것 같았는데, 글쎄 이 책이 더 성공해 버린 거예요. 나중에 출판사 사람이 ‘선생님은 이 책이 더 잘 나갈 걸 아셨어요?’ 물어보더라고요. 나는 “이게 원래 하려고 했던 책이다.” 했죠.
‘통섭의 식탁’은 그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책이에요. 원래 이 책은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통섭이라는 얘기까지 하게 되었나 말하려고 썼어요. 결국은 이러이러한 책들을 읽어 오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니냐 하고 보여주고 싶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서평을 많이 쓰십니다. 서평을 쓰기 위한 독서는 평범한 독서와는 다른 방법이 있나요?
서평은 자원해서 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부탁을 받아 쓰지요. 나는 4년 정도 신문에 서평 칼럼을 썼어요. 서평을 쓰기 시작할 때 신문사와 새 책의 서평을 급하게 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합의를 봤어요.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골라서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인지 그 일은 재미있었어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못 읽은 책이나 주변에서 지인들이 꼭 읽어보라는 책들을 묶어 놨다가 읽고 썼어요. 서평을 쓰다가 짜릿했던 적도 있었어요. 한 3년 전에 나왔다가 몇 권 못 팔고 들어간 책이 갑자기 내가 서평을 쓴 덕에 갑자기 막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기분 좋더라고요. 사람들한테 '이 책을 왜 안 읽었느냐' 한마디 하는 거죠. 읽어보니 좋다는 사람들이 많으면 또 기분이 좋아요.
수프 : '책벌'의 독서는?
선생님께서는 저희보다 훨씬 바쁘실 텐데 어떻게 짬을 내서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또 선생님만의 독서 습관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좀 불편한 질문인데요, 요즘은 거의 공격적인 독서밖에 못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필요한 부분만 쳐들어가서 읽고 빠지는 거예요. 순전히 공격적으로. 그래서 공격적인 독서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책을 한 권 붙들고 그 책을 속속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음미하는 일을 해 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근데 우리나라 책들은 색인이 잘 안 돼 있어서 공격적으로 책 읽기도 힘들어요. 요즘은 독서다운 독서를 못했어요. 대답이 좀 싱거웠네요.
그래도 깊이 봐야 하는 전공 책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를 하면서 읽어요. 그러는 데에는 독특한 방법이 하나 있어요. 책은 사실 논문에 비해 느리잖아요. 어떤 논문이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몇 년 시간이 있어야 하고, 모든 논문이 트렌드가 되지도 않아요. 논문이 책으로 나오면서 확고한 트렌드로 자리 잡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 분야가 불붙었다가 또 사라지고 이러는 것이죠.
그래서 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외국가면 타운마다 좋은 책방이 반드시 있어요. 그곳에 가서 반나절 내지 하루 종일 책 제목만 봐요. 그냥 서서 생물학 쪽 가서 보고, 철학 보고 심리학 보고 뭐 사회학 보고 이런 식으로 꽂혀있는 책들 제목만 쭉 읽고 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떨 때는 다 아는 제목이에요. 그러다가도 ‘어 이건 뭐지?’ 하는 제목이 보이면 하면 잠깐 꺼내서 들춰보고 또 ‘별 볼일 없네’ 하면 다시 꽂아놓고 하지요. 그렇게 하다 보면 학문의 흐름이 읽혀져요.
짬을 내어 독서하기(?) 같은 대답을 예상했지만, 도리어 선생님도 시간이 없어 아쉽다는 싱거운 대답을 얻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수확도 얻었다! 서가에 꽂힌 책 제목만으로 학문의 추세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 번 외국의 책방만 돌아다니는 여행을 계획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피타이저 : 자연 과학 편식? no! 어우러져 밥 먹기!
'통섭의 식탁'에 올라온 수많은 책 중에 소설이며 철학책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 메뉴가 자연과학 책인 만큼 낯선 내용도 많았다. 셰프의 요리를 직접 맛보기 전 ‘메뉴’에 대해 한 마디 질문을 던졌다.
