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진정성이라는 용어
2008년 여름, 당시 28세였던 프랑스 브르타뉴 출신 엔지니어 플로랑 르마송과 아내 클로에, 세 살배기 아들 콜랭은 인생 최고의 여행을 떠날 참이었다. 르마송 부부는 사직서를 내고, 그때까지 모아둔 저금을 털어 구입한 중고 요트 ‘타닛’을 타고 항해할 예정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탄자니아 해안의 잔지바르 제도였다. 24시간 쉼 없이 항해할 수 있도록 그들은 또 다른 커플과 팀을 이뤘다. ‘타닛’ 항해팀이 이집트를 떠나 인도양으로 접어들었을 때 프랑스군 호위함 한 척이 되돌아갈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해적이 득실대는 세계 최악의 무법천지 해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겁 없는 모험가들은 항해를 계속하다 2009년 4월 4일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혔다. 해적은 구출대가 찾아내지 못하도록 인질 5명을 육지 깊숙이 끌고 가 몸값을 요구했다. 몸값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 값으로 수백만 달러를 요구하는 기사가 신문에 가득한데도 굳이 해적이 들끓는 해역으로 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완전히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족을 데리고 아덴만을 가로지르는 행위가 더 ‘본질적인’essential 형태의 삶, 즉 현대 프랑스에서 높은 월급을 받는 전문가의 삶보다 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대안이라고 여길 수 없다.
그럼에도 르마송 부부가 추구했던 무모한 모험이 대단히 별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진정성 찾기는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목표로 부상했다. 이 목표는 환경, 시장경제, 개인 정체성, 소비문화, 예술 표현, 삶의 의미 같은 가장 논란 많은 쟁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많은 애로점을 안고 있다.
* authenticity는 맥락에 따라 진정성, 진위성, 진품성, 온전성, 정통성, 고유성 등으로 번역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싸구려 대량생산 소비제품으로는 진정성 있는 개인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으며 지구를 아끼고 최소한의 발자취만 남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개인적 성취에 관해서도 근대세계에서는 의미 있는 창조적 삶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이가 많다. 그래서 근대성의 외무에서, 혹은 근대성의 반대편에서 더 진정성 있는 삶의 방식을 찾는다. 계몽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가 일어났던 옛 시절의 상황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요즘 진정성 찾기는 또 하나의 마케팅 전략으로 이용되는 일이 너무 흔하다.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다들 새 트렌드를 이용해 돈 벌 궁리만 하는군, 하며 또 냉소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결국 르마송 부부가 내렸던 것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는 썩었다, 경제가 사람을 소외시킨다, 체제를 완전히 뒤엎거나 아니면 포기해야 한다. 혼란스럽지만 잘 보면,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과 우리의 정체성 간의 관계, 그리고 소비문화, 예술적 비전, 진정한 자아가 맺는 광범위한 관계 속에는 잘못된 논리와 신념이 잔뜩 깃들어 있다. 흔히 거론되는 뻔한 대비(진정한 욕구와 가짜 욕구의 대비, 심오하고 진정한 자아와 상표로 구축된 천박한 정체성의 대비)는 영 조악하기만 하다.
우리에겐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진정하고 의미 있고 생태친화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시장경제 같은 근대의 많은 측면들이 해롭지 않고 오히려 풍성하고 활기찬 가치의 원천으로서 포기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접근법 말이다.
