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여러분들이 인문학, 특히 철학 하시는 분들이 엄숙한 어조로 존재가 뭐냐, 무가 뭐냐, 선이 뭐냐, 악이 뭐냐, 진리가 뭐냐, 허위가 뭐냐, 이렇게 물으면 제대로 대답할 분 몇 분이나 되세요? 없어요. 그런데 그 질문이 잘못됐기 때문에 대답을 못하는 거에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지난 한 주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존재나 무라는 말을 다섯 번 이상 써 보신 분 손들어보세요. 뭘 그렇게 조용하세요?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이것', '저것'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 오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보세요.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이것', '저것'이라는 말은 세 살배기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죠? 물론 시골에 계시는 까막눈 어르신들도 다 알아듣는 말이에요.
제가 농사지으러 들어가기 전, 1995년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14년 있었다가 1년 동안 서울대 교환교수로 갔어요. 거기서 대학원 석·박사 과정 학생들한테 존재론이라는 걸 강의했어요. 겁나죠? 존재론. ‘Ontology, 온톨로지’라고도 합니다. 이 존재론이라는 것을 강의했는데, 다섯 마디 가지고 1년을 했어요.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이것’, ‘저것’할 때 ‘것’. 그 강의를 들었던,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철학 교수를 하고 있는 제자가 있어가지고, 얼마 전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출판 기념회 하는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그 때, 내 강의 알아들었어?’ 못 알아들었대요. ‘지금은 알겠어?’ 모르겠대요.
자, 우리가 그러면 ‘있다’, ‘없다’는 말도 모른다? 세 살 배기도 알아듣고, 다 늘 쓰는 말인데. 엄마가 뭐라고 그러면 땡강 쓰지요? ‘아니야’하고. 그런데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리고 힘센 사람들이 힘센 나라에서 들여온 말로 도배가 된 책은 감탄을 하면서 읽는다. 이게 뭐꼬, 이 뭐꼬?
어쨌든 서울대 학생들한테 1년 동안 존재론이라는 것을 강의했는데,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하도 얘기 하니까 잘 봤다, 못 봤다 그런 이야기로 들리는가 봐요. 그래가지고 자꾸 헷갈려요. 근데 진리가 뭐냐, 존재가 뭐냐, 허위가 뭐냐 하고 질문하는 것은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랬죠? 대답 안 해도 되요. 엉터리 질문이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때 참이라고 하고, 어떤 때 거짓이라고 하느냐? 말로 할 땐 참말, 거짓말로 가려지죠? 그렇죠? 여기서 거짓말을 살아오는 동안에 한 번도 안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한번 손들어보세요. 없네요. 그런 왕거짓말쟁이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때 거짓말이라 그러고 어떤 때 참말이라고 그래요? 저기 눈 껌뻑거리고 계시는분?
참 쉬운 질문인데... 그래도 진리가 뭐냐, 허위가 뭐냐 하면 더듬더듬 자기가 몰라도 대답할 수 있으니까 대답을 해요. 그런데 이렇게 쉬운 말로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근데 대답은 아주 간단하거든요? 있는 것을 있다 그러고 없는 것을 없다 그럴 때 참말이지요? 무엇인 것을 이라고 그러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면 참말이지요? 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 그러거나 있는 것을 없다 그러면 거짓말이지요? 인걸 아니라고 그러거나 아닌 걸 이라고 그럴 때 거짓말입니다. 얼른 적으세요. (일동 웃음) 우리가 참 세상을 바라고, 참 교육을 주장하고 이렇게 하면서 참과 거짓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면 되나요? 그러니까 적으세요. 머리에다가 아예 새겨놓으세요. 참과 거짓은 이렇게 쉬운 말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가려볼 수 있다.
그럼 참과 거짓은 가려볼 수 있었죠? 그러면 어떤 때 우리는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그런다고요? 좋음과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어디에 있어요? 그거 다 『철학을 다시 쓴다』에 맨 먼저, 첫 머리에 나와요.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때 좋고, 없을 것이 있거나 있을 것이 없을 때 나쁜 거죠? 우리 몸에 병? 있어야 할 거에요? 없어야 할 거에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쁘죠? 지금 나는 배고픈데 이 강의 때문에 밥을 못 먹었어. 나한테 지금 밥이 필요해요. 나한테 밥은 있을 거, 있어야 할 거에요. 없으니까 나빠요. 배가 고파요.
우리가 말하자면 아이들한테 참 말을 하라, 정직 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마라 하는 것은 좋은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서 그러는 거죠.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상만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달리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자유, 평등, 평화, 우애, 사랑, 관용 이런 것은 있어야 할 거에요, 없어야 할 거에요? 있어야 할 것이죠, 반드시.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전쟁, 탐욕, 착취, 이기심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거에요, 없어야 할 거에요? 없어야 할 것이죠? 없을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죠? 없을 것은 다 없고, 있을 것만 있죠? 그래요.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세상에서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에요. 하나라도 바뀌면, 그건 나쁜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자는 거니까. 거기선 아주 깡보수가 최곱니다.
그런데 있을 것은 없고, 없어야할 거 투성이다. 이 세상이 그렇다, 나쁜 세상이다. 그러면 이때는 어때요? 만일에 있을 것은 하나도 없고, 없을 것으로 전부 이 세상이 채워져 있다면 그때는 당장 뒤집어엎자는 극단적인 진보주의자가, 혁명주의자가 가장 으뜸이지요? 이렇게 진보이념과 보수이념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지 무조건 진보가 좋고, 보수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요, 혹시 ‘어’ 다르고, ‘아’ 다르다 는 말 아시는 분 있어요? 네, 아시는 분 계실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 모르실 거에요. ‘아, 소리가 다르죠.’ 하는 게 대부분 생각일 거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소리에다가 뜻을 담아서 말을 만들지요. 말은 뜻이 담긴 소리지요. 높낮이가 다르고, 길이가 다른 소리들을 끌어내서 거기에다가 하나하나 뜻을 담지요? 그럼 ‘어’ 다르고, ‘아’ 다르다 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우선 ‘이’로부터 출발을 해요. 지금을 한자로 쓰는 지금을 우리말로 하면 뭐라고 그러죠? 이제! 그리고 하루 전날, 예스터데이를 뭐라고 그러죠? ‘어제’ 그리고 Tomorrow, (일동 웃음) 내일을 뭐라고 그러죠? ‘아제’였어요. ‘아제’였는데 우리가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아직도 그 흔적이 ‘아직’이라는 말에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어’는 앞선 것, ‘아’는 뒷선 것이에요. 그렇죠?
그다음에 우리 서울이나 경기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남자형제나 여자형제나 먼저 태어난 사람이 ‘언니’에요. ‘어’에다가 사이시옷 해가지고 ‘이’가 덧붙였을 텐데, 그게 발음이 부드럽게 되느라고 ‘언니’가 됐을 거에요. 그리고 뒤에 태어난 사람은 ‘아우’에요. 아우. 자기가 뒤에 태어났다는 것이. 그래서 ‘아’를 붙이는 거에요. 그것은 ‘어른’하고 ‘아이’의 경우에도 똑같아요.
우리가 시간을 나타낸다, 공간을 나타낸다, 때나 곳을 나타낼 때, 우리 말로 나타내면 실제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고 생각의 줄기가 잡히는데, 힘센 나라에서 들여온 힘센 말들로 그걸 땜질을 하니까 엉클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