'통섭의 식탁'은 자연과학 책 위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통섭의 식탁’에 앉은 사람이 편식을 하게 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생물학 위주가 아니냐 하는 비판을 받을 법도 해요. 통섭을 처음 꺼냈을 때도 똑같은 비판을 받았어요. '생물학 제국주의자다. 생물학으로 모든 걸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나는 생물학자니까요. 내가 경제학의 관점에서 무엇을 한다 하면 보나마나 금방 밑바닥이 드러나겠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통섭은 자기 학문에서 다른 학문을 보는 것이지 갑자기 다른 학문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그 점에서는 요만큼도 변명할 생각이 없어요. 가끔 비판하시는 분들은 내가 모든 걸 진화론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잘못이 아니에요. 학자로서 내가 아는 대로 해석하고 나서 그 다음에 달리 보는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통섭을 이루는 거예요. 잘 모르는 분야까지 섞어서 두루뭉술하게 이런 관점에서는 이렇게 저런 관점에서는 저렇게 하는 걸 연구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건 정리죠.
한 분야에서, 한 관점에서 문제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를 먼저 명확하게 얘기하면 그때부터는 토론이 되요. 그렇게 여러 분야가 엮이죠. 혼자서 경제학의 관점에서 철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 엮어서 '이것이 세상이다' 결론짓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구요,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볼 수 있는 관점에서 가능한 한 명확하게 딱딱 얘기를 하고 그러면 이제 그거에 대한 비판을 받고 그렇게 점점 간격을 좁혀 나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책에서 통섭의 학문으로 '의생학'을 소개하셨습니다. 생물학과 공학, 인문학이 용합된 학문이라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많이 하던 이야기 아닌가 싶었습니다. 의생학이 '찍찍이, 벨크로 테이프'와 어떻게 다른지, 의생학에 인문학이 어떻게 융합되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의생학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 나만 떠들지 실제로 있는 학문이 아니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biomimetics라고 해서 생체모방학이라 해요. 그런데 '생체모방학'은 학문 이름치고는 좀 유치하잖아요. 그래서 의생학이라 부르자고 했어요. 생체모방학은 너무 좁아요. 예를 들면 벨크로, 찍찍이같은 경우는 자연의 구조만 모방하죠. 의생학은 그 정도가 아니라 '왜 개미사회에는 노조가 없을까? 왜 노사 문제가 없을까' 이런 주제를 연구해서 경영학에까지 적용한다거나, 더 나아가서는 자연의 섭리까지 포함해서 자연을 '표절'하는 큰 규모의 학문이라고 생각해서 ‘의생학擬生學’으로 이름을 붙였어요.
의생학이 생각보다 범위가 넓네요. 개미 사회를 연구한 결실이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습니다.
의생학에 대해 보스턴에서 한 번 특강을 했어요. 거기서 이 학문을 Biomimetics 라고 부르면 너무 범위가 좁다고, 자칫하면 자연을 마구잡이로 베끼게 된다고 했죠. 자연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라고 다 좋을 리는 없잖아요. 진화는 상황에 맞춰서 하는 거니까, 진화가 항상 최선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자연을 그저 모방만 하지 말고, 자연의 아이디어가 진화적으로 어떤지 따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제는 Evolutionary Biomimetics라고 부르자고 했습니다.
책꽂이 둘을 채운 의생학 관련 서적. ‘선생님만의 독서 습관’으로 책장을 죽 훑으면서도 의생학에 대한 책은 이렇게 사두었다고 하신다. |
말씀을 듣고 보니 의생학은 통섭하는 생물학자인 최재천 선생님이 딱 연구할만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부지런한 듯 보여도 알고 보면 열 마리 개미들 중에 둘만 일하고 나머지 여덟 마리는 논다는 개미 사회. 그렇게 진화된 개미 사회는 정말로 가장 효율적일까? 의생학을 이 사회에 적용하면 우리 사회도 개미 사회처럼 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도 선생님으로부터 더 많은 메뉴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질문을 서둘렀다.
자연을 따라하는데, 단순히 모방만은 아니니 '진화 의생학'이라 할 만 하네요. 항상 통섭을 생각하시는 선생님께서 주목하실 만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학문 분야에서 통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섭을 하기위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나 지침이 있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다빈치가 나올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상당한 깊이로 연구하기가 불가능한 세상이지요. 강의하면서 농담조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가 생물학잔데 내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로 되어 있고 그 후에는 대법원장으로 일할 겁니다‘ 그러면 다들 에이이 하고 웃어요. 그렇죠.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물학 중에서도 한 분야를 평생 하기도 벅차요.
그렇다면 이제 통섭은 물 건너 간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통섭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이 아니에요. 옛날 다 빈치는 혼자 통섭을 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통섭은 여럿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을 찾아내야지요. 생물학자와 경제학자와 철학자가 만났는데 어떻게 소통을 할지가 통섭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돼야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