우리는 가짜인 것, 포장된 것, 인공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터무니없는 광고나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 중 일부는 틀로 찍어낸 듯한 교외 주거지에 살고, 또 일부는 테마파크와 거의 구별이 안 되는 고급 도시 주택가에 산다. 영양가라곤 없는 패스트푸드를 먹고, 짜인 각본대로 흘러가는 ‘리얼리티’ TV쇼를 보고,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휴가를 즐긴 후 패키지된 기억을 갖고 돌아온다. 또한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인터넷 세상으로 떠나고 페이스북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거나, 「세컨드 라이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 속 가상공간을 헤매고 다니며 한 번도 본 적 없고 만나도 못 알아볼 사람들의 아바타와 소통한다.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면, 여기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꾸밈없고 자연스럽고 진국인 것, 즉 ‘진정성’에 대한 욕구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한 줄기의 운동을 형성하는 조짐이 보인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고립, 소외, 천박함에 대한 반동으로 그 반대의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론조사 및 트렌드 분석 전문가 존 조그비는 2008년에 펴낸 『우리의 미래상』The Way We’ll Be에서 본인이 운영하는 여론조사회사 조그비 인터내셔널이 수년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가정생활, 직업 만족도, 소비 선호도, 정치 성향 등 다양한 측면에서 미국인의 태도와 소망을 조사한 결과 장기간 이어져온 ‘아메리칸 드림’이 흔들리고 있었다. 조그비 인터내셔널은 2005년 실시한 소비자 지출 행태에 관한 설문조사 당시, “욕심, 과소비, 명품과 유명 브랜드에 대한 집착, 수입보다 많은 지출, 미래에 대비한 저축 실패 등, 요컨대 허상을 뒤쫓는” 미국 소비자들의 전형적인 결점을 두루 재확인하게 되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광고업자나 정치인이 진짜라고 우기는 허상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미국 정계와 재계의 마케팅 전략, 언론플레이, 뻔뻔한 거짓말에 지친 상태였다. 버나드 메이도프가 벌인 500억 달러 규모의 다단계 ‘폰지 사기’나 버나드 애버스(월드컴), 케네스 레이(엔론), 콘래드 블랙(홀린저) 같은 기업인을 감옥으로 보낸 스캔들에 질려 있었다. “is”의 의미를 갖고 횡설수설하던(그러다 탄핵 소추까지 당한) 빌 클린턴이 백악관을 뜨기 바쁘게*, 아무 생각 없는 조지 W. 부시가 후임으로 들어와 4년 넘게 이어질 이라크 반군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 채 “임무는 완수됐다”고 선언하고 뉴올리언스를 파괴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잘못 대처한 무능력한 연방재난관리청장 마이클 브라운을 “아주 잘하고 있다”며 칭찬하는 모습에 미국인들은 정치문화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불륜관계를 부인했던 “there is nothing going on between us” 일에 관해 연방대배심에서 추궁당하자, 답변한 그 시점에는 더 이상 불륜관계에 있지 않았으므로 현재시제is로 그렇게 답한 것은 거짓말이 될 수 없다고 변명한 일.
조그비가 발견한 것은 바로 진정성에 대한 욕구였다.
하지만 진정성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것과, 진정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조그비 인터내셔널은 앞의 설문과 별개로 2007년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사람들이 거론하는 ‘진정성’ 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기 위한 조사였다. ‘진정성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분의 1 이상이 ‘인격’이라고 답했고, 38퍼센트는 ‘기타’라고 답했다. ‘진정성’을 가장 잘 정의하는 단어를 고르라고 하자 61퍼센트가 ‘진실한 것’genuine, 19퍼센트가 ‘실재인 것’real을 골랐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동의어일 뿐 진정성의 특질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한다. 게다가 진정성을 진실성이나 실재성과 동격에 놓는 것은 일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만사가 진실이고 실재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짜로 존재하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조그비는 아쉬운 대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종합해보건대 우리 미국인들은 ‘진정성’의 정확한 실체는 모르는 듯하나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대강 알고 있으며, ‘진정성’이 뭐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원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이로부터 두 가지가 도출된다. 첫째, 진정성은 그게 아닌 것이 무어냐를 짚어내 그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최적인 용어다. 둘째, 진정성이 뭐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확실하게 원한다. 즉, 어떤 것을 ‘진정성이 있다’고 묘사하면 그것은 언제나 좋은 것을 뜻한다. 진정성은 ─ 공동체, 가정, 자연, 유기농처럼 ─ 모성과 관련된 용어, 찬동의 용어로 항상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며 수사적으로 비장의 카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사회정책을 밀어붙이고 싶은 정치인은 그 정책이 공동체를 번영시킨다든지 가정에 이롭다고 말하면 절대 손해 볼 일이 없다. 기업이 신상품을 팔고 싶다면, 경쟁기업의 대량생산 제품과는 달리 천연 제품, 유기농 제품이라고 홍보하는 게 확실한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꽤 단순하다. 진정성을 논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문제의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이해해야 하며 그것과 대조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정한 것? 물론 좋다. 그러나 무엇과 대조하여 진정하다는 것인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