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것은 8월 중순이었다. 마침 몬순 장마가 막 끝나 연일 40도를 넘겼던 무더위가 한풀 꺾인 참이었다. 그래도 매일 섭씨 36~38도였다. 실외로 나서면 후끈한 열기가 피부에 와닿아 솜털이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다행히 습하지 않아 불쾌감은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부친 이삿짐이 도착해야 정식으로 살 집에 입주할 수 있으므로, 임시 숙소에서 한 달을 묵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마다 작은 개미 떼가 출몰했고, 뜨거운 햇빛을 피할 곳을 찾던 도마뱀들이 수시로 실내에 들어왔다가 수줍게 도망쳤고, 오렌지빛이 도는 특이한 벌들이 베란다에 비치된 세탁기 주변을 늘 맴돌았다. 깜짝깜짝 놀라던 것도 한때. 한두 주 지나자 개미를 맨손으로 눌러 죽이고, 도마뱀이 나올 만한 곳에서는 일부러 쿵쾅거려 녀석들이 미리 도망갈 여유를 주고, 손사래로 벌들을 물리쳐가며 세탁기를 돌렸다. 알고 보니 그 벌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독한 종류였다. 옐로비yellow bee, 즉 황색벌이라고 불리는 이 벌은 닿기만 해도 피부가 부어오르며 쏘이면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 못 가면 칼이나 열쇠 같은 금속을 쏘인 부위에 막 문지르라는 민간요법도 조언받았다.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해 한동안 그날그날 받은 인상을 한두줄로 메모하곤 했다. 지금 보니 마치 트윗 같다.
8월 21일 토요일
이슬라마바드 수입 상품점의 물건들은 스위스만큼이나 비싸다. 온갖 향신료로 양념해 구운 닭다리를 숙소 근처 식료품점에서 사다 먹었다. 먹을 만했다. 토마토를 사서 곁들였는데 싱싱하고 맛있다. 조언을 무시하고 날것으로 먹었지만 아무 탈도 나지 않았다.
8월 22일 일요일
이슬라마바드는 야생 숲을 대충 긁어내, 거기다 길 좀 뚫고 건물 몇 채 채워 넣고, 다른 건 하나도 안 다듬은 채 그냥 그대로 놓아둔 모습이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야생 공원처럼 느껴진다.
8월 23일 월요일
사방에서 토요타 중고차가 눈에 띈다. 파키스탄에서도 우측 핸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 쓰던 차들을 그대로 수출하는 이점을 누린다고 한다.
8월 25일 수요일
오늘 만난 사람 중에 성이 칸Khan인 사람이 벌써 둘이다. 파키스탄 총리의 성도 칸이다. 아마 한국의 김 씨쯤 되는 모양이다.
8월 26일 목요일
심한 배탈. 찢어질 듯한 복통. 이렇게 배가 아픈 건 처음이다. 도착 이후 배탈이 안 났다고 의기양양해서 익히지 않은 채소를 매일 대담하게 먹었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
8월 28일 토요일
사흘 내내 쌀죽, 오트밀죽, 토스트만 먹었다. 조금 나아졌다.
8월 30일 월요일
이슬라마바드의 한 마트에서, 러시아에 살 때 늘 사던 두루마리 휴지 브랜드를 발견했다. 갑자기 러시아에 대한 향수가 몰려왔다.
9월 1일 수요일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한동안 이슬라마바드에 야생 멧돼지가 꽤 자주 출몰했는데 최근 많이 줄어든 것은 중국인들이 사냥해서 잡아먹었기 때문이란다.
9월 2일 목요일
한국 입국 관련 정보를 살피러 주이슬라마바드 대한민국 대사관 홈페이지에 가보니 파키스탄에서 태권도 품새 경연대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보인다. 알고 보니 파키스탄이 태권도 강국이었다. 처음 알았다.
*
파키스탄은 한국을 떠나 살게 된 여섯 번째 국가이며, 이슬라마바드는 서울 이외에 내가 살아본 열 번째 도시다. 한국을 떠나 가장 먼저 살았고 또 가장 길게 살았던 나라는 미국이다. 중부의 소도시 두 곳과 동부 뉴욕주 소도시 한 곳에서 공부하고 회사에 다니며 몇 년을 보냈고, 그 뒤에는 워싱턴DC에서 4년 남짓 정책학을 공부했다. 다 합치면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9년 가까이 된다. 배우자를 만난 곳도 미국 워싱턴DC였다. 미국은 내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곳이었으나, 미국을 떠난 후 오랜만에 다시 방문했을 때 왠지 낯설었다. 미국이 변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변해서, 그러니까 떠난 곳보다 도달한 곳에 충실하게 사느라고 애쓰면서 옛정이 바랬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로 도달한 곳에 충실하자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원칙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1세인 시어머니 마틸데는 종종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아본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니?” 그러고서 내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이렇게 덧붙인다. “역시 취리히가 좋지 않니?” 내 답변도 늘 같다. “전 어딜 가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제일 좋아요.” 그러면 마틸데가 수긍할 수 없다는 얼굴로 또 한 번 강조한다. “난 취리히가 제일 좋아.” 태어난 나라 이탈리아에 정을 떼고 취리히를 최고라고 여기는 마음은 이민 와서 정착한 곳에 정을 붙이고 그곳을 최고라고 생각해야 괴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매번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을 마틸데는 눈치채지 못했다.
