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내겐 너무 완벽한
‘답정너’ 링-슈트라세
빈은, 책으로 말하자면, 유명한 인문학 고전과 비슷하다. 명성 높은 인문학 고전은 모르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다 읽어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게는 플라톤·공자·단테·괴테 등의 책이 다 그랬다. 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내 심정은 그런 책들을 펴들었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빈은 명성만큼 대단해 보였다. 도심의 모든 공간이 영화 속 같았다. 건물은 하나같이 크고 멋졌으며 거리는 넓고 깨끗했다. 상가의 쇼윈도와 사람들의 옷차림에 부티가 흘렀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실내 장식이 화려했고 음식값도 그만큼 비쌌다. 바로크 스타일 건물에 들어선 공공 전시관과 세련미 넘치는 민간 갤러리에는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이 넘쳐났고, 오페라하우스와 음악협회 공연장 등에서는 유럽 최고 수준의 악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롯한 대가의 작품을 공연했다. 호프부르크와 쇤브룬을 비롯해 궁전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빈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만 그런가 해서 그게 더 불편했다. 그런데 빈을 버리고 떠난 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황후도 버거워했던 곳이라잖아!’
인문학의 ‘위대한 고전’을 읽을 때는 서문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야 한다. 멋대로 건너뛰거나 앞뒤를 바꿔 읽으면 더 힘들다. 빈 여행도 그랬다. 무엇부터 봐야 할지, 어디에서 출발해 어떤 곳을 거쳐 어느 지점에서 하루 일정을 끝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키는 대로 다니라든가, 길을 잃어야 여행의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든가 하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단기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탐사 경로는 하나뿐이었다. 링을 따라 걸으면서 안팎을 살핀 다음 버스나 트램을 타고 외곽의 명소를 방문하는 것이다. 숙소가 어디든, 링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던, 그건 상관이 없다.
오스트리아공화국의 공용어는 독일어다. 수도 빈Wien은 영어식 이름 비엔나Vienna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주인구가 2백만 명에 육박하는 대도시지만 빈의 공간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이름난 건축물과 역사문화공간은 도심 순환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 주변에 포진해 있고 외곽은 대부분 상업지구와 주거단지다. 빈 사람들은 링-슈트라세를 간단히 ‘링’이라고 한다. 링은 이렇게 말했다. ‘답은 정해져 있어. 넌 걷기만 해!’
우리는 첫날 아침 호텔 프론트에서 대중교통 수단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72시간짜리 ‘빈카르테Wienkarte, 비엔나 카드’를 구입했다. 링의 북서쪽 구간 보티프교회 앞에서 출발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해가 저물 때 멈추었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그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흘 내내 주로 걸어 다니면서 다리가 아프거나 멀리 나갈 때만 잠깐씩 트램과 버스를 탔다. 맨 먼저 구도심 중심부의 슈테판 성당 근처를 보았고 이틀 동안 링을 따라가면서 빈대학교, 시청사, 부르크 극장, 국회의사당, 호프부르크, 예술사 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제체시온, 오페라하우스, 바그너 기차역, 콘체르트하우스, 시립공원, 응용예술 박물관, 연방정부청사와 도나우 운하까지 제법 많은 곳을 방문했다. 베토벤 기념관과 음악 박물관,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나머지 이틀은 쇤브룬 궁전과 벨베데레 궁전, 훈테르트바서하우스, 도나우 타워 같은 외곽의 역사문화공간을 보았다.
살아 있는 화석, 슈테판 성당
오래전 처음 빈에 갔을 때, 어설프게 알면 아예 모르느니만 못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슈테판 성당이 독일어로 슈테판스‘돔’Stephans‘dom’이니까 지붕이 반구 형태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돔’은 가톨릭의 대주교좌 성당을 가리키는 말일 뿐 지붕의 모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독일 사람들이 ‘쾰르너돔’이라는 하는 쾰른의 대성당에 쏟아져 내릴 듯 무시무시한 고딕 첨탑이 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슈테판 성당은 링의 중심에 있다. 이곳을 탐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사라져 버린 ‘1857년 이전’의 풍경을 상상해 보고 싶어서였다. 왜 하필이면 1857년인가? 황제가 수백 년 동안 빈을 둘러싸고 있었던 대성벽을 헐어내기로 결단한 게 바로 그때였다. 도시는 생물처럼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대성벽의 해체는 빈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작고 낡은 중세 도시였던 빈은 고치에서 빠져나온 나비처럼 날개를 활짝 폈고 19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했다.
