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피고 ○○○을 징역 2년에 처한다.”
2017년 1월 17일, 서초동 법원에서 상담소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느꼈던 분노와 흥분, 무력감과 참담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2016년을 전후하여 한국사회에서는 유명인이나 남성 연예인에 의한 성폭력이 연이어 대서특필되었고,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남성들은 “무고는 큰 죄”라며 앞다투어 피해자를 무고로 역고소했다. 그날은 유명 연예인 박○○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무고로 고소된 다수의 피해자 중 첫 번째 피해자에 대한 1심 선고 공판 날이었다. 그날의 메모와 재판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판사는 피해자에게 “피고인들피해자와 조력자 A, B의 죄질이 극히 나쁘다… 박○○은 무고로 인해 성폭행범으로 몰려 엄청난 고통을 입었고 씻을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아무 죄가 없는 박○○은 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으며, 가족들도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피고인피해 여성의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이며, 엄벌에 처해 마땅하다”라며 실형을 선고했다. 이날 동일법정 선고 공판에서 전과가 있고, 홧김에 회칼로 옆사람의 허벅지를 찌른 한 피고인은 실형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반면에 이미 구속 수사 중이었던 연예인 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징역 2년, 그녀를 도왔던 A는 징역 1년 6개월, B는 2년 6개월의 형을 받아 그 자리에서 법정구속되었다.
나는 2006년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폭력 피해자 상담과 지원, 가해자 교육 등을 진행해왔고, 2010년에는 〈성폭력 가해자의 가해행위 구성과정에 관한 연구〉로 여성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의 성폭력 상담센터를 거쳐 박사과정 수료 후 2016년부터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에서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했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반反성폭력 연구활동가로 지냈지만, 그날의 서늘함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해자들의 역고소는 늘상 있어왔고, 법은 이미 뼛속 깊이 남성중심적이었으며, 피해자에 대한 언론과 사회적 인식은 새로울 것도 없이 가해자들을 대변해왔다. 그러나 근래 들어 피해자에 대한 무고나 명예훼손과 같은 가해자의 역고소가 빈번하게 드러나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실제로 늘어나고 있을까? 적어도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여성운동은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적·제도적 변화를 요구했고, 많은 부분 진일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무고의 가해자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게 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지하철 교대역에 게시되었다는 한 법무법인의 광고를 보고 아연질색했다. ‘아동성추행, 강간 범죄, 기타 성범죄’ 등에 대한 ‘부당한 처벌을 무죄, 불기소, 집행유예로 이끕니다’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성폭력이 법적 해결 과정을 거칠 때 그간 법원과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유발했을 것이라고 강하게 의심했으며, 가해자에 대한 낮은 처벌과 온정적인 인식이 존재했다. 그 광고는 가해자들을 대변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처벌은 과중할 뿐만 아니라 억울한 가해자가 많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당 광고판은 당시 여러 시민의 문제제기로 철거되었지만, ‘가해자 전담변호사 시장’, 이른바 가해자 중심의 ‘성범죄 전담법인’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즈음 인터넷에 성폭력을 검색하면 법인들은 ‘성범죄 전담/전문변호사’, ‘무혐의, 무죄 받아드립니다’, 심지어 ‘무고 전문’ 등의 문구를 온/오프라인에 홍보했고, 패키지 상품과 같은 형태로 가해자 방어와 (역)고소 건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성범죄 전담법인이라 자처하는 법인들의 홈페이지에는 해당 법인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성폭력 가해자가 무죄를 받거나 낮은 형량을 받았다는 후기가 ‘성공 사례’라는 이름으로 게시되어 있고, 일부 법인은 자신들을 ‘성폭력 상담소’라고 소개하기까지 했다. 성폭력 가해자의 법적 대응 과정은 수임료가 높더라도 승소율이 높고 성공 후기가 풍부한 업체를 선택하면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시장화되고 있었고, 법조 시장에서 성폭력 가해자 변호는 그 어느 범죄보다 돈이 되는 분야로 선호되고 있었다.
