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첫 기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 살이나 되었을까
별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음색音色
시월에는
물드는 잎사귀마다 음색이 있어요
봄과 여름의 물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빛의 이글루인 보름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섞여 있던 초록들은 누구의 헛간으로 갔을까요
나는 갈대의 흰 얼굴 속에 있었어요
마른 잎에서는 나의 눈을 보았어요
얇고 고요한 물, 꺾인 꽃대, 물에 잠기는 석양
그리고 그 곁엔
간병인인 시월
종소리
해 질 무렵이면 종소리가 옵니다 내 사는 언덕집에 밀려와 곱게 부서집니다 나는 이 종소리를 두고 숨어 살 수가 없어 손 놓고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낮에 보았던 무덤 생각이 났습니다 산속에 혼자 사는 무덤 묏등에는 잔설이 햇살에 녹고 있었습니다 나는 묏등으로부터 흰나비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물을 한 컵 마시고 숨을 돌리고 있을 때에 종소리가 왔습니다 종소리는 내 앞에 하얀 바탕을 펼쳐 보입니다 종소리는 수산리水山里에서 생겨나 내 사는 장전리長田里로 오는 것 같으나 누가 어디에서 당목唐木으로 종을 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종소리가 오는 곳을 찾아 나섰다가 도중에 길머리에서 돌아왔습니다 종소리는 목깃이 까매진 나의 저녁을 씻깁니다 그리고 종소리는 내내 남아 잠든 아이의 방을 둘러보고 가는 어머니처럼 나의 혼곤한 잠 속을 맴돌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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