슈테판 성당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온몸에 지니고 있다. 원래는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는데 큰불이 나서 무너졌다. 그 자리에 14세기 초부터 2백여 년 걸려 새로 성당을 지었는데 종교 건축양식의 유행 변화를 받아들여 중앙 회랑과 지붕을 고딕 양식으로 바꾸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은 성당 전면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길이 107미터 너비 34미터, 축구장만 한 땅을 딛고 선 본당 건물에는 첨탑이 넷 있는데 남탑인 슈테플Steffl, 슈테판의 애칭이 136미터로 단연 높다. 벽돌을 생선 뼈 모양으로 짜 맞춘herring bone 지붕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 ‘쌍두雙頭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내부시설은 권력자의 취향과 유행에 따라 여러 차례 달라졌지만 중앙설교대를 비롯한 중심 공간을 고급 대리석과 화려한 귀금속으로 꾸민 것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빈 시민들은 슈테판 성당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지만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나 이스탄불 아야소피아를 본 사람이라면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한 도시에서 종교 시설은 하나만 본다는 원칙에 따라 빈에서도 슈테판 성당 한 곳만 꼼꼼히 살펴보았다. 초기 고딕 성당답게 내부에 기둥이 많았고 기둥마다 크고 작은 조각상이 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수수해서 그런지 분위기는 편안했다. 어디서나 그렇듯 관광객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중앙 설교단 주변에 몰려 있었다.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른 네 사람의 신부, 악을 상징하는 도마뱀과 두꺼비, 짖는 개를 비롯한 조각상들은 오늘날 체코공화국에 속하는 모라비아 출신 예술가 안톤 필그림Anton Pilgrim이 내부 장식을 설계했던 16세기 빈의 귀족들이 어떤 종교적 관념과 문화적 취향을 지니고 있었는지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럽의 크고 오래된 성당들이 대개 그러했듯 슈테판 성당도 왕가의 영묘였다. 중안 제단 가까이에 놓인 프리디리히 3세1415~1493의 대리석 관에는 모음 다섯 개A.E.I.O.U.가 새겨져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존재하리”라는 라틴어 문장 또는 “온 세상이 오스트리아에 복속하리”라는 독일어 문장의 단어 첫 글자를 적은 것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반을 만들었고 교황과 좋은 관계를 맺어 이곳을 대주교좌 성당으로 승격시킨 왕이었으니 거기에 관이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왕 노릇 하기를 힘겨워했고 헝가리의 마차시 1세한테 도시를 빼앗기고 쫓겨나기도 했던 사람의 관에 새길 문장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황제와 가족의 시신을 안치한 성당 지하의 카타콤베Katakombe는 고대와 중세 기독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열망을 드러낸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심판과 부활의 날에 대비해 시신을 보존하려고 장례 방식을 화장에서 매장으로 바꾸었는데, 그게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제국이 번영하자 로마는 인구가 늘어났다. 사망자도 따라 늘었지만 묘지는 무한정 넓힐 수 없었다. 그래서 성당 가까운 곳에 지하 묘지를 만들었다. 순교자나 성인들 근처에 있으면 부활의 날이 왔을 때 뭐라도 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타산 때문이었으리라. 카타콤베 관람은 권할 뜻이 없다. 방부 처리한 왕족의 장기를 담은 항아리, 페스트로 죽은 이들의 뼈가 켜켜이 쌓인 광경을 굳이 따로 입장료까지 내면서 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슈테판 성당은 파리의 노트르담처럼 종교 행사와 국가 의전을 연 권력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양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은 여기서 모차르트를 떠올린다. 그의 화려한 결혼식과 초라한 장례식이 모두 여기서 열렸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독자들이 노트르담에서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역사 덕후라면 성당 외벽의 금속 표준자와 둥글게 패인 홈에 시선을 줄 것이다. 옷감이나 빵을 거래할 때 길이와 크기를 확인하라고 만들어 두었다고 하니, 성당 광장 주변에 시장이 열렸고 수량을 속여 고객을 등치려는 장사꾼도 많았음이 분명하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표준을 제정하고 도량형을 통일한 왕들이 떠올랐다. ‘그렇지. 거래 질서를 확립해서 산업을 진흥하고 사회적 평화를 이룬 군주는 역사에 남을 자격이 있어!’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광장으로 나오니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날은 7월 중순인데도 찬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흩날렸다. 긴 소매 옷을 입고 후드를 눌러쓴 사람들이 이어폰을 꽂은 채 서성이면서 이따금 앞이나 옆으로 스마트폰 쥔 손을 쭉 뻗곤 했다. ‘좀비 플래쉬몹이라도 하는 건가?’ 알고 보니 그들은 휴대전화로 증강현실AR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슈테판 광장은 원래 놀이터였다. 중세에는 거기서 부활절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축제를 열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우리는 놀이를 즐기는 종이다. 뭘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만 달라질 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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