미국을 떠난 후 취리히에서 1년, 도쿄에서 4년, 빈에서 4년을 보냈고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베른에서 4년을 살다가 그다음에는 러시아로 옮겨 모스크바에서 4년을 보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모스크바 생활 3년 차에 발생했다. 그리고 상황이 좀 누그러지기 시작할 무렵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옮겼다. 언어, 기후, 음식, 문화, 정치·경제적 상황 등 모든 것이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며 산다는 것은 얼핏 듣기에는 흥미진진할 것 같아도 실은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삶이다. 지속적인 사회연결망 구축이 어려워 자칫 고립될 수 있고, 애써 사람을 사귀어도 서로 ‘곧 떠날 사람’이라 여기니 인간관계가 좀처럼 깊어지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니 낯선 언어를 새로 배우기도 쉽지 않다. 때론 만사 귀찮고 허무해져서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처럼 지내고 싶은 유혹도 든다. 하지만 몇 주, 몇 달도 아니고 몇 년씩 거주하는 곳에서 그저 구경꾼으로 게으르게 살기는 싫었다. 내부자는 될 수 없더라도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그 도시의 내부로 발을 내디뎌야 했다. 사람을 사귀고, 말을 배우고, 현지 음식을 즐기고, 역사책을 읽고, 현지 신문도 자주 들춰봐야 한다. 때로는 체력이나 인내심이 바닥나 퇴각하듯 다시 외부나 경계에서 서성거리기도 하지만,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삶이 풍성해졌다.
이렇게 쌓인 시간들이 빚은 내 정체성에 대해 책을 쓰며 새삼 자문했다. 여러 단어가 떠올랐다. 아내, 딸 같은 자명한 것들 외에 떠돌이, 번역자, 외부자, 소수자, 이민자. 이 정체성들은 모두 서로 얼마간 연결되어 있다.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렇게 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고민하던 어느 날, 불현듯 번역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0년대 중반은 이미 종이 사전이 필요 없는 세상이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인터넷과 컴퓨터만 있으면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담담하게 시작했던 일에 곧 빠져들었다. 홀로 디지털 화면 앞에 앉아 하나의 언어를 또 다른 언어로 차근차근 가지런히 옮기는 일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오랜 세월 영어에 노출됐어도 매번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나오니 새로 익히는 것이 즐거웠고, 주변에 한국인이 많지 않으니 자칫 시들 수 있는 모어를 잘 보듬어갈 수 있어 즐거웠으며, 새 말을 배우고 알던 말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로서 옮기는 기술이 살살 느는 경험을 하니 즐거웠다. 일이 즐거우니 곧 애정과 애착이 뒤따랐다. 낯선 곳을 떠돌며 새로운 환경과 불안정한 일상에 지칠 때, 번역이 제공하는 한결같은 공간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얻었다. 번역할 책을 고를 때는 되도록 내가 공감할 수 있고 내 정체성과 연관되는 소수자, 외부자, 여성, 노마드의 시선이 담긴 책, 혹은 통념에 도전하는 책을 찾았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리해보는 이 순간에도, 나의 정체성에 이중성과 역설이 스며 있음을 안다. 외부자이지만 내부자와 결혼하여 덤으로 얻은 준내부자 지위,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받으며 엄연한 특권을 누렸음을 자각한다. 불의에 분노하면서도 열정적인 운동가는 되지 못하는 게으름뱅이,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통념의 완전한 공백 속에 살 자신은 없는 겁쟁이, 떠도는 삶을 사랑하면서도 호시탐탐 정착을 그리워하는 모순덩어리다. 그런 내가 용케도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해내는 일은, 호기심을 놓지 않고 주변을 관찰하는 일, 언어의 묘미에 취하는 일, 지리적, 물리적, 감정적인 경계선을 밟고 서거나 건너다니면서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보금자리와 주변 관찰에 최적인 전망대를 찾아내는 일이다. 거기에 가부좌 틀고 앉아, 이해할 수 없는 생소한 것들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조사하고, 해석하고, 소화하고, 그런 다음 남에게 전달한다.
어쩌면 나는 천생 번역자일까. 내 글을 쓸 때조차 번역을 하는 듯하다. 외국에서의 생활과 경험을 한국어로 전달하는 행위가 차라리 번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단한 의미도 내세울 동기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경계에서 서성이던 나의 시간, 나의 언어를 누군가에게 번역해 들려주고 싶다. 이 책도 이런 마음으로 썼다.
주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내 신체의 일부, 편도였다. 어린 시절 편도가 늘 부었고, 그때마다 부모님은 ‘펜브렉스’라는 캡슐 항생제로 고통을 해결해주셨다. 1970~1980년대는 항생제를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사다가 느긋하고 넉넉하게 남용하던 시절이었다. 의사가 편도를 떼어주라고 했다. 소아 편도 수술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어린 딸 목에 칼을 댄다는 생각에 수술을 주저했고, 하지 않기로 하셨다.
편도염이 다시 심해진 것은 사십 대가 되어서다.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급기야 한쪽 편도에서 낭종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래서 휴가 때 취리히에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낭종과 함께 편도도 떼버리자고 했다. 만선 편도염이 낭종의 원인인 듯하니 원인까지 함께 제거하자는 뜻이었다. 며칠 후 한국에 들어갈 일정이 있었으므로, 한국 방문을 마치고 취리히로 돌아와 수술받기로 했다. 수술 후에는 출혈 위험 때문에 넉 주 동안 비행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거주지인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가기 전에 취리히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취리히에서 보낸 사십 일은 일종의 ‘작가 피정’writers’ retreat의 기간이었다. 성당을 멀리한 지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서류상의 가톨릭신자일 뿐이지만, 여전히 피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고요한 곳으로 떠나야 할 것 같은 잔잔한 충동이 인다. 피세정념避世靜念,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수도원에서 묵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이다. 가톨릭과 무관하게, 일부 영미권 국가에서는 작가가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제거된 고요한 환경에서 글을 쓰도록 작가 피정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스스로 그런 피정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예정에 없던 작가 피정을 선사 받은 일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