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디 가세요?”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물었다. 마이애미에서 몬트리올로 가는 비행기를 함께 탄 우리는 우연히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로 가는 연결 편에서 나란히 앉게 되었다. 2월 초순, 그 남자는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뉴펀들랜드주 갠더에요.” 내가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지역 특유의 억양이 별로 느껴지지 않아 남자는 내가 뉴펀들랜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왜 한겨울에 마이애미에서 갠더로 가요?”
확실히 일리 있는 질문이다. 내가 떠날 때 마이애미는 기온이 약 섭씨 29도로 덥고 화창했다. 기상예보에 따르면 갠더는 기온이 영하 23도 안팎이고, 체감온도는 영하 34도 정도 될 거라고 했다.
“오해는 마세요, 뉴펀들랜드 사람들 좋습니다”라고 남자는 재빨리 덧붙였다. “제가 거기 살았거든요. 아마 선생님이 여태 만나 본 중에 제일 친절하고, 제일 특이한 사람들일 거예요.”
토목 기사라는 그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을 뒷받침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뉴펀들랜드주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그 외딴 마을에 파견 간 작업반이 있었어요.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육로가 아예 없거든요. 호텔도 없고. 그래서 팀원들은 거기서 일하는 동안 현지 주민 집에서 함께 지내요. 그때 숙소를 제공해 준 부부가 워낙 잘 대해 주셔서, 작업이 끝나고 나서 회사에서 보너스로 여행 경비 일체를 부담할 테니 플로리다에서 일주일 휴가를 보내지 않겠냐고 제안했죠.”
그다음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분들이 거절하시더군요. ‘플로리다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저희가 뭐하러 거길 가겠어요?’라면서. 그럼 다른 데라도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비행기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을을 얘기하시더라고요. 그곳에 친구들이 사는데 한동안 못 만났다고요. 그래서 그렇게 해 드렸죠. 바로 옆 마을에 가는 항공권을 드리고, 친구들과 일주일 휴가를 보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항공권도 드렸어요. 그게 인생 최고의 휴가였다고 하시더군요. 뉴피뉴펀들랜드인을 줄여 부르는 말로 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가 그렇다니까요.”
그러고 나서 남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참, 9·11 테러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죠?”
(중략)
9·11은 여러모로 역사에 남을 사건이었다. 미국 영공을 폐쇄하고 운항 중이던 모든 비행기를 즉시 접근 가능한 가장 가까운 공항에 착륙시킨 일도 그랬다.
“저 빌어먹을 비행기 다 끌어내려.”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교통부 장관 노먼 미네타가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미네타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저 말을 내뱉던 때는 이미 아메리칸항공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하고,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은 남쪽 건물에 부딪치고, 아메리칸항공 77편은 펜타곤을 들이받은 후였다. 잠시 후에는 네 번째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이 피츠버그 남부 농촌 지역의 들판으로 돌진할 예정이었다. 연방항공국이 미국 영공을 폐쇄하라는 공식 명령을 내린 시각은 동부 일광 절약시EDT, Eastern Daylight Time로 오전 9시 45분이었다.
그로부터 몇 분 뒤 나온 미네타의 격한 발언은 단지 상황을 강조한 것뿐이었다.
98년에 걸친 미국 항공 역사에서 그런 명령은 처음이었다. 세스나 같은 자가용 경비행기에서 초대형 여객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미국 상공에서 운항 중이던 민간 항공기 4546대가 저마다 착륙할 곳을 찾느라 허둥지둥했다. 하지만 영공 폐쇄 명령이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대상은 대부분 유럽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미국으로 비행 중이던 국제 항공편 약 400대였다.
비행기 중 일부는 출발지로 회항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캐나다에 착륙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국 국경을 보호하려는 의도라고 정당화하긴 했지만, 미국 정부는 그 비행기들이 안고 있을 잠재적인 위협을 손쉽게 이웃 나라에 떠넘기고 있었다. 캐나다 당국은 그중 어느 항공기에 테러범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양국 법 집행기관 모두 그중에 테러범이 잠복한 비행기가 있을 것으로 의심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주저 없이 갈 곳 잃은 비행기를 받아들였다.
승객 4만 3895명을 실은 항공기 250여 대가 서쪽으로는 밴쿠버에서 동쪽으로는 세인트존스에 이르기까지 캐나다 15개 공항으로 방향을 돌렸다. 미국행 비행기는 핼리팩스, 토론토, 오타와, 몬트리올, 위니펙, 캘거리에 착륙해야 했다. 도시마다 고립된 승객에게 숙소와 갈아입을 옷, 음식을 제공하고 관광까지 안내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도움을 주려는 자원활동가와 사회복지기관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중 어디든, 현지인이 베푼 친절에 관해 쓸 만한 이야기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 무대는 지난겨울에 내가 계절에 맞지 않는 여행을 했던 곳, 뉴펀들랜드 중앙 고원지대에 있는 갠더다. 9월 11일, 겨우 1만 명 정도가 사는 그 도시에 승객과 승무원 6595명을 태운 비행기 35대가 착륙했다.
