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내 폭력’,
가부장제의 축도
‘아내 폭력’은 어떻게 지속되고 재생산되는가
시대를 초월하여 대개 TV에서 방영되는 가정 폭력 추방 공익 광고는 가정 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접근 방식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광고가 폭력 가정에서 자란 남녀 어린이가 폭력 부부의 성 역할을 그대로 학습한다는 내용을 그리면서, 남편의 폭력이 아동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광고가 가장 우려하는 가정 폭력 피해는 남편에게 직접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부부 싸움’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어린 자녀이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자녀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피해자임은 분명하지만, 광고의 시작과 끝에 ‘여성 인권 캠페인’이라고 강조하는 문구가 나와도 그 광고는 여성 인권 캠페인이라기보다는 아동 인권 캠페인에 가깝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 두 건의 ‘아내 폭력’ 관련 살인 사건은 가정 폭력 피해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적 태도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1995년 3월에 발생한 전말석(가명) 사건과 1996년 4월의 이경숙(가명) 할머니 사건은 모두 폭력 가정의 구성원들이 가해자인 남성 가장을 살해한 경우인데, 이들이 구타 남성과 어떠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여론은 완전히 태도를 달리했다. 전말석 사건은 상습적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구타하는 아버지를 살해한 경우이고 이경숙 할머니 사건은 일상적으로 자신의 딸을 구타하는 사위(딸의 동거남)를 살해한 사건이다.
언론에서는 이처럼 비슷한 상황의 가정 폭력을 두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보다는 ‘가족 간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다니……’ 하는 식으로 개탄하였다. 또한 같은 ‘가해자’인 전말석과 이경숙 할머니에 대해서는 지극히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말석을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고 비난하면서 이 사건을 마치 도덕성 붕괴와 말세末世의 상징적 사건처럼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경숙 할머니 사건에 대해서는 딸을 괴롭히는 사위를 죽인 ‘모성’으로 한껏 미화하였다. 이 사건에서 딸과 어머니가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족애를 보여준 것도 언론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 이유였다. 이경숙 할머니 사건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여성 단체의 석방 운동에도 큰 힘이 되었으나, 전말석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아내 폭력’아내에 대한 폭력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문제 의식은, 이처럼 한국 사회의 ‘아내 폭력’ 대처 방식이 인권과 성 평등gender equality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기존 가족 보호 입장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 폭력’에 대한 가족 유지적인 접근 방식이 실제로 가정 폭력을 예방하고 근절할 수 있을까? 혹은 가정의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에서 폭력당하는 아내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한국 사회에서 ‘아내 폭력’이 해석되는 방식과 시각을 여성주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하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내 폭력’이 처음 사회 문제로 제기된 것은 1983년 여성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추방을 운동 과제로 내세운 ‘여성의전화’가 창립되면서부터다. 이후 쉼터피난처 마련 운동, 성폭력 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을 거쳐 ‘아내 폭력’은 여성 폭력의 대표 영역이 되었고, 1990년대 한국 여성 운동이 성 인지적 관점gender perspective을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는 여성 단체뿐 아니라 사회 복지 시설, 병원, 학교, 종교 기관, 심리 상담 기관, 법률 상담소에서도 ‘아내 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폭력 가정을 탈출한 아내가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고 고통을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사회의 가족 제도, 노동 시장,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 성 문화, 모성 신화, 법 제도 같은 여성 억압 구조의 거의 모든 경로를 거쳐야 하는 지난한 경험이다.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의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원인과 대책도 어떤 한 가지 요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아내 폭력’ 문제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접근해 왔다.
그러나 여성주의 관점에 입각한 몇몇 연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가족과 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가부장적 통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들은 가족을 사회 기본 단위 혹은 휴식처라고 간주하며, 가족 구성원 간에는 차이사실은 ‘위계’가 있지만 그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가해자의 폭력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假定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부부는 일심동체’, ‘가족 동반 자살’과 같은 언설에서처럼 가족이 하나의 단위unit라는 통념은 너무도 강해서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족이 하나의 단위라는 담론은 성별과 연령에 따른 가족 구성원들 간의 권력관계를 은폐하고, 실제로는 가정 폭력에 대한 외부의 중재를 방해하여 폭력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역사상 가족이 한 개의 단위로서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족이 사회의 기본 단위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결국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이지 가족 자체가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이해와 요구,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흔히 설명하듯 하나의 통합된 단위로서 가족이 사회(자본주의, 산업화, 혹은 국가……)에 어떤 기능이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오히려 가족이 수행하는 기능은 사회를 설명하는 요인이 아니라, 그것이 왜 그토록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지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다. 계급의 재생산, 출산, 자녀 양육 등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가족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사실 많은 다양한 다른 가족 형태들을 배제하고 이성애적 핵가족만을 정상으로 설정한 가족 이데올로기의 결과다. 동성애 가족, 독신 가족은 출산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들은 ‘아내 폭력’을 ‘일탈’비정상 행위로 보면서 주로 폭력 가정의 인구학적 특성에 주목해 왔다. 즉 폭력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무엇인지 고찰했는데, 이때 주로 등장하는 상황들은 가해 남편의 의처증, 스트레스, 알코올, 열등감, 경제적 무능력, 분노 따위다. 하지만 이것은 폭력의 원인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폭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한편, 폭력당한 아내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은 오랜 폭력으로 인한 폭력의 결과(무기력, 보복의 두려움, 자아 의식 상실, 판단 능력 결여, 모순에 가득 찬 폭력 대처 기술 등등 피해 여성의 상태)를 마치 폭력의 원인인 양 설명한다.
이처럼 가정 폭력을 극소수 일탈 가정의 문제 혹은 개인 심리의 결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뿌리 깊다. 가정 폭력이 가부장적 가족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모든 아내들이 다 맞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안 때리는 남편도 많고 안 맞는 아내도 있으므로, 가정 폭력은 결국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관련된 이슈는 언제나 사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편견의 결과일 뿐이다. 예를 들어 전 국민의 1퍼센트 정도가 절도 피해를 입었다면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절도범의 스트레스와 분노로 인한 문제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분석되고 국가 사회적 대책이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아내 폭력’은 거의 모든 통계에서 50퍼센트 이상이 경험하는데도 여전히 개인적인 일로 간주된다. 성폭력 등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일 경우 언제나 이와 비슷한 논리가 적용된다.
남성의 폭력 행동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은, 결과적으로 남편은 아내를 때릴 수 있다는 문화를 지지하게 된다. 구타당하는 아내의 문제‘맞을 짓’로 인해 폭력이 발생한다는 입장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연구들은, ‘아내 폭력’의 90퍼센트 이상이 결혼 생활 3개월 이내에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아내 폭력’을 개인 심리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처럼 성 중립적 관점의 연구가부장제의 영향력을 간과한 연구들은 폭력이 심각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한국 사회 ‘고유의’ 문화적 특성, 즉 가족주의적 가치를 고려하여 되도록 가족이 유지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이 가족 유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여성 의식 향상과 실제 현실 간의 괴리가 크므로 가족을 깨뜨리지 않고 피해자 보호와 예방이 가능하도록 여성주의적 접근이 더 보완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아내 폭력’이 대개 자녀 학대를 동반하여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가족 체계의 문제라고 보면서도, ‘어쨌든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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