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화, 호러, 재마법화
혐오, 주체화의 열정
공포와 분노, 염려와 피로, 애도와 불안을 넘어 이제는 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무수한 감정들이 있음에도 유독 혐오감이 지금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 변화에 따라 감정 구조도 변한다면, 개인적 감정이 사회적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우리가 감정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혐오감 또한 계산해 자본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혐오감과 젠더 정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자본주의는 시장의 교환가치에 모든 것을 종속시켰다. 그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인간의 혈관에 ‘피’가 아니라 ‘돈’이 순환하는 시대에 존재와 사물이 지닌 고유한 가치(사용가치)는 삭제된다. 시장경제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시장질서는 혈통과 신분에 바탕한 고귀한 가치를 탈신비화시킨다. 그래야 등가교환이 가능해진다. 모든 인간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본래적 가치가 있다는 천부인권이 선언된 시대에, 오히려 자신의 교환가치를 입증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사용)가치도 없다는 아이러니와 마주치게 된다.
모든 것이 등가치로 교환됨으로써 깊이를 상실한 시대에 신비와 경이감은 살아남기 어렵다. 자본주의는 경이감의 아우라를 벗겨내고 냉혹한 계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에 모든 것을 집어넣었다. 파렴치하고 노골적인 계산과 이해관계가 지배하게 됨으로써, 고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자본주의는 야비한 탐욕, 천박한 이윤추구, 뻔뻔한 배신(혹은 계약) 등을 합리화해 시장의 회로 속에서 순환시켰다. 이렇게 추한 감정들을 추구할 만한 새로운 가치로 역전시켜놓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과히 혁명적이었다.
이처럼 노골적이고 세속화된 ‘탈마법화’ 시대에 ‘몫 없는 자’들은 자신의 몫을 챙기려고 ‘분노라는 투자금’을 예치해뒀다가 지배계급에 도전함으로써 분배 정의라는 배당금을 받고자 했다. 아이 패고 마누라 잡고 술집에서 행패부리는 데 사용했던 분노의 불길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분노의 용도는 달라진다. 성난 인민의 분노가 정치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지배계급은 경멸했던 인민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한다. 계급사회를 개혁하려는 인민의 분노에서 좌파들이 혁명적 정치성을 읽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계급 불평등을 어느 정도 무마시켜준 것은 소비에서의 평등이었다. 하지만 소비가 주는 행복감도 잠시, 글로벌 자본주의 아래 사람들은 삶의 속도전에 내몰리게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정학적 분업 아래 살아가다 보면 인간의 감각 지각 또한 파편화되고 분열된다. 정보 소통 테크놀로지의 엄청난 발전으로 유저들은 온·오프라인의 공간지정학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인격을 분리시킨다. 인격의 통일성은 더 이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살벌하게 경쟁적이고 굴욕적인 일상을 견디는 방식이 어딘가, 누군가에게 자기혐오, 비루함, 억울함, 불만, 짜증을 부려놓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날 말짱한 것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자기 분열이다. 현란한 다중 인격을 그린 드라마 〈킬미, 힐미〉(MBC, 2015)에서처럼 적어도 순간순간 바꿀 수 있는 일곱 가지 인격쯤은 지녀야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다중 인격은 혼돈과 현기증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이다.
비정규직이 대세가 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 습관은 탈부착이 자유로워야 한다. 장기 지속적인 가치는 없애고 신속하게 이윤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인 마당에 장기에 걸쳐 습득되는 노동 습관은 불편한 것이 된다. 고용 유연화에 따라 해고와 고용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한 가지 일에만 적합한 근육과 영혼을 만들어놓으면 노동시장에서는 부적격자가 되게 마련이다. 빠올로 비르노는 그것을 ‘습관을 갖지 않는 습관’이라고 말한다. 예측 불허의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 직장을 옮겼을 때 재빨리 적응하는 적응력, SNS 활용과 접속에 능통한 인지력, 이곳의 규칙과 저곳의 규칙 사이의 신속한 호환력.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프레카리아트들은 고용 유연화라는 말이 사실상 의미하는 실직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방어기제로서 호환 가능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KBS2, 2013)에서 미스 김은 수십 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상황마다 대처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간신히 파견의 품격을 유지한다. 오로지 생존이 관건인 시대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승리다. 이런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인해 슬픔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오히려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이쯤 되면 빠올로 비르노가 왜 ‘나쁜 감정’, 즉 기회주의, 냉소주의, 순응주의, 허무주의, 명랑한 체념과 같은 ‘유독한’ 감정에서 ‘유익한’ 정치성을 읽어내려고 했는지, 그의 고민이 이해된다. 이런 ‘나쁜 감정’들과 우연성이 운동의 조직과 성패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회주의는 교활하고 저열한 감정으로 취급되어왔다. 회사와 조직은 기회주의자에게 충성심을 바라기 힘들다. 하지만 회사와 조직이 해고와 배신을 능사로 삼는 마당에 기회주의란 약자에게는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다. 비르노는 기회주의를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가능성에 재빨리 복종하는 것’이자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냉소주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인식 능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일관성 없는 규칙과 변덕스러운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다. 그러므로 냉소주의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능력인 셈이다.