거의 일주일 내내, 갠더와 주변 작은 마을인 갬보, 애플턴, 루이스포트, 노리스 암 등지에 사는 남녀노소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다들 낯선 이를 위해 생업을 뒤로 미루면서도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런 인간애가 남아 있으리라 믿기 어려운 시대에 인간의 선한 본성을 뚜렷이 드러내 보여 주었다. 테러범이 서구 사회의 허약함을 드러내려 공격을 감행했다면, 갠더에서 일어난 일은 반대로 강인한 면모를 증명해 냈다.
첫째 날
9월 11일 화요일
01
록샌과 클라크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두 살 여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텍사스주 작은 마을인 알토 외곽에 있는 목장을 떠나 구소련 국가인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향한 지 거의 3주가 지나고 있었다. 준비하는 데만 15개월 넘게 걸린 이 여행에서 젊은 부부는 공항을 여러 번 거치고, 울퉁불퉁한 길 위를 달리고, 우랄산맥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록샌이 어느 날 인터넷에서 본 사진 속 아이를 만나기 위해, 부부는 세 나라의 관료를 상대하고 평생 모은 돈을 쏟아부었다. 그래도 이제 알렉산드리아를 얻었고 저녁이면 집에 도착할 테니, 그 모든 시간과 돈을 들일 보람이 있었다.
지난 72시간 동안 카자흐스탄을 떠나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크푸르트까지 이동한 세 사람은 이제 마지막 여정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댈러스로 향하는 직항을 타고 있었다. 셋 다 내내 잠을 잘 못 잤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알렉산드리아는 좌석을 빠져나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자려고 했다. 록샌은 아이를 일으켜 다시 좌석에 앉힐까 생각했지만, 아이가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몸에 익은 방식대로 바닥에서 자는 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들 가족을 태운 루프트한자 438편이 프랑크푸르트 서북쪽 9000미터 상공으로 날아오를 때, 루프트한자 400편에서는 일등석 탑승이 시작되었다. 프랑크푸르트시장 페트라 로트는 뉴욕을 방문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좌석을 찾아 앉았다. 그날 저녁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를 위한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로트와 줄리아니는 상대 도시를 공식 방문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퇴임하는 시장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로트는 기꺼이 6500킬로미터를 이동하기로 했다.
로트 근처에는 독일 본사에서 뉴욕으로 가는 휴고보스 회장 베르너 발데사리니가 타고 있었다. 세계 최고 디자이너 백여 명이 8일 동안 초대형 장막 안에 설치한 런웨이 위에서 신작을 선보이는 의류와 모델의 향연, 패션 위크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패션 위크 쇼를 잘 치르면 신상품은 성공이 보장된다. 발데사리니는 화요일 저녁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휴고보스 2002년 봄 신상품을 공개할 예정이었다. 이번 행사는 휴고보스의 사업으로서만 아니라 발데사리니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27년을 휴고보스에서 보낸 발데사리니는 이듬해에 은퇴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공식 기사를 내보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이 될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싶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승무원이 이륙을 앞둔 로트와 발데사리니에게 샴페인을 한 잔씩 건네줄 때,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더블린에서는 조지 비탈레가 콘티넨털항공 23편 이등석에 자리를 잡았다. 뉴욕 주지사 조지 퍼타키의 경호원인 비탈레는 9월 말 주지사 방문을 앞두고 사전 보안 조치를 하러 그달 초에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북아일랜드에서 새로운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되었고, 뉴욕주 경찰대도 철수 명령을 받았다.
비탈레는 원한다면 아일랜드에 남아 친지를 만날 수도 있었다. 마흔네 살인 이 남자는 부모 쪽 한쪽이 아일랜드인으로, 지난 수년 동안 수차례 이 에메랄드섬아일랜드의 별칭이다.을 방문했다. 하지만 휴가를 즐길 때가 아니었다. 브루클린에 돌아가서 처리할 일일 좀 있었다. 비탈레는 주경찰 선임 수사관으로 일하는 동시에 교육학 학위를 따려고 야간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브루클린대학 수업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비탈레가 탄 항공편이 이륙한 지 한 시간 뒤, 아일랜드항공 탑승 수속장 앞에서는 해나 오루크가 눈물을 흘리며 형제자매와 작별의 포옹을 하고 있었다. 예순여섯 살인 해나는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6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일랜드 모너핸주에서 태어났는데, 거의 50년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는 남편 데니스와 세 아이를 키우며 잘 살았고, 지금은 롱아일랜드에 거주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가족을 만나러 가능한 한 자주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남편과 함께 시골에서 3주 동안 머물렀다. 친척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미국에 있는 자녀들이 부모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탑승할 때가 다가오니 돌아가는 길이 무서웠다. 해나는 비행, 특히 바다 위를 지나는 항로를 매우 싫어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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