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인 석양
아무도 없는 주택단지의 공원에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다. 눈앞에는 당장이라도 저물 듯한 석양이 보였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붉은 태양.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춘 어머니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어머니의 옆얼굴이 노을빛에 물들어 붉었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나는 어머니와 함께 바라보았다.
그런 기억이 있다. 특별한 일은 전혀 없었고, 그저 함께 석양을 바라보았을 뿐인 기억. 발음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으니 세 살에서 다섯 살 사이에 있었던 일 같다. 수없이 떠올린 그 기억은 해가 저무는 속도처럼 느릿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간다.
철이 들던 유년기부터 중학생 때까지의 일은 기억에서 전부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석양을 바라봤다’는 기억만은 남아 해가 갈수록 짙어졌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뒤에는, 내가 석양이나 빛에 이끌리는 건 혹시 이 기억이 내면 깊숙한 곳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도 불분명했던, 거의 내 망상에 가까운 기억이었는데.
*
두 살이 될 무렵, 내 귀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선천적인 감음성 난청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장애인 수첩에는 “감음성 난청에 의한 청각장애(좌: 100dB, 우: 100dB)”좌우 귀가 모두 100데시벨 이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의미다. “음성·언어 기능 장애”라고 기재되었다.
의학적으로 청각장애는 크게 ‘전음성 난청’, ‘감음성 난청’, ‘혼합성 난청’으로 나뉜다.
‘전음성 난청’은 고막에 상처가 나거나 중이中耳에 물 혹은 고름이 고이는 등의 이유로 소리가 통하는 통로가 막혀서 일어난다. 귀를 막고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수술 또는 약물로 낫는 경우가 많고, 보청기를 사용해 소리를 키우면 회복되기도 한다.
‘감음성 난청’은 내이內耳와 청신경聽神經 등 소리를 느끼는 ‘감음기’에 장애가 있어 일어난다. 사람의 내이에는 달팽이관이라는 기관이 있고, 이 달팽이관의 유모세포가 소리를 감지한다. 유모세포의 수가 줄어들어 소리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을 감음성 난청이라 한다. 소리가 일그러져 들리거나 소리가 들리는 범위가 좁다는 특징이 있다. 전음성 난청과 비교하면 소리가 갈라져서 들리는 등의 이유로 보청기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
전음성 난청과 감음성 난청의 기능장애를 모두 겪는 것을 ‘혼합성 난청’이라고 한다. 고령자의 난청은 혼합성인 경우가 많다.
100데시벨db의 청력은 ‘귓가에서 울리는 큰 소리가 간신히 들린다.’ 혹은 ‘자동차의 경적이 조금 들린다.’ 하는 수준이다. 일상적인 소리는 60데시벨 전후이기에 전혀 들리지 않는 셈이다. 보청기를 이용하면 청력이 50데시벨가까운 거리에서 조금 크게 말하는 소리 정도가 된다고 한다.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보청기를 끼고 발음훈련에 열중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고 어머니에게 들었다.
입 모양이 틀렸어. 혀의 위치가 틀렸어.
숨을 내쉬는 법이 잘못됐어. 숨을 토하는 힘이 잘못됐어. 목구멍의 떨림이 잘못됐어.
뭐야, 그 목소리는. 완전히 틀렸어.
혀를 더 구부려. 내 입 안을 봐.
숨을 더 짧게 토해. 아, 아니야. 좀더 길게 토해야 해.
더 잘 들어봐. 소리를, 들어, 이게 올바른 발음이야.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 그렇게 발음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 거야.
낮에는 ‘듣기와 말하기 교실’에서, 밤에는 집에서, 밤낮없이 발음훈련을 했다.
아무리 열심히 말하고 들으려 해도 스스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발음을 질책당하고 교정당했다.
유년기 내내 나는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모를 발음훈련 선생님의 귀를 향해 두려움에 떨면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발음훈련이 무의미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음성을 타인의 귀에 내맡기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타인의 귀에 의해 내 목소리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 이런 일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죽여버렸다.
발음훈련 선생님이 항상 화냈던 것은 ‘사시스세소さしすせそ’ 발음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사루’를 ‘타루’로 발음하는 것 같았다. 항상 ‘사시스세소’ 발음에 막혀서 혼났기 때문에 그 소리들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공포심이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사시스세소’가 포함된 단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스미마센미안’은 ‘고멘’, ‘도시테어떻게’는 ‘도얏테’, ‘시아와세행복해’나 ‘우레시기뻐’는 ‘요캇타다행이다’하는 식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보다 듣는 이의 귀에 잘 들릴 법한 말을 골랐다.
어른들의 관심은 항상 내 발음으로 쏠렸다. 내가 “저건 뭐야?” “어디로 가는 거야?” 같은 소소한 호기심을 그대로 입에 담으면, 일단 발음 자체의 좋고 나쁨에 대한 주의부터 받았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수많은 호기심이 도마 위에 올라간 채 흐지부지되었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고 어른들이 제대로 답해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기억만 남아 있다. ‘잘 들어야 해. 제대로 말해야 해.’ 이런 압박에 조바심만 내느라 대화의 내용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대화를 할 때마다 긴장했다.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든 목소리를 내고 들을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내 말을 잘못 듣지 않았을까.’ 생각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당시의 내게 대화란, 감정이나 생각을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발음해야 해.’라는 의무감으로 하는 행위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프로축구가 크게 유행했다. 나는 ‘사커’가 정말 싫었다. 경기로서 사커가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어려워하는 발음인 ‘사’ 때문이었다. 별일 없이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상대방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면 알았다. 게다가 “타커? 아커? 아, 사커, 깔깔깔,” 하고 잘못 들은 척하는 놀림을 종종 받았다. (내가 듣지 못하는 걸 놀릴 때는 나도 알기 쉽도록 입을 무척 크게 벌리면서 말한다. 왜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느냐고 화가 날 정도로.) 간단한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는 게 비참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내 마음과 전혀 다른 말이 입에서 나가게 되었다. 상대방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도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네.” “알았어요.” “응.” 하고 수더분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임시방편의 말들이 주룩주룩 새어 나갔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무슨 말을 들어도 대답은 전부 “네.”라서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내게, 말이란 쓰고 버리는 일회용이었다. 지금은 안다. 말을 쓰고 버리는 것은 마음을 쓰고 버리는 것이라는 걸. 마음을 쓰고 버리다 보면 점점 터진 곳이 드러난다. 그 터진 곳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력이 빠져나갔다.
발음훈련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무척 깨끗하게 발음했구나.” 같은 칭찬도 곧잘 들었다. 그럴 때는 ‘다행이다. 나는 듣는 사람이 되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불안을 달랬다. 그 칭찬의 말 앞에 ‘듣지 못하는 것치고는’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칭찬을 받았다 했지만, 청인聽人, 듣는 사람처럼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은 아니다. 단편적인 말이 두서없이 오갈 뿐이라 대화가 끝나면 역시 ‘전혀 통하지 않아.’라는 느낌만 남았다. 아무리 해도 나는 가짜 청인에 불과했다.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제대로 주고받았던 ‘목소리’도 있었다.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자세한 일을 기억해낼 수가 없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 소중히 여겨야 할 ‘목소리’였다. 대수롭지 않은 사람과 나누는 하찮은 대화를 ‘평범하게’ 해내야 한다는 저주 같은 의무감 때문에 그 ‘목소리’가 봉인되어버린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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