긴장감 속에서 2017년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는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역고소 피해자들과 변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러한 전담법인의 활동이 결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몇몇 피해자들은 6~7건 이상의 역고소 피해를 입었다. 역고소는 본인뿐 아니라 가족, 주변인과 지지자 들에게까지 이루어졌으며, 그 수는 수십에서 수백 건에 이르기도 했다. 가해자를 고소했다는 이유로, 피해사실을 공론화했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역고소들은 무고, 명예훼손, 협박, 모욕, 공갈, 강요, 위증, 손해배상 등 민형사를 넘나들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피해자의 학교, 직장, 가족, 친구 관계를 비롯하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보복성 역고소’가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성폭력 피해자들은 고소나 문제제기를 고민할 때 가해자의 역고소도 고려해야 했고, 성폭력 고소와 역고소, 또 이에 대한 대응들로 성폭력 사건의 해결 과정은 사법질서에 종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쯤되면 법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구현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가해자의 편에 선 보호막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최근 여성운동단체들은 가해자들의 감형 전략과 홍역을 치르고 있다. 반성의 일환으로 재판부에 내기 위한 후원금 납부와 회원가입이 증가했고, 가해자임을 숨긴 채 자원활동을 신청하거나,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는 남성이 재판 중인 가해자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이처럼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리고 피해자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이러한 방식들이 가해자의 감경요소로 적용되는 관례로 인해 단체들은 후원회원 가입이나 기부 시 어떠한 이유와 경로로 이루어진 것인지 더욱 꼼꼼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후원회원이나 기부자에게 환영과 감사가 아닌 의심과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활동가들은 피해자들이 어떻게 성범죄 전담법인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가해자의 ‘억지 기부’를 찾아낼 수 있을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부가 어떠한 사건의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 다양한 대응 활동을 하는 동시에 반성폭력운동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 고민해왔다.
과연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이 가능할까 반문하던 것도 잠시 2015년경부터 특정 공동체를 중심으로 발화된 이른바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 운동’이 헐리우드를 경유하여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말하기와 함께 ‘미투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실천되기 시작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통계 분석에 따르면, 2018년 총 1,189건의 상담 중 미투와 관련된 상담은 181건15.2%으로 성인기의 피해는 59.1%, 청소년기14~19세는 13.8%, 어린이8~13세의 경우 20.5%, 유아기7세 이하의 피해도 3.6%로 나타났다. 주로 미투를 언급하며 상담을 했거나 그동안 피해를 말하지 못하다가 최근 미투운동을 보며 용기를 내거나, 그 이전에는 피해로 인식하지 못하다가 최근에 피해를 인식하게 된 경우들이었다. 이러한 상담들은 특히 2018년 1월 30일부터 5월 말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내담자들은 상담원에게 말하는 것에서부터 공론화하거나 법적 신고를 고려하는 것, 개인적으로 항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문제제기를 미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지난 30년 동안 이런 전국민적인 반응은 처음이라는 한 활동가의 말처럼, 상담실에 상담 전화가 빗발쳤으며, 미투운동에 참여하는 피해자들의 증가와 관련된 언론 보도가 이어질수록 학교에서, 회사에서, 거리에서,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온라인에서 피해자들은 무엇이라도 할 기세로 몰려들었다. 내가 속해 있던 연구소에서는 급히 여성가족부의 연구용역을 받아 《성폭력피해상담 분석 및 피해자 지원방안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전국 4개 상담소의 1년간 상담일지 1만 5,000여 장을 일일이 살펴 보고 미투운동의 배경, 동기, 실제 피해자들의 호소 내용, 처리 과정에 대한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 일지에 드러난 사례들은 주로 아동·청소년기에 친족관계나 선생님 등에 의한 피해들과 직장, 학교 등 뚜렷한 권력관계하에서 발생한 성폭력, 그리고 오래전의 피해가 많았는데, 53년 전의 피해를 처음 말한다는 상담도 있었다. 상담일지는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미투가 존재하고 있으며, 법적 구성요건이나 공소시효, 친족관계 등의 이유로 법적으로 해결될 수 없거나, 하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들이 얼마나 많이 누적되어 있는지, 왜 미투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일었다. 더불어 성폭력은 특별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보통의 경험’이라는 것, 여성들과 피해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사회에 큰 균열을 낼 수도 있다는 것도 경험하게 했다.
미투운동으로 어렵게 다시, 혹은 이제야 법적 해결을 시도한 사건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 일부는 가해자의 역고소로 보복을 당하거나 허무한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2018년 8월 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의한 성폭력에 무죄판결을 내렸던 1심 재판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설명하면서 “여성이 상대방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자유의사의 제압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하였음에도 자신의 결정을 사후적으로 번복하면서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헌법재판소 2009.11.26. 서고 2008헌바58, 2009헌바191(병합) 결정 등 참조]”라며 피해자를 개인화하고 비난하는 논리를 구성해냈다. 해당 선고가 발표된 직후 나 역시 많은 여성과 함께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외쳤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며 거리를 점거했던 여성과 시민 들의 시위와 강한 문제제기에 힘입어 2심과 3심에서는 다행히 유죄판결이 나오기는 했지만, 구태의연한 것 같으면서도 새로웠던 이 논리가 적잖이 충격이었던 나는 성폭력 판결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간의 성폭력 무죄 판결문들에서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거나, 가해자는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무죄라는 논리의 판결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 여성은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역설이 등장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