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바다음식의 역사1: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삼면을 둘러싼 해안선이 남북으로 긴 데다 굴곡이 심하고 연해안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되면서 흐르고 있어 좋은 어장을 형성해 계절에 따라 여러 가지 어물이 산출된다. 이러한 자연적인 혜택으로 인해,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여러 가지 어패류가 중요한 먹거리가 되었다. 특히 건어물, 젓갈과 같은 가공법이 오래전부터 발달되어 동물성 식품의 급원이 되었다.
선사시대: 어로와 수렵 중심의 시대
역사시대 이전을 뜻하는 선사시대는 대개 구석기시대약 25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와 신석기시대약 1만 년 전부터 3,000년 전로 나뉜다. 고고학자들은 여러 유적 조사를 통해 구석기시대에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들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해 생활했다. 이 시대에는 대개 동물을 창으로 찔러 잡고, 사냥하고 조리하기 위해 뗀석기타제석기를 사용하며, 불을 이용한 요리도 했을 것이다. 한반도의 구석기시대 유적지로는 함경북도의 굴포리, 평안남도의 상원읍, 충청남도 공주의 석장리, 충청북도 제천의 포전리 유적 등이 있다.
한편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어패류 식생활 민족이 되었다. 이 땅의 신석기시대는 약 기원전 500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며, 한반도에 거주한 주민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수산물을 중요한 식품으로 삼고 있었다. 사냥보다는 어패류를 줍거나 잡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이다. 수산물을 많이 소비하기 시작한 것도 신석기시대부터라고 본다. 이미 구석기시대에 뼈로 만든 낚싯바늘로 물고기를 낚았으며,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중석기시대의 특징적인 생활 문화는 고기잡이였다.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경제에서 신석기시대가 되면 새로운 형태의 생업인 어로가 추가되고 어로활동의 산물로서 해안선을 따라 다수의 조개무지[貝塚]가 형성된다. 조개무지에는 짐승 뼈, 어골, 패각, 탄화식물 등 다양한 식재료 잔재가 남아 있으므로 실증적인 식생활 연구가 가능하다. 또 이 시기에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므로 용기 연구도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주민은 하천, 호수나 내만 또는 천해에 접근하기 쉬운 곳에 주거지를 정하고 각종 어패류를 낚시, 어망 등으로 획득해 식량으로 삼았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패류를 가장 많이 잡아먹었으며 이때 먹고 버려진 패각이 조개무지를 이루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가장 많이 잡은 패류는 굴을 필두로 하여 홍합, 대합 등이었다.
그 당시 어류를 많이 잡았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데, 출토된 유적에서 도미, 넙치, 대구, 상어 및 다랑어 뼈가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부터 최소한 7,000년 전부터 어류가 식품으로 이용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선사인의 음식물 쓰레기장, 조개무지
조개무지란 말 그대로 일종의 쓰레기더미로, 인류가 조개를 채집한 다음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이면서 형성된 생활유적이다. 한자로는 패총貝塚이라고 쓴다. 조개무지는 주로 조개껍데기질로 구성되나 이외에 다양한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하여 더 이상 쓸모없는 부서진 석기, 토기 등과 함께 물고기와 새의 뼈 등 일상적인 생활 쓰레기가 포함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조개무지는 동해안에 접한 함경북도 굴포리, 농포동이나 서해안의 평안남도 궁산리, 용반리 및 남해안에 널리 분포하고 있어 이 시대 식생활이 주로 어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조개무지에서 가장 많이 나온 것이 조개류다. 평남의 용반리 조개무지에서는 조개류의 껍데기와 도미 뼈, 그리고 섬게의 가시도 출토되었다. 특히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에서는 무려 31종의 조개가 발견되었는데 굴, 전복, 소라, 백합 등이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굴 껍데기인데, 현재 우리가 먹는 굴보다 그 크기가 매우 컸다. 전복과 소라는 깊은 바다에서 서식하는 생물로, 석기시대부터 잠수 기술이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또 생선류의 뼈도 출토되었는데 삼치, 도미, 상어 등이었고 도미 또한 그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고래 뼈와 바다표범의 뼈도 발견되었으며, 특히 고래 뼈로 만든 접시가 나왔다. 조개껍데기를 이용한 식도, 가락지 같은 장신용구에 국자가리비 껍데기로 만든 그릇까지 출토되었다.
