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뉴욕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태복음」 10장21절~23절)
모자
2016년 3월 9일, 나와 아내 F는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오기로 한 M 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착 로비로 나와서 M 군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직 집이었다. 우리의 도착 시각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서둘러도 시간을 맞출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예약해둔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택시로 향했다. 일본에서부터 쓰고 온 모자가 없다는 걸 차 안에서 알아차렸다. 마음에 쏙 들었던 보르살리노의 펠트 페도라였다. 예상보다 날씨는 따뜻했고, 오히려 덥다 싶을 정도여서 모자를 벗은 채 M 군에게 전화를 걸고는 그 자리에 두고 왔던 것이다. 여행 첫날부터 모자를 잃어버리다니. 열네 시간의 비행 중에는 물론 모자를 벗어놓았기에 따져보면 착륙한 후 도착 로비에 이르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밖에 쓰고 있지 않았던 셈이다.
나중에 공항 유실물센터에 문의하니, 대응은 예상보다 훨씬 정중했지만 역시 보관하고 있는 분실물 중에 내 모자는 없다고 했다. 어디 헌 옷 가게에라도 팔려버렸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쩍 쓰고 가버린 걸까. 내 머리 크기는 서양인 남성 평균보다 꽤 크니 그 모자가 딱 맞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나는 30년 정도 전에 미국을 몇 번 찾은 적이 있다. 첫 방문은 1985년이었다.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뉴욕 등을 거쳐, 뉴저지의 뉴어크 공항에서 당시 대서양 횡단 비행이 가장 저렴했던 피플스에어 편을 타고 런던으로 건너갔다.
다음 해인 1986년에도 2개월 가까이 미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당시 군사독재 정권 아래 감옥에 있었던 두 형서승과 서준식을 비롯한 한국의 양심수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캠페인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 민주주의를 바라던 시민과 청년, 학생의 용감한 저항이 이어지던 때였다. 경찰 조사를 받던 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사를 계기로 투쟁이 더욱 고양되어 결국 민주화를 쟁취해낸 6월 민주항쟁은 그 이듬해 일어났다.
이번 글을 준비하며 당시 여행에서 쓴 일기를 찾아보았다. 일본은 떠나 1986년 10월 2일 무렵 쓴 글에는 앞서 인용한 마태복음 구절 옆에 “근심으로 마음이 꽉 막힌 순롓길이다.”라고 휘갈겨 쓴 내 글씨가 있다.
나는 말 그대로 근심을 가득 안고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인권운동 단체와 시민단체, 종교단체, 국무부 인권국 등을 찾아다녔다. 뉴욕의 단체 사무소를 찾아가 보니,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성 스태프가 나와 쌀쌀맞은 표정에 알아듣기 힘들 만큼 빠른 영어로 “좋아요, OK, 당신에게 15분 드리죠.”라고 말했다. 15분! 열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내게 주어진 시간, 그것도 더듬거리는 영어로 겨우 15분. 속이 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그런 대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시는 칠레, 아르헨티나, 필리핀, 대만 등 세계 각지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그곳에 모여들었다. 그 여성 스태프는 이 모든 사람에게 대응해야만 했을 것이다.그때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전 세계에 여전한 이유로 정치범의 석방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정확히 15분 후, 상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불친절한 시험관으로부터 면접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 여행이 어떤 구체적인 효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머무르던 도시에서 짬이 나면 혼자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사적인 반독재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형들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걸맞은 바른 처신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나를 괴이하다 보았을 것이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투쟁에 바치는 모범적인 활동가상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 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행 도중에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작품 「수틴의 초상」과 만났다.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에서 무일푼으로 파리로 건너온 섕 수틴Chaïm Soutine, 1894~1943. 그 거칠고 불온하지만 섬세했던 인물의 초상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수틴의 초상」은 그 후로 내 인생을 통틀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고 나중에 졸저의 표지에도 사용했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박이엽 옮김, 창비, 2002년 개정판
당시 디트로이트 미술관은 황폐하다고 말할 정도로 주변이 마치 슬럼가 같았다. 현지에 살던 친구에게 그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거긴 치안이 좋지 않아서…….”라고 말하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바로 그 디트로이트 미술관 중앙 뜰 로비를 장식하고 있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의 장대한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도 잊기 힘들다.
1990년에는 출소했던 형 서승을 안내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다. 석방 지원 운동에 힘써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면서 대학 부속 포그 미술관에서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머리를 민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나치가 퇴폐예술로 낙인찍어 루체른에서 경매에 부친 탓에 파괴를 면해 이 대학에 소장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 초상은 마치 긴 복역을 끝내고 막 출소한 사람처럼 보였다.
미국에는 친구나 지인도 있고, 좋은 미술관도 있으며 훌륭한 오페라나 콘서트 공연도 많다. 그런데도 그 이후 30년 정도 미국에는 그다지 발길을 두지 않았다. 트럼프이 여행 당시는 아직 대통령 후보자였다.와 같은 존재, 단적으로 말해 반지성적이고 오만한 자기중심주의가 대두하면 할수록 미국을 향한 나의 기피감도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2016년이 되어 오랜만에 뉴욕에 가볼 기회가 생겼다. 코스타리카 대학 교수로, 신뢰하던 친구 C 교수가 초청 강연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C 교수는 한국인 여성이지만 수년 전에 과감히 한국에서 코스타리카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살아보며 한국에서 매일 느꼈던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금세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C 교수가 권유한다면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니 코스타리카는 너무 멀었다. 일본에서 출발하는 직항편은 없고, 텍사스주 댈러스나 뉴욕을 경유하는 환승편을 이용해야만 했다. 고민 끝에, 어차피 간다면 이참에 오고 갈 때 뉴욕에 들러 시간을 내서 예전에 방문했던 장소를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미국을 여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먼 옛날 기억의 단편도 되살아났다. 좋은 기억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런 절실한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내 속에 있는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시작한다. 출발하면서부터 아끼던 모자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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