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96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도쿄에서 열린 소련 회화전에서 아르히프 쿠인지의 19세기 말 작품인 「우크라이나의 저녁」에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 그림은 언덕 경사면에 하얀 회반죽을 바른 벽과 초가지붕으로 지어진 소박한 농가 두서너 채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어, 첫눈에 그냥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이후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들으면 언제나 뇌리에 그 그림이 떠올랐다. 이후 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따로 공부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외무성에 들어가 30년이 지난 뒤에도 우크라이나에 관해 아는 것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1996년 어느 가을날. 나는 주駐우크라이나 대사로 임명됐다. 새로운 부임지로 출발하기 전, 관계자와 지인들에게 인사하고 조언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하면 학교에서 배운 ‘곡창지대’라는 단어부터 머릿속에 떠올렸다. 간혹 몇몇 사람은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베스트셀러 『악마의 선택』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상선이 흑해에서 구한 표류자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 파르티잔의 리더임이 탄로 나는 한편, 미국의 정찰위성이 소련의 곡창지대에서 밀 작황의 이변을 감지하고 대통령이 조사를 명령하는 첫머리로 시작되는 장대한 스파이 서스펜스다. 어쨌든 「우크라이나의 저녁」이나 ‘곡창지대’나 모두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통된 이미지는 농업국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나는 농업국에 부임한다는 생각으로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막상 실제 살아보니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임에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대국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우크라이나가 1991년 독립하기까지 몇 세기 동안이나 나라를 갖지 못하고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 아닐까. 러시아에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키예프 루스 공국 이래로 쌓여온 러시아의 역사 문헌은 그 양이 매우 많다. 도스토옙스키, 고골, 차이콥스키의 나라인 러시아에 문화가 없다거나 스푸트니크 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를 두고 과학기술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키예프 루스 공국의 수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 있었다. 고골은 코사크의 후예이자 순수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조부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이며, 차이콥스키도 매년 우크라이나 카미안카에 있는 여동생의 별장에 머물면서 그 지역 민요를 바탕으로 「안단테 칸타빌레」 등 다수의 명곡을 작곡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선조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한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세르게이 코롤료프 역시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 우크라이나에는 역사와 문화, 과학기술이 존재하는데도 이 모든 것이 러시아·소련의 역사와 문화, 과학기술에 포함되어 그 영예마저 러시아·소련에 귀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세계 속에서 러시아·소련 내부에 있는 곡창지대로만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의 권위적인 역사학자 오레스트 수브텔니는 우크라이나 역사의 최대 주제는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즉, 거의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요 주제가 민족국가의 확보와 그 발전인 것에 비해 우크라이나에서는 국가의 틀 없이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역사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우크라이나에도 국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략 등으로 키예프는 쇠퇴하고 말았고, 소위 분가에 해당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여 슬라브의 중심은 여기로 옮겨졌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역사상으로도 키예프 루스 공국은 우크라이나인의 나라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발상의 나라로 받아들이게 됐다. 다시 말해, 모스크바에서 발흥한 나라가 훗날 대국이 되어 자국을 러시아로 명명하고, 키예프 루스를 잇는 정통 국가라고 자칭하며 나섰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나라 없는’ 민족의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없다’는 큰 결점과 언어와 문화 및 관습이 매우 유사한 대국인 러시아를 이웃으로 두고 있었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을 키워갔다. 우크라이나는 코사크 시대의 독창적인 역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병합된 후에도 러시아 역사 속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크라이나의 내셔널리즘은 점점 고조됐다.
그리고 마침내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을 맞이했다. 독립 후 사람들은 아직도 유럽에서 이런 대국이 나올 여지가 있었느냐며 매우 놀라워했다. 국토 면적으로 따지자면, 유럽에서는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독립 당시의 인구는 5200만 명으로 러시아,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뒤를 이었고, 스페인과 폴란드의 인구수를 훨씬 웃돌았다. 이렇게 유럽에서 50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국가가 성립된 것은 19세기 후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산업으로는 먼저 농업을 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지 면적은 거의 일본의 총면적에 이르고, 농업국 프랑스 경지 면적의 2배나 된다. 그래서 만약 21세기에 세계적 식량 위기가 일어난다면 그 위기에서 구해줄 나라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를 꼽을 정도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단순히 유럽의 곡창이기만 한 게 아니라 대공업 지대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흔히 구소련의 첨단 기술이 모두 러시아로 계승됐다고 생각하지만, 예를 들어 SS-19나 SS-21과 같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우크라이나에서 만들어졌다.
예술 및 문화, 스포츠 분야의 수준도 높다. 특히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의 음악가를, 발레 무용수인 바츨라프 니진스키, 아방가르드 회화의 창시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을 탄생시켰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장대높이뛰기 선수 세르게이 부브카, 피겨스케이팅 선수 옥사나 바울 등을 배출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명백히 존재하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몇 세기 동안이나 마치 지하 수맥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 소련 제국의 붕괴와 함께 마침내 샘처럼 지표면에 드러났다. 현재는 세계 각지에서 ‘우크라이나의 발견’ ‘우크라이나의 복권復權’이라고 부를 만한 움직임마저 일어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러시아와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유럽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미국과 캐나다에는 우크라이나계 이민자가 각각 100만 명 이상 거주하고 있어 우크라이나에 관한 관심은 높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에서는 독립 국가 우크라이나를 향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의 서쪽 끝에 위치하여 일본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구소련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주로 러시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본에 우크라이나의 사정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점도 큰 영향을 줬으리라. 나는 내가 우크라이나를 ‘발견’한 것처럼 일본에서도 우크라이나가 ‘발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우크라이나를 소개하는 책을 쓰려 마음먹었고, 한 나라나 민족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이므로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이 나라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쓴 동기이며, 독자들도 우크라이나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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