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민족주의와 젠더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
이 책은 한국의 역사, 젠더, 민족주의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부상하고 그와 연동하여 국가가 등장하면서, 한국인이 자신을 젠더적 존재로 인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조명한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더불어 탄생했고, 민족주의의 창조적이고 변혁적인 힘이 곧 새로운 젠더 주체성을 생산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젠더 담론이 항상 혹은 반드시 젠더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젠더란 상호적으로 구성되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여성과 남성의 범주로 개념화된다. 그리하여 젠더 체계는 다중적이고 가변적인 방식으로 다른 문화적·정치적·미학적 구조 및 경험의 양식과 서로 연관된다.
나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서구의 제국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한국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탐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본과 서구가 구성한 한국, 그리고 한국이 구성한 일본과 서구는 특정한 조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데, 나는 이를 구축하는 국가의 창조적 힘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탈식민성과 그 담론적 패러다임이 비서구 세계의 정체성, 문화, 정치의 구성에 미친 지배적 영향을 조명해보는 대응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호미 바바Homi Bhabha의 “거의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이라는 개념이 문제적이라고 본다. 이는 피식민자들이 복잡한 ‘모방’ 체계를 통해 식민지배에 대응하는 양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서구 원본과 식민지 사본의 차이를 결코 설명해낼 수 없다. 모든 역사적 특수성을 지워버린 채 “거의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고 규정하는 탈식민성 개념은 존재론적 주변성만을 모호하게 규정하는 추상적 관념이다. 이는 모든 소수자 담론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그 어떤 구체적 의미도 갖지 못한다. ‘탈식민’, ‘여성’, ‘종족’과 같은 개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세라 술레리Sara Suleri, 1995가 지적했듯 “각각의 억압의 수사는 타자에 대한 거울상 알레고리로도 똑같이 쓰일 수 있다”. 더욱이 지배자의 권력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비서구의 문화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 즉 저항으로 환원된다. 탈식민주의적 정체성 공식의 문제점은 그것이 기본적인 이분법 양식, 즉 순수하게 자생적인 ‘자기 이해’ 대 대타자The Other를 문화적으로 전유하여 형성된 ‘오염된’ 정체성“거의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으로 설정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순수한 자기 이해’라는 개념은 신화다. 서구의 선박들이 정복을 위해 낯선 해안에 닻을 내리기 훨씬 전부터 전 세계 대부분의 문화와 사회는 이미 ‘오염’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서구에 의한 ‘오염’을 부정적으로만 보았다면,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창의적 발전의 토대를 제공해온 측면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진보 신화가 한국적으로 ‘번역’되면서, 한국의 유교적 과거와 연관되어 추앙받던 학문적 남성성이라는 이상향은 어떻게 재가공되고 극적으로 변형되어 새로운 형식의 남성성이 되었을까? 일본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서구 문학 번역은 한국이 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근대적’ 남성과 여성을 상상계적/상상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강력한 대리인으로 자리 잡았을까? 이러한 번역은 이후에 한반도 통일에 대한 박정희의 민족주의적 수사 표현과 학생운동의 저항적 수사 표현에 어떻게 재전유되었을까?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생성하고 영속화하는 다변적 ‘번역’의 관점에 입각하여 젠더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사회의 재생산과 변이 및 집단적 사회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무수한 지역적·개인적 장소를 드러낼 수 있다.
이 책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모든 창조적 ‘번역’의 복잡한 유산을 정리하고, 한국 현대사 전반에 걸친 서사적 일관성및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요 텍스트/순간에 대한 해석을 묶은 모음집으로서, 이 책의 목적은 한국 현대사의 특정 사건과 작업이 담론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이러한 서사적 연결의 기저에 있는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와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에게서 차용한, ‘수사적인 것’이라고 지칭되어온 형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비유적 접근을 통해 국가를 상상할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던 역사적 사건 및 문헌을 조사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주된 서사적 비유를 통해 더 큰 흐름을 구성해온 방식을 찾아낸 뒤 그 사건 및 문헌과 연결해내는 방법을 탐색할 것이다.