그럼, 김이나 미역, 파래 등의 해조류는 먹었을까? 이는 유물로 남지 않아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기나 조개류보다 더 채취하기가 쉬웠을 것으로, 미역이나 다시마 등은 파도에 실려 왔을 것이니 이를 줍거나 따서 먹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 농경이 시작되면서 소금이 필요했을 때에 짭짤한 소금기를 가진 해조류가 그 역할을 했을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해조류가 이 시대에는 주식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후 부식으로 변화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빗살무늬토기의 기억, 삶아 먹고 띄워 먹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나 파상점문토기, 융기문토기 등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나 큰 하천의 하류에 연안 지역의 조개무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8000년, 즉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길고 추웠던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토기는 변화된 주변 환경에 적용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도구의 하나다. 토기는 구석기시대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자연 자원의 활용, 음식의 조리, 정착생활 등 인류 생활방식의 큰 변화를 이끌었는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이 토기는 어로를 주로 하던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용기의 발명은 그들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토기가 없던 시절에는 식재료를 꼬치에 꿰어 구워 먹을 수는 있었으나 찌거나 삶아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안이나 하천 유역의 선사시대인들은 토기의 출현으로 비로소 한 번에 많은 어패류를 삶아서 먹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첨저형과 평저형으로 나뉜다. 첨저토기尖底土器는 지면에 그릇을 꽂아놓고 주위에서 가열하여 음식을 끓여 먹는 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점차 받침대 등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반면 평저토기平底土器는 땅에 바로 세울 수 있으므로 음식을 담아두는 저장 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식재료를 띄우는 조리법, 즉 발효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패류를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 말려두거나 젓갈을 담가 저장용 용기에 보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빗살무늬토기의 빗살무늬는 조개껍데기로 그렸을 것이며, 토기 속에 남아 전해진 유물에는 젓갈도 보인다. 어패류의 장기 보존이 젓갈 형태로 발전한 것은 신체에 염분을 제공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했다.
고래사냥의 흔적,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971년,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신석기시대 고래사냥을 묘사한 암각화가 발견되었고, 1995년에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은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으로 평가된다.
바위에 새겨진 동물 그림은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각 동물의 형태와 생태적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동물 중에서는 고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암면 좌측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사슴과 같은 발굽동물, 호랑이와 표범, 늑대 같은 육식동물은 암면 우측에 많이 새겨져 있다.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한 동물로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와 같은 대형 고래, 바다거북, 물개, 물고기, 바닷새 등의 바다동물, 그리고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등의 육지동물이 있다.
부족국가시대: 어로부족과 농경부족의 대치
기원전 2000년경 고조선이 세워지고, 단군조선을 이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차례로 들어섰다. 기원전 100년경에는 한반도 북부에 고구려, 예맥, 부여, 옥저, 낙랑, 한반도 남부에 마한, 진한, 변한의 부족국가가 세워졌다. 이 시기의 특징은 이전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어로를 중심으로 하는 어로부족과 민무늬토기와 농경을 주로 하는 농경부족의 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점차 농경 중심의 식생활로 변천되었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주부식의 구분이 없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어패류가 주식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농산물을 주식으로 하게 되었다. 즉, 농산물인 곡류를 주식으로 하고 어패류를 부식으로 하는 주부식 분리의 시대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주부식 분리 시대를 쌀이 주식으로 널리 보급되는 삼국시대 말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농경이 시작되면서 곡물을 주식으로 하여 탄수화물을 공급하고 어패류로부터 단백질을 공급받는 주부식 분리가 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