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정독도서관에서는 『철학을 다시 쓴다』의 저자 윤구병 선생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알라딘·보리출판사 주최) 책의 구성을 따라 '좋음과 나쁨, '있음과 없음', '함과 됨'을 주제로 총 3회에 걸쳐 진행된 강연이지만, 책 내용을 넘어서 윤구병 선생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펼쳐졌습니다. 그 중 첫 강인 '좋음과 나쁨' 부분을 녹취하여 게재합니다.
윤구병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을 뵈니까 참 좋으네요. ‘참 좋다’는 말 참 좋죠? 일단 제 소개를 드리면요, 제 이름은 윤구병인데, 제가 윤구병이 된 까닭은 오로지 저희 아버지께서 상상력이 없으셔가지고... (일동 웃음) 이런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그리고 고지식한 농사꾼이셨는데, 상상력이 없으셔가지고... 그 ‘병’자는 저희 돌림이에요. 윤가 가문 돌림인데, 첫째 아들이 태어나니까 일병(일동 웃음), 둘째 이병, 셋째 삼병 이렇게 일련번호를 붙이셨어요. 근데 설마 저희 어머니께서 아들만 아홉을 낳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하셨겠죠. 그래서 제가 아홉째로 태어나서 구병인데, 하나 더 낳으셨으면 어떻게 붙이셨을지... (일동 웃음) 상상이 안가요.
저희 아버지가 또 아주 고지식한 만치 남의 말을 잘 믿으셨어요. 우리 옛날 말에 그런 말이 있었대요.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 이 말을 끔벅 믿으셨어요. 그래가지고 1949년에 농사 짓던 땅 정리하고, 집 정리하고 아들 아홉을 끌고 서울로 오셨어요. 저는 김구 선생님 묘소가 있는 효창동 옆에 청파동이 있는데, 그 청파동에 있는 청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사실 저희 동네에서 자랄 때는 제법 똘망똘망하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제 고향 표준말로 제가 못하는 말이 없었어요. (일동 웃음) 근데 서울에 와보니까 죄다 서울 사투리를 쓰는 거에요. (일동 웃음) 선생도 서울 사투리를 쓰고, 애들도 서울 사투리를 쓰고 그래서 제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시골에서 자연아이로 자랐기 때문에, 언제 해 뜨고, 어디에서 해 뜨고, 언제 해지고, 어디에서 해지고 하는 걸 다 알았거든요. 달 뜨는 시간하고 달 뜨는 곳도 다 알았어요. 초승달에서 어떻게 상현달로 바뀌고, 보름달이 됐다가 그믐달로 바뀌는지 다 알았어요. 시간에 대해서, 자연의 시간에 대해서 그 나이에 저만큼 알았던 사람은 서울에 사는 애들 중에 아무도 없었을 거에요. 근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1학년 동안에 도맡아놓고 빵점을 맞았어요. 다른 애들은 즐거웠겠죠, 자기보다 못하는 애가 있으니까, 딱 버텨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유일한 기억이 최고 점수를 맞았던 게 한 번 있어요, 35점. 두 번째로 좋은 것이 17점을 받았어요. 그 다음에는 도맡아놓고 빵점입니다.
여기 시계 보이시죠? 그 선생님들이나 저희 형들이나 집안에서 저에게 시계를 가르치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어요. 도시에 오니까 자연의 시간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시계를 볼 줄 알아야 되요. 그래야 학교를 제 시간에 가고, 직장에도 제대로 가고. 그러니까 시계를 깨우치래요, 이해하라고 그래요. 근데 여기 계시는 분 가운데서 왜 작은 바늘이 일자에 가면 한 시고, 큰 바늘이 일자에 가면 5분인지 아시는 분 있으세요? 그거 이해하시는 분 있어요? 없어요. 사람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니까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거지, 자연의 시간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요? 생명의 시간하고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우리 몸에 있는 인슐린이라는 것이 24시간에 걸쳐서 다른 화학 변화를 하는데, 인슐린을 쥐에다가 똑같은 양을 주사기로 찔러 넣어도 어떨 때는 백이면 백 다 죽어요, 그 시간대에 찔러 넣으면. 근데 다른 시간대에 찔러 넣으면 한 마리도 안 죽어요. 이렇게 자연의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 생명의 시간 가운데 한 갈래로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도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인위적인 ‘24시간’이라는 게 그런 역할을 하나요? 아니죠.
1950년에 2학년 올라가자마자 6.25가 터졌죠.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서고, 전쟁이 벌어져가지고 수백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우리 탓이 아니죠. 그 당시에 사회주의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 자본주의가 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10만 명에 하나도 안됐고, 어느 정도 대강 아는 사람도 만 명에 한명이 안됐어요. 그런데 힘센 나라의 힘센 사람들이 지 멋대로 38선 갈라놓고, 남녘에 있는 우리 동포와 북녘에 있는 우리 동포 등을 찔러서 전쟁을 일으켰단 말이죠. 제일 어린 육병이 형이 열다섯 살이었는데, 그 전쟁으로 형들 여섯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 이거 서울이란 곳이 정말 못 살 곳이구나. 한 번 머리 속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가게 되면 부모도 몰라보고, 형제도 몰라보는 구나. 그래서 이념이라는 것이 머리 속에 잘못 박히게 되면 아버지, 아들도 등을 돌리고, 형제간도 서로 무기를 가슴에 겨누는 구나. 칠병이, 팔병이, 구병이. 이 밑에 있는 애들은 까막눈으로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1.4 후퇴 때 시골로 다시 돌아갔어요. 그래서 제가 4년 동안 학교를 못 다녔어요. 아버지가 아예 까막눈으로 만들어서, 농사꾼으로 만들어서 그나마 남은 씨앗을 보존하겠다고 생각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데 그 4년 동안 학교에 다니지 못한 시간이 저한테 참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가족사적으론 비극이었지만, 그 4년 동안에 저는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익혔어요. 우리가 교육의 공공 목적이라고 할 때, 인류가 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부터 오늘까지 변하지 않는 목표는 딱 두 가지지요. 하나는 사람도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났으니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지요. 바로 뒤에 자라나는 세대한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궁극 목표의 하나입니다. 제가 조끔 어려운 말로, 막 힘센 사람들이 힘센 나라에서 들여온 말들로 해야 더 잘 알아듣겠죠?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은, ‘개체보존의 능력을 육성하는 것’, 그게 교육의 궁극 목표 중 하나에요.
그리고 사람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죠. 여기 대개 앞쪽에 앉은 분들이 범생이에요. (일동 웃음) 그래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필기도구까지 막 마련해가지고 듣고 계시는데... 근데 안경 끼신 아름다운 여자분! 그 안경 스스로 갈아서 쓰셨어요? 스스로 그렇게 가다듬으셨어요? 아니죠. 사람은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죠. 여럿이 실제로는 힘을 모으고, 일거리를 나누어서 필요한 것들을 주고 받고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교육의 궁극목표 중 또 하나는 서로 도와가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줄 것, 그것입니다.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 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이것만 제대로 하면 나머지는 전부 곁가지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교육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전부 곁가지에요.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렀다고 생각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로 도와서 사는 힘을 길렀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보세요. 왜 멀뚱거려요? 에, 한 분이 손을 드셨어요. 그래도 장하십니다. 저도 죄를 많이 지었어요. 15년 동안에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힘도 못 길러주고, 도와서 살 수 있는 힘도 못 길러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