화이트1978가 설명하듯, “수사법the tropic은 고대 그리스어tropikos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tropos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바꾸다turn’라는 의미이며 고대 그리스의 공통어 코이네Koiné에서는 ‘방식way’ 혹은 ‘관례manner’를 의미한다. 이것이 고전 라틴어에서 ‘비유metaphor’ 혹은 ‘비유법figure of speech’이라는 뜻으로 사용된tropus를 통해 인도유럽어로 들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수사법은 하나의 참조점과 또 다른 참조점‘참조reference’라는 단어의 어원은 ‘가져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refero이다 사이의 관계relation인 만큼이나 번역translation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수사법은 끝없는 참조의 연쇄 속에서 핵심적 텍스트/순간을 다른 것과 연결하는 일종의 지형도의 기능을 담당한다.
또한 나의 연구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몽타주’ 개념과도 연결된다. 벤야민의 친구 테오도어 아드르노Theodor Adorno는 몽타주를 “수수께끼 같은 형식을 활용하여 충격을 주고 이를 통해 생각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림 퍼즐”이라고 했다Taussig 1984: 89. 특정 텍스트/순간에 대한 나의 분석이 충격을 줄 정도는 아닐지라도, 은폐되거나 간과될 수도 있었지만 다른 텍스트/순간을 병치해보면 비로소 드러나는 과거와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은 “작은 개별적 순간의 분석 속에서 전체 사건의 결정체를 발견하기”Benjamin 1999: 461라는 벤야민의 개념을 활용하여, 민족주의 연구에 사용되는 역사적 범주 및 방식을 고찰하는 대안적 방법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국민국가와 역사적 시간의 모더니즘적 개념에 의해 승인된 역사 진보의 신화를 단순히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주의적 주장에 거리를 두면서 한국 근대의 단편적 역사, 즉 한국 민족주의의 서사적 패턴을 해독하고자 하는 일종의 문학적 ‘몽타주’를 구성했다. 책 전반에 걸쳐 서사적 ‘재구성’의 연속적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며, 검토 중인 각 텍스트/순간이 하나의 과거, 현재, 미래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 책의 짜임은 연대순이면서도, 어떤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는 매우 강렬하게 집중하고 다른 중요한 순간은 건너뛰면서 한 서사적 ‘장소’에서 다른 ‘장소’를 넘나든다는 점에서 절충적이다. 이 책의 각 장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특정한 서사적 수사가 비록 변형되기는 하지만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중요하게 남아 있다는 전제를 근간으로 하나로 엮인다. 책 전반에 걸쳐 나는 특정한 국가적 사건을 합리화하기 위해 핵심적인 서사적 수사가 사용, 변형, 재배치되는 다양한 담론적 텍스트/순간을 탐구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지배적 수사’가 남북 분단의 맥락에서는 어떻게 성공적으로 재배치되는지도 보여줄 것이다.
“근대 정체성”이라는 제목을 붙인 1부에서는 다음에 이어질 여섯 장에 대한 무대를 설정한다. 1장에서는 20세기 초에 수십 년간 형성된 군사적 남성성과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여기서는 특정한 양식의 민족주의적 자기비판과 식민주의 담론을 분석하여, 한국의 과거에 대한 ‘진정한’ 기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 사례로는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역사가가 유교적 ‘양반’이라는 형상으로 구현된 나약하고 무능한 남성성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방식이 제시된다. 특히 신채호가 ‘근대화와 계몽’을 촉진하기 위해 ‘양반’이라는 의외의 대상을 어떻게 민족주의적 자기비판의 도구로 활용했는지, 그리고 조선왕조또한 이와 연결된 ‘불모의’ 남성성를 한민족 역사의 정통에서 벗어난 일탈로서 완전히 삭제해버리는 작업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 밝힐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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