그렇다면 혐오 발언은 어떤가? SNS로 소통하는 사회에서 험담, (헛)소문, 혐오 발언, 추문, 악플 등은 빛의 속도로 무한 증식하며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 정해진 생산량과 같은 목표로부터 자유롭고, 제한된 직무로부터도 자유롭고, 진위 여부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자유롭다. ‘우리’는 미담에도 설득되지만, ‘그 인간 왜 그래’로 시작하는 험담과 뒷담화로 연대한다. 인터넷에서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악플, 추문, 혐오 발언은 근거가 없다 할지라도 일파만파의 파괴력을 지닌 집단을 형성한다.
전 세계가 빛의 속도로 소통할수록 시각 매체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현실조차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대부분 묻혀버리기 쉽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므로 사람이든 물건이든 결사적으로 주목받고자 한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는 인간의 관심과 주목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관심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자 자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주목받지 못하면 비존재로 취급된다. 전 세계를 한 편의 영화처럼 재현하는 시대에,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3세계 사람들은 유령이 되거나 1세계의 안락함과 대비되는 전쟁, 집단 강간, 학살, 참수, 기아, 재난이라는 잔혹극을 통해 간신히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총체적 재난, 구조적 비리, 정치적 부패, 부당 해고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도 사람들은 그저 심드렁하다. 어떤 운동이든 명분과 대의가 아니라 자기 이해관계에 따른 밥그릇 싸움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분노한들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내 기분, 감정, 상처를 자극하는 연예인, 개그맨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에는 과도하게 분노하고 혐오한다. ‘나’의 팬심과 관심 덕분에 그들이 누리는 쾌락 지수(셀렙, 재력, 인기)는 ‘내가’ 변심하면 얼마든지 추락할 수 있다. ‘나’의 사랑을 먹고사는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는 점을 무기로 휘두르는 것이 바로 악플과 같은 혐오 발언이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익명성 속으로 가라앉는 아이러니한 시대,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점점 더 극악스럽게 혐오의 강도를 높여간다. 최진실, 임수경, 장자연,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독한 악플을 달았던 사람들을 체포해서 왜 그랬냐고 이유를 물으면, ‘그냥 주목받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혐오 발언 안에는 주목을 통해 자신이 행위 주체임을 인정받으려는 ‘주체화의 열정’이 들어 있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에서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혐오는 격렬한 열정 중 하나다. 9·11 이후 아부 그레이브 고문 사진을 동영상으로 올렸던 미군 병사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추악한 행위가 뉴스거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마치 TV에 자신들의 행위가 방영될 수 있도록 ‘공개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스스로 사진사가 되어 자신들이 연출한 고문 행위를 재미와 오락거리로 만든다. 예전 같으면 수치스러워서 은폐하기에 급급했을 혐오스러운 행위를 기록하고 포르노그래피로 교환하면서 전 세계로 전송한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행위가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한다.
여군도 이런 잔혹 극장에 자발적으로 가담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도 폭력과 혐오를 통해서나마 주체가 되고 싶은 맹목적인 주체화의 열정이 있다는 것인가? 여성이 자신의 주도권을 위해 폭력과 혐오를 활용한다면, 그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표현에서 보다시피 여성 혐오를 제거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그것을 어떻게 정치화하는가? 여성 혐오에 ‘희생양 코스프레’가 아니라 혐오로 맞대응하는 것은 하나의 전략일 수 있는가?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메갈리아’들은 혐오를 흉내내며 혐오에 대응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혐오에서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생각해본다면, 남성들이 보여준 혐오에 대한 여성들의 흉내 내기를 패러디로 볼 수는 없을까? 공포, 분노, 애도 등의 정동을 정치적으로 배치하는 것처럼, 혐오 자체의 젠더 정치적 용도는 없는가? 여성 혐오, 종북 빨갱이 혐오, 외국인 노동자 혐오, 재난 희생자 혐오를 비롯해 온갖 혐오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국가장치와 젠더 정치는 어떻게 공모하는가? 혐오가 나쁜 감정이기는 하지만, 비르노처럼 그런 유독한 감정에서 유익한 정치성을 찾을 수는 없는가?
동성애 혐오에는 남자가 ‘여자처럼 군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혐오가 깔려 있다. 불법 체류 외국인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외계인 이물질foreign body로 간주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가장 만만하게 혐오감을 부려놓을 수 있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 이민자, 장애인 들이 ‘우리’의 세금을 축내면서 무임승차한다고 혐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은 소수가 아니라 세상의 절반이다. 여성은 외국인도 아니고 무임승차자도 아니다. 여성은 위협적이거나 위해를 가하는 외부인이 아니라 돌봄을 주로 하는 내부자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는 이 모든 혐오에 유비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은 메르스와 같은 바이러스적 주체여서,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남성 숙주를 변형시키는(여성화하는)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는가? 앞으로 설명하게 되겠지만 혐오가 끔찍한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여성에게 어떤 끔찍한 힘이 있길래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가? 탈마법화된 시대임에도 여성들에게는 어떤 ‘마법적’ 힘이 남아 있기에 깔끔한 면역 주체가 되려는 남성을 감염시키는가? 거세되어 탈마법화된 시대를 구차하게 살아가는 자신들과는 달리 여성에게 신비하고도 마법적인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남성의 공포심과 선망이 여성 혐오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여성 혐오가 젠더 형성 과정에서 억압된 원초적 정동이자 몸을 가진 여성이 누리는 쾌락에 대한 남성의 매혹과 공포와 시샘의 뒤집힌 형태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지적하더라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동일시의 논리에 따라 상상적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타자의 흔적을 억압함으로써 드러나는 젠더 무의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마법적으로